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먹으러 단골 백반집으로 간다. 면식이 있어 인사 정도 나누는 여자 사람 하나가 일행과 함께 옆자리에 앉아 있다. 홍수에 떠내려가는 소 영상이 뉴스로 나온다. 소도 주인도 울부짖는다. 순간 그 여자 사람 입에서 아이고 저걸 어째!” 소리가 터져 나온다. 바로 이어지는 말을 듣고 나는 아연 충격에 빠진다. “추석 때 소고기 가격 뛰겠네!”

 

나중에 백반집 주인장한테 들으니, 임대료만 가지고도 넉넉히 먹고사는 건물주란다. 아무리 서울이지만 여긴 변두린데 얼마나 뜨르르하기에 저리도 영혼 부재 증명이 확실한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가 돌연 생긴다. 가진 거 자랑이 자뻑이 되는 찰나 안와전두엽이 해골 밖으로 탈출하기는 조만장자나 백만장자나 차이 없다. 인간 세상 이치다.

 

명신네 일당 반란 뒤 우리 사회는 단군 이래 가장 큰 규모로 커밍아웃 사태를 겪고 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사대 매판 세력이 남김없이 본색을 드러내는 중이다. 주둥이 열고, 몸뚱어리 내돌리고, 낯짝 구겨댈 때마다 사악한 기운이 쏟아져 나오는 까닭은 저들이 쓴 인두겁 안이 텅 비어 있어서다; 인두겁만으로 인간 놀음을 해왔던 탓이다.

 

점입가경 폭로되는 목불인견 범죄상은 요샛말로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더는 그 행태들을 입에 담고 싶지 않다. 나는 정치든 역사든 거대 담론은 말할 자격 없으니 그저 내 깜냥에서 이런 소망 하나 지닌다: 이 심판과 정화 시대를 건너면서 우리가 쓴 인두겁 값어치만이라도 제대로 지키고 사는 사람들 세상으로 바뀌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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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에 선 어떤 비인간 존재들, 또는 내가 그 주변에 선 어떤 비인간 존재들과 나 사이에 일상 네트워킹-내 용어는 팡이실이(hyphaeing)-이 이루어지는 경험을 최근 들어 제법 자주 언급한다. 그 실재 여부를 정치하게 따질 며리는 없겠고, 내가 의도하지 않은 선택이 의도한 선택과 동일한 결과로 인도될 때 느끼는 경이와 경외를 확인한 기억은 남길 만하다고 여긴다.

 

내 일요일 루틴 가운데 하나는 광화문 교보에 들러 과학-식물인문-시 코너에서 신간 서적을 확인하고 필요한 경우 모셔 오는 일이다. 얼마 전 책 제목과 목차, 그리고 저자 면면을 살펴본 뒤 현재 관심사와 거리가 멀다고 판단해 도로 내려놓은 책이 한 주 지나 다시 눈에 들어오길래 집어 들고 목차를 조금 더 세심히 살핀다. 처음에는 눈길을 끌지 않았던 소제목 하나가 돌연 튀어 오른다: ‘쩌는 음색과 소리의 육체성. 그래서 품어온 책이 바로 듣기의 철학이다.

 

우선 거기부터 읽는다. 음악학자가 쓴 글인데 잘 읽힌다. 이른바 MZ세대가 음악 행동하는 방식을 이야기하면서 음색 쩔잖아요.”라는 표현에 뿌리내려 이야기를 짜나간다. “쩔다/쩐다라는 말은 어원이 무엇인지와 무관하게 매우 좋은, 뛰어난 대상을 대뜸 느끼는 상황을 묘사한다. 설명 없이, 이해 전에, 몸으로 벌써 들어와 있다는 이 표현은 칠십 대인 내게도 익숙하다.

 

그런데 왜 하필 쩌는감각이 음색으로 향할까? 글쓴이에 따르면 음색은 간접 또는 부정 방식으로 정의되는 음악 요소다. 음높이, 길이, 크기가 모두 같은 두 음악이 존재할 때 서로를 구별해주는 기준이 음색이라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음색이 단연 중요해지기 이전까지 음악에서는 부차또는 이차요소였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글쓴이는 반전 계기나 근거를 모바일 사운드스케이프 시대 이어폰 문화, 몸 매질로 듣는 음악 경험에서 찾는다.

 

설득력도 있고 흥미롭기도 하다. 읽다가 불현듯 되살아난 기억에 터 잡아 이 이야기를 좀 더 곱고 촘촘하게 톺기로 한다. 음색이 간접 또는 부정 방식으로 정의되는 음악 요소라는 말은 보편 진실인가부터 살핀다. ‘불현듯 되살아난 기억이 전하는 바로는 아니다, . 왜냐하면 우리 전통음악, 그러니까 국악은 서로 다른 음색이 어울려 빚어내는 단선율 음악이기 때문이다.

