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 한군데 꼭 갈 일이 남았다고 생각한다: 용산. 분명히 산이지만 그 산이 있기는 한가? 정확한 산 자리를 아는 사람은 없는데 용산은 유구하게 뜨르르하다. 임진왜란 때 왜군, 임오군란 때 청군, 식민지 때 일제 조선군, 군정 이후 미제 점령군, 일제 조선군을 계승한 허울 대한민국 국군, 이제는 심지어 허울 대통령실까지 덮쳐서 둥지 튼 악마 십승지(十勝地), 바로 거기 용산이 정말 용산인가? 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어 이리저리 자료를 뒤지며 알아낸 결과만큼 경로를 잡아 일단 용산 걷기를 실행에 옮긴다.

 

제국과 부역 군대, 그리고 정권이 똬리 튼 용산은 가짜 용산이다. 아니, 일제가 본디 용산을 지우고 제 소굴을 ()이라 도둑질해서 조작한 상징이다. 저들이 소굴로 삼은 산은 본디 둔지산이었다. 그 이후 둔지산이란 이름은 사라졌다. 진짜 용산은 오늘날 마포구와 용산구 마주 가장자리를 이루는 능선과 그 자락이다. 이 능선은 안산(鞍山)에서 발원해 애오개를 내어주고 만리재마저 내어주면서도 계속 내달려 마침내 한강에 이르러 우뚝 서 발길을 거둔다. 오늘날 벽산빌라-외인 출입 금지, 경비가 지킴.-와 마포타워가 점령한 벼랑이 남호(南湖) 절경을 이루며 담담정, 읍청루를 불러들인 바로 거기다. 이 용산, 이 이름은 이미 고려 후기부터 있었다.



담담정 자리를 차지한 고급 빌라

 

그 유서 깊은 능선과 자락은 현재 거의 완전하게 숲을 빼앗기고 포장도로와 길가 겨우겨우 살아가는 몇 그루 나무 행렬로만 남았다. 대표적인 길이 백범교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진 새창로8길이다. 나는 그 길을 따라 걸으며 가슴을 뒤흔드는 분노와 애통으로 자주자주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용산 마루에 이르러서는 더욱 참담해졌다. 거기에는 천주교 성당이 우람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한국 천주교의 준() 성지에 해당하는 곳이라 한다. 용이 나타났기에 용산이라 했다는 상서로운 곳에서 정작 우리가 목격하는 이 풍경은 식민지 아니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국적 불명 어수선함이다. 숲도 이름도 사라진 산마루 주인이 용산 성당이라니.



사라진 숲을 지키는 거목 하나를 신목으로 삼다

 

빼앗긴 이름, 죽임당한 숲, 용산을 떠나기 전에 나는 결단코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나 더 챙긴다. 사실, 이 걷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 눈길을 가장 먼저 끈 이야기는 청암동 부군당(符君堂) 역사다. 부군당은 서울·경기 일원에 남아 있는 마을 신당이다. 특히 용산에서도 한강 가까이에 유달리 많다. 청암동 부군당은 처음 있었던 자리에서 두 번이나 이전했는데, 그 과정이 아프다. 일제가 도로를 내는 바람에 그렇게 된 일은 식민지 어디서든 일어났으니 그렇다 치더라도나중에 특권층 부역자들이 저지른 협잡은 치졸하고 야비하다. 구의회 의장 부자가 몫 좋은 부군당 부지를 사들여 6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부군당은 길 건너 산비탈 자투리땅으로 내몰렸다. 신당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마구잡이 잡식 양옥으로 시늉만 내고 프린트한 날림 현판을 걸어 놓았다. 일제보다 부역 세력이 더 그악하다는 진실을 유감없이 드러내 준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오래도록 머무르다가 고요히 내 의례를 마치고 떠난다. 이 막다른 좁은 길에서 맞닥뜨린 처연함은 쉽게 잊히지 않으리라.



짜투리땅의 초라하고 생뚱맞은 청암동 부군당(1)



짜투리땅의 초라하고 생뚱맞은 청암동 부군당(1)



청암동 부군당을 내쫓고 들어선 호화 건물



인근 산천동 부군당- 이와 비교하면 청암동 부군당은 간이 화장실 수준이다

 

마침내 가짜 용산 본영으로 간다. 아니. 못 간다. 경찰과 경호관이 길을 막아서다. 삼각지역에서 내려 이른바 대통령실 쪽으로 가는 큰길부터 제지와 간섭이 자행된다. 대통령실 구경할 수 없느냐 물으니 그렇단다. 국방부 건물 뒤를 가리키며 그쪽에 있느냐 물으니 모른단다. 윤석열 집단이 왜 여기를 근거지로 삼았는지 단박에 감 잡는다. 국민과 가까이서 소통하려고 외진 청와대 떠나 항간으로 나왔다면서, 빈 청와대 개방으로 헛생색은 내고, 정작 제 처소는 구중궁궐로 만든 까닭을 삼척동자 아니면 모를 리 없다. 그래, 거기다 저 제국 군대들이 쌓아온 강고한 점령 층위에 올라타 그 철권을 영속화하려는 야심을 묶으면 특권층 부역자 정권이라는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난다. 검은 감시자들 눈을 피해 사부자기 반제국주의 의식을 올리고 크게 한 바퀴 돌아 집으로 가는데 금방이라도 누군가 덜미를 낚아챌 것만 같은 두려움이 옷깃을 파고든다. , 저들이 노리는 바가 이렇게도 작동하는구나.

