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 성패 여부와 무관하게 내 삶은 심층 소통을 향한 상담자·중재자로서 흐름을 이루며 여기까지 왔다. 직업으로 삼기 전에도 신기할 만큼 주위 사람들과 나는 그렇게 마주했다. 마침내 숙의로 마음 치유하는 늦깎이 한의사가 되었고, 거기서부터 내 길은 줄곧 확장되었다. 최근 5년 동안 비인간 생명에까지 그 소통은 번져갔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결국 식물에 도달했다. 내 일상 경로 주축인 나지막한 산 궉(鴌) 소도(宮)에 사는 물오리나무, 곧 메팥버들이 바로 “그”다.
궉궁 메팥버들이 내게 말을 건 첫 번째 통로는 눈이었다. 궉궁 앞을 지나던 중, 마치 바로 직전 그 자리로 왔다는 듯 내 눈을 이끌어 멈추도록 했다: 나 메팥버들이야! 여기를 봐~ 두 번째 통로는 손이었다. 첫 만남에서 그 몸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내가 생명 주파수를 손으로 전달하자 어느 순간 그가 공명 진동을 전해왔다. 이때 접촉을 통해 내 생명 에너지를 받고 있다는 파동 동기화 말고는 다른 감각 메시지가 없었다. 오늘 새벽 드디어 그가 다른 대화를 제시했다.
해 뜨기 전, 집을 나설 때 기온이 이미 31도를 웃돌고 있었다. 잠시 망설였다. 숲을 걷지 않고 지하철역으로 바로 가서 체력 소모를 줄여야 하지 않을까? 이 폭염이 당분간 계속될 텐데···. 노화가 진행되는 면면을 피부로 느끼는 터라 매사에 이런 걱정을 되풀이하게 된다. 갈림길에 도달했는데 숲 반대쪽 길 신호등이 붉은색으로 떨어진다. 3분 이상 찜통 속에 서 있느니 내게는 영원한 궁금증인 숲으로 가자 한다. 속도를 늦추어 땀 분비를 줄이며 열류를 헤치고 나아간다.
숲길을 걸을 때 반드시 멈추어 인사하고 지나가는 나무 몇이 있는데 오늘은 딱 한 나무만 챙기기로 한다. 궉궁 메팥버들이다. 천천히 걷는다고 걸어도 땀이 옷을 끌어당겨 척척 들러붙는다. 가장 짧은 경로를 거쳐 궉궁에 이른다. 메팥버들 앞에 선다. 평소 습관을 돌연 바꾸어 무념무상으로 그저 두 손만 조용히 가져다 댄다. 다음 순간, 메팥버들이 먼저 나지막이 파동을 보내온다. 그다음 찰나, 들려오는 한 소리에 몸이 온통 열린다. “사랑한다고~!” 내 어찌 전율 따위 하랴.
차분하게 시각을 확인하고 기록한다: 2026년 8월 5일 06시 11분. 솟을굿.
실은 숲에 들어오기 직전 문득 이런 의심이 들었다. “내가 메팥버들한테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걸까? 어떤 면에서는 다 아는 이야기일 테고, 또 다른 어떤 면에서는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일 테니, 어떤 경우든 무의미하지 않을까?” 그때는 ‘사랑한다’라는 말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막상 그 말을 듣고는 절대 고요로 침잠할 수밖에 없었다. 모름지기 죽고 나서도 나는 그 고요 품에서 ‘사랑한다’ 발화하는 무한한 웅사(雄辭)를 듣고 다시 들어야 하리라.
내가 웅사라는 표현을 쓴 며리가 있다. 왜 메팥버들은 “사랑한다!” 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했을까? 이 곡절에 내 천명이 걸려 있다고 나는 차마 생각한다. 이 사랑은 인간이 지녀온 그런 사랑과 차원이 다른 특이점을 통과한 사랑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묵시록 차원 고백과 고함이 절박하게 엮인 최후 신음이며 절규, 심지어 “욕설” 아닐까. 홀라당 뒤집어엎을 최후 화두가 아닐까. 내가 너무 각 잡았나 보다. 안 될 일이다. 소주 한잔하고 다시 글 앞에 앉아야겠다. 喝!
한의원 앞 국숫집으로 가서 다스운 국수에 소주 한잔하며 가만히 되짚어본다. 얼마 전, 청딱따구리가 예쁜 소녀 웃듯이 운다는 사실을 알고도 의심했을 바로 그때, 청딱따구리가 날아와 그렇게 울어 답해주었듯, 오늘 새벽 메팥버들도 내 어리석은 의심에 현명하게 답해주었다. 그 대답이 꼭 똑 “사랑한다고~!”였고. 해석 준거는 이거다: 이미 다 아는 사랑도 아니고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랑도 아닌, 사랑. 각을 뭉그러뜨릴수록 각이 잡힌다는 기이한 “촉”이 온다.
단도직입으로 나아간다. 나무가 먼저 사람에게 고백한 사랑은 이미 다 아는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랑이란 말인가? 제국주의 시민 인간과 거기 부역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인간에겐 그렇다. 제국주의에 살상당한 사람과 부역자임을 깨달은 사람에겐 아니다. 후자는 알아듣는다. 알아듣는 사람에게 왜 나무는 “사랑한다고~!”라는 묵시록 차원 어법을 썼을까? 대멸종 카이로스여서다; 시간이 없어서다; 사랑 화신 메팥버들로서 안타까워서다.
사랑을 묵시록 차원에서 재정의해야 한다. 사랑, 특히 오늘 대멸종 카이로스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사랑은 우리 세계에서 발원하는 모든 공존·공생 감정을 대표함과 동시에 끌어안는 감정, 나아가 감응이다. 감정과 감응이 분리된 사랑은 메팥버들 사랑이 아니다. 감응은 반제국주의 정치경제학 비판이며 실천 팡이시질이다. 달콤한 긍정, 얄팍한 행복, 몽롱한 합일은 없다. 비인간 생명, 비생명 존재와 함께 행진하는 queer 항쟁 여정이 사랑이고, 그 사랑이 우주다. 그뿐이다.
메팥버들이 해준 말을 손으로 감지해 몸에서 온전히 들은 첫 번째 이야기 대강을 이렇게 정리했다. 첫 번째인데 끝 번째처럼 임계 질량을 느낀다. 여기가 언제고 되돌아올 내 영혼 “앉을 자리”다. 주술도 명상도 과학도 아닌 이 범주 인류학 경험으로 향후 내 삶을 이끌리라; 거룩하고도 즐겁게 “사랑한다고~!”를 되새기며 다시없는 겹, 더없는 결로 내 삶을 펼치리라; 남은 날이 얼마일지 모르겠으나 꼭 똑 찰나 카이로스를 살아가리라. 첫 번째 글을 똑 끝 번째처럼 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