 

국악은 창이든 악기 연주든 본디 화음이 없다. 실제로 생황을 제외하고는 모든 악기가 화음으로 연주하게 되어 있지 않다. 생황마저도 중국 묘족(苗族)에서 유래해 정착한 악기다. 국악은 음을 정성(定性)으로 파악한다. 정량(定量)으로 파악하는 서구 음악과 본성이 다르다. 비단 음악만이 아니라, 언어를 포함한 문화 전반에서 이런 차이를 드러낸다.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할 따름이다. 음악학자인 글쓴이 자신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이렇게 쓰고 멈추었을 터이다.

 

여기서 멈추면 다음 내용도 따라 멈출 수밖에 없다. MZ세대가 이어폰 문화를 통해 쩌는 음색 세계로 들어갔다는 분석에서 멈추면 이 현상이 서구에서도 일어났으리라는 추정이 당연해야 한다. 그럴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글쓴이가 인용한 롤랑 바르트 이야기가 방증이다. 음색과 닮은 결정(結晶)’ 감수성은 롤랑 바르트 아닌 일반인에게는 서구 MZ세대라도 어림없다.

 

같은 MZ세대지만 서구 MZ세대와 달리 우리 MZ세대에게는 음색 음악을 지어낸 생태 본성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아귀가 맞는다. 식민지 교육에 쩔어서본성을 거의 상실한 기성세대와 전혀 달리 개별성, 육체성으로 열린 우리 MZ세대가 모바일 사운드스케이프 시대와 때마침 만나 옛 본성을 되찾은 사태로 해석하는 일이 그렇게나 무리일까. 이 해석이 틀릴 수 있음에도 제시하는 까닭은 모든 분야에서 우리가 여전히 제국 패러다임에 갇혀 있어서다.

 

올해로 광복 80주년이다. 8개월여 전, 일제에 부역한 특권층 매국 세력이 반란 일으켜 나라를 식민지 상태로 되돌릴 뻔한 일을 겪고, 가까스로 정상 되찾아가는 중이라 심사가 복잡하다. 장갑차 막아선 민주 시민이 자랑스럽다가도, 여전히 악귀로 준동하는 반란 무리 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그나마 요 며칠 제국 가로질러가는 이재명 정부 보며 섟 푼다. 수제천이라도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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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혁(성형외과 전문의)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대학 동기인 이승훈 교수가 이토록 멋진 강의를 하고 있을 줄 몰랐다. 신경과 교수이지만 내분비, 생화학, 영양학을 넘나들며 일반인들의 주 관심사들을 매우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는데, 상식을 뒤집는 아주 예리하고도 중요한 설명이 흥미롭다.
요점은 비만과 당뇨에 있어 포도당이 주범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탄수화물 혐오의 시대에 살고있다. 흰쌀과 밀가루는 당뇨와 비만의 주 범인으로 낙인찍혀 있고 과일, 고단백질 고지방식이 건강을 위해 환영받고있는 것인데. 과연 그것이 과학적으로 완전무결한 진리일까?
내가 조금만 이 강연에 msg 쳐서 풀이한다면 쌀과 밀 등 곡류가 주로 갖고있는 것은 포도당인데, 포도당은 몸에서 저장을 잘 안 하고 거의 들어오는대로 쓰여져 없어진다는것이다. 이게 뱃살 옆구리살로 갈 틈이 없다. 반면, 과일 속에 풍부한 과당은 인간 체내에서 곧바로 저장소로 직행하고 소비가 잘 안된다는 것이다. 저장소란 지방세포이니, 빠르게 내장지방, 복부비만의 원인이 되고 만다. 그리고 비만이 곧 2형 당뇨의 원인이다. 비만에서 벗어나면, 2형당뇨는 롤백되고 없어지기도 한다.
타히티섬 원주민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무진장하게 열려있는 열대과일들을 먹으며 살아왔다. 햄버거 피자 라면 이런거 없어서 전연 못먹던 시절에도 푸짐하고 비만한 몸매였다. 이것은 곧 과당이 비만의 주범이 아닐까라는 인사이트를 만들었고, 실제 미국에서 액상과당이 옥수수로부터 엄청나게 생산돼 청량음료나 베이커리(케이크), 각종 단맛나는 가공식품 등에 쓰이게 된 이후부터 미국인들의 비만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었다. 포도당 섭취나 스테이크때문은 아니었다.
국수나 면 즉 밀가루, 흰 쌀등은 몸에 안좋다는 상식은 탄수화물 혐오와 겹쳐 현재 우리의 식단을 지배하고 있고 특히 여성층, 젊은층에게 어필하고있다. 이때문인지 한국의 쌀 소비량은 현저하게 떨어지고있고 그게 쌀농사의 위기로까지 번졌다.
우리 몸의 유전자는 이 한반도에 수천년 이상 살아온 조상들의 dna에서 크게 다르지 않고, 이들은 그 긴 세월동안 쌀을 대량으로 먹으며 지냈다. 한국 토종식물을 미국이나 러시아땅에 옮겨심으면 거기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벼란간 불어온 탄수화물 혐오 현상 역시 한국인의 몸에는 스트레스일 것같다. 나는 한국 식당에 가면 나오는 공기밥 사이즈부터 바꿨으면 한다. 성인 주먹 분량만큼만 나오는 밥의 양은 자꾸 디저트나 식후의 주전부리를 자극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처럼 고봉으로 떠먹는 정도의 량은 아니더라도, 지금보다 밥의 섭취량은 많아져도 된다.
비만에 있어 가장 위협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상당량의 포식 후 칼로리 로딩이 대단히 높아진 상태에서 나오는, 식후의 과일 디저트 (아이스크림 포함)이다. 이게 햄버거나 라면보다 훨씬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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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년 동안 숲과 물에 빙의되어 생사 고비까지 넘겨 가며 드나들었다. 그게 몸을 배려하지 않은 고행 수준이었는지 후유증이 제법 오래간다. 천추 통증은 뭉근하기와 날카롭기를 갈마들고, 왼쪽 발바닥과 오른쪽 옆구리 불편한 느낌도 수시로 출몰한다. 사실 이런 증상은 애당초 예상된 것이었다. 10대 초반에 다친 어깨 탓으로 몸 전체 균형이 깨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50년 이상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살아온 습관이 무심코 무리하도록 이끈 듯하다.

