4월 4일, 파면 순간을 담담 덤덤 지난다. 4월 5일, 비상 행동 18차 승리 집회를 빗속에서 담담 덤덤 마친다. 4월 6일 아침, 문득 헌재로 가자고 생각한다. 숭미 모일 매판 떼거지가 오늘도 악악대고 있으리라 예상하지 않지만, 어떤 풍경을 그리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더 큰 일정을 생각해 낸다. 종로3가역에서 내려 종묘로 간다.
지난번에 눈여겨보지 못해 아쉬웠던 부분을 섬세하게 되짚어간다. 정전과 영녕전을 중심으로 정색하고 눈에 담는다. 그리고 나무와 숲이 구성하는 미학에 깊이 주의를 기울인다. 서울에서 큰 나무와 울창한 숲은 사실 산보다 궁·능에 있다. 궁·능을 걸으면 자연과 문명,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시공을 각별하게 마주할 수 있다. 역설 미학 지성소다.
복원한 길을 따라 창경궁으로 들어간다. 창경궁은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별궁인 수강궁을 지어 거처로 삼은 데서 출발한다. 성종이 크게 중건하고 이름을 바꿔 창경궁으로 자리 잡았다. 정변과 전란으로 불타기를 거듭하며 수난을 겪었다. 무엇보다 악랄한 왜놈 제국이 전각을 부수고, 일본식 건물을 짓고, 마침내 ‘창경원’으로 만들어 모독했다.
해방 후 1980년대에 복원 사업이 출발한다. 2024년부터 2043년까지 5차에 걸쳐 장기 복원 계획을 세워 놓았으나 예산 문제도 있어 우선순위 높은 곳 중심으로 단계별 복원이 이루어질 전망이다. 다른 궁도 마찬가지지만 비가역 훼손이 너무 심해 아무리 해도 원형을 되찾을 수는 없다. 제 역사를 제힘으로 지켜내지 못한 죗값은 모질고도 가혹하다.

커다란 수양버들이 연두색 봄 옷을 입고 서 있는 창경궁 춘당지. 일제가 파고 이름 지었다.
함양문 지나면 창덕궁이다. 창덕궁은 사실상 조선 정궁이었다. 경복궁은 초기와 고종이 중건한 이후에 정궁 구실을 했을 뿐 대부분 정치·역사는 창덕궁에서 이루어졌다. 대한제국이 망하고 대한민국이 들어선 이후에도 황족 일부가 거주했을 정도로 창덕궁은 기나긴 역사 속에서 그 실질 위상을 간직해 왔다. 5대 궁궐 중 원형 보존에 으뜸이기도 하다.
외양 보존과는 달리 개국과 식민지를 거치는 동안 내부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주요 전각 내부 구조가 서양식으로 바뀌는가 하면 인정전이나 선정전에는 전등이 달려 있기도 하다. 심지어 현관에 자동차 진입로가 있는 전각도 있다. 이완용이 창덕궁을 일본 황실 별궁으로 쓰자고 계속 주장했으나 무산됐다. 하마터면 내부가 오욕을 뒤집어쓸 뻔했다.
흐드러진 홍매로 잠시 눈 호강하다가 인정전 거쳐 회화나무 군락이 있는 금천 지나 창덕궁을 나온다. 드디어 헌재다. 설마 했지만 경찰차가 철통같이 둘러싸고 있다. 광훈이 떼거리가 얼씬조차 하지 않아도, 경찰은 당분간 경호 체제를 유지한다고 한다. 우여곡절 있었으나 헌재가 나라를 구한 사실 만큼은 부동이다. 헌재 제도 타당 여부는 뒤에 따지자.

차벽에 둘러싸인 헌재
더 나은 헌법 수호 제도를 기대하면서 나는 삼청공원 쪽 진입로 따라 백악을 오른다. 120여 일 동안 그 앞에서 벌어진 일을 모조리 듣고 본 백악 숲이 모를 리 없지만 나는 보고와 감사 의례를 행한다. 남은 기도를 올린다: 명신 파멸, 국짐 해산, 매판 척결, 자주 민주. 앞으로 얼마나 더 백악에 오를지 모른다. 그냥, 생명 미학 나누려 올 날을 꿈꾼다.
시간을 확인한 다음 백악을 나와 칠궁으로 간다. 육상궁으로 직행해 예와 기도를 올리고 나와 경복궁으로 향한다. 신무문을 통해 들어가 전에 눈여겨보지 못했던 전각과 나무들을 곱고 촘촘하게 톺는다. 집옥재와 팔우정을 눈에 담다가 집옥재 주련에 마음이 끌려 머문다. 찬연한 문명을 거느린 채 웃는 살구꽃과 버들에 인사하며 경복궁을 떠난다.
이제는 경운궁이다. 지난주 왔을 때 눈길 바깥에 있던 풍경을 챙긴 다음 선원전 권역 발굴, 복원 예정지를 돌아본다. “고종의 길”을 걸어 경희궁 쪽으로 간다. 경희궁은 정문을 막고 공사하는 바람에 빙 돌아 들어간다. 크게 한 바퀴 돌고 옛 기억 따라 골목길 더듬어 사직단으로 향한다. 북신문 앞에서 사직단을 향해 의례를 행하고 기도를 올린다.
이렇게 해서 종묘-창경궁-창덕궁-헌재-백악-칠궁-경복궁-경운궁-경희궁-사직단 행진 의례 완성이다: 총 20km. 숲과 도시, 역사와 현실이 얽히고 겹치는 시공을 품으며 천추 아프게 걸어 오늘 또 내 한 날이 결 지고 겹 진다. 나는 그저, 이렇게 살아간다. 성공한 사람이 눈에 띄는 결과물들을 쌓을 때, 나는 눈에 띄지 않는 진실들을 짠다. 그뿐이다.

백악이 품고 있는 과거와 현재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