 

최근에는 일요일 걷기를 대폭 줄이고 가능한 한 가파른 산을 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천추 통증은 현저한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뒤틀린 천장관절 구조가 일으키는 문제로 판단되지만, 특별히 할 일은 없다. 간단 요가로 꾸준히 풀어주면서 관찰하는 중이다. 이러는 사이 일요일 걷기는 전처럼 멀리까지 나가지 않는 범위로 좁혀졌다. 궁 능과 국··, 그리고 국··박으로 이어지는 행로였다. 그중에서도 종묘와 국··, 특히 종묘 걷기가 가장 많았다. 무슨 연유에설까?

 

처음에는 문화유산으로서 또 예술로서 지닌 장엄함에 이끌렸다. 여느 궁 능과 사뭇 다르게 지닌 그 빛깔에 사로잡혀 가고 또 갔다. 다음에는 숲에 눈길을 깊이 두었다. 비록 작은 숲이지만 내 눈에는 정전만큼이나 장엄했다. 그러다가 지난 일요일(2025817) 여기가 자연과 문명이 만나는 가장 날카롭고도 부드러운 마주 가장자리라는 사실을 드디어 알아차렸다. 종묘야말로 문명이 극한 겸허로 자연에 깃들고 자연이 극한 관대로 문명을 품은 공존 상생의 지성소다.

 

정전과 영녕전은 건물 자체로 이미 문명 초극을 향해 있다. 맛있게 만들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미각을 감화하는 음식과 같다. 현액도 없고 단청-구태여 찾는다면 풀빛 하나-도 없다. 이는 필경 인간 저 너머 계신 신들을 향한 지극한 헌정이리라. 숲은 높은 듯 나부시 그리고 다정히 신들의 거처를 감싸안는다. 그런 숲에 화답하여 정전과 영녕전 처마 끝은 하늘 향해 솟아 있지 않다. 이 각성은 걷기 몸 감각에서 나왔을 테다. 살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로 말이다.

 




땀에 흠씬 절은 채로 천천히 찬찬히 걷고 또 멈추고 또 걷는다다른 눈으로 문명과 숲을 다시 본다그 둘이 닿고 겹치고 사이 내는 모습을 곱고 촘촘하게 관찰한다경이로운 자태를 드러내는 버섯을 틈틈이 기린다우람한 나무들에 예를 갖춘다볼 때마다 처음처럼 새로운 정전 장엄을 온몸에 담고 마침내 숭고한 사건 하나 되어 문을 나선다그래오늘 여기가 내 의학이며 철학이며 사상이며 전선이다네이팜탄 터진 듯한 팔월 뙤약볕 벌판을 뚫고 사바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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