 

멘토라는 자, 또는 풍수 전문가라는 자, 이들을 끌어들인 자, 그 누가 만들었든 윤석열을 이리로 이끈 내부 서사는 내 알 바 아니다. 모든 정치, 더군다나 부도덕한 정치라면 으레 인류학적 행태를 극단 수준으로 펼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문제는 서사 자체가 아니라 신이나 영적 자연이 지닌 권위를 사적 탐욕에 가져다 바치는 자들의 생각 없음, 그러니까 진부성, 피상성이다. 그 진부하고 피상적인 인간 종자들이 경악스럽고 웅숭깊은 악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 무섭다. 한나 아렌트는 그러므로 틀렸다. 악은 평범하지 않다. 악인이 평범하다. 평범은 실제로 평범 이하인데, 더 큰 문제는 평범 이하를 비범으로 믿는 과대망상이다. 그 과대망상증 환자 한 움큼이 주제넘게 갈개질하는 허울 대한민국은 찐 식민지로 되 치달아 간다.

 

야울야울 타오르는 공포와 우꾼우꾼 솟아오르는 분노를 다독거리며 가족과 약속한 저녁 자리로 간다. 오늘은 어디 갔다 왔느냐는 물음에 용산이라 답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게 실제 산이냐 묻는다. 내력을 간결하게 설명하고, 도둑맞은 산과 빼앗긴 숲을 걷기로 되찾았노라 하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빙그레 웃음은 눈에 넘기고 벌컥벌컥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켰다. 가족인들 어찌 내 전쟁을 속속들이 알겠냐만, 못다 한 속 이야기가 몽글거리는 일 또한 어쩌겠는가. 거푸 한잔 더 마신 막걸리로 몸도 맘도 얼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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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숙취에서 아직 덜 깨어 요즘 걷기는 80%가량만 한다. 오늘은 청룡산. 서울대입구역에서 서울대로 넘어가는 길 오른쪽에 있는 160m 높이 낮은 산이다. 강감찬 장군이 지나다 울창한 숲을 보고 능 자리로 좋겠다고 하여 청릉산(靑陵山)이라 했다는 설화가 전해 온다. 개발에 밀려 사라졌지만 실제로 능과 능말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청릉산은 두음법칙과 어긋나게 청능산이라 불렸다. 정능(精能)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는데 이와 혼용하면서 일어난 변화라고 추정할 만하다. 청룡이라는 이름은 6~70년대 개발 업자가 어감이 좋다며 붙인 이래 지금은 어엿한 역사가 되었다. 봉천동 행정동 가운데 하나로 청룡동도 자리 잡은 상태라 이대로 굳어지지 싶다.

 

저 설화와 역사를 찢고 나는 오늘, 이 산에 내 청룡을 모셔 영산으로 만든다. 걷기와 목부 심기로 이 산에 개벽 기운을 불어넣는다. 먼저 골짝 물기운을 찾는다. 자그만 물 용, 그러니까 도롱뇽이 태동하는 청정한 못가에 선다. 그래. 신화가 가공한 용이 아니라 여기 살아 꿈틀거리는 도롱뇽, 소미한 생명체가 이 숲과 반도와 지구를 정화하고 새 생명 운동을 일으킬 신성한 청룡이다. 미르()버들 한 가지를 샘이 발원한 언저리에 심는다. 골짝을 중심으로 이리저리 돌고 능선을 넘나들면서 숲 품 모두를 숨에 품는다. 산마루 가까이 한 나무 꼭대기에 까치가 정성 다해 둥지 짓는 광경을 지켜보다 그 나무뿌리 곁에 버드나무(Korean Willow) 한 가지를 심는다.


 

이제 이 나지막해서 큰 산은 참 청룡산이 됐다. 내 제의적 발걸음은 이 정한 물기운이 미르 형상으로 꾸민 사악한 불 짐승 두 마리 잡아 그 목숨을 거두리라는 소식 하나 품고 내일로 나아간다. 인과를 뚫고 합리를 허무는 이 인류학적 행동은 제국 지성소를 정조준한다. 제국 지성소에는 제 악을 인류학적 인류에게 뒤집어씌운 찐 악마 인류가 돈에 취해 뒹군다. 그 찐 악마 인류를 파동 타격하는 힘()은 힘()이 아니다_우치다 타츠루(內田 樹). 소식이다. 팡이실이다. 팡이실이 아닌 인과·합리로써는 제국과 부역 패거리를 해체할 수 없다. 죽임당한 참 인류가 지어내는 패자 팡이실이, 그 공생 운동으로써만 찐 악마 인류목숨을 거두어 거둘 수 있다.

 

참 인류는 숲에서 발원했다. 나무에직립 본성을 배웠다. 곰팡이한테서 팡이실이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그러므로 인류는 인류 힘만으로 제국을 넘어가지 못한다. 인류 그 너머 생명과 비생명 모두와 더불어 어깨동무해야만 한다. 청룡산을 나서며 되돌아본다. 얼마나 나지막한지. 그나마 청릉산이라는 이름조차 부지하지 못하고 개발 업자한테 호적을 넘겨준 내력은 또 얼마나 구차한지. 인간이 인간 시선으로, 인간 언어로 조져 놓은 세상을 떠메고 가는 숲은 그러나 묵묵하다. 언제 다시 이 숲과 만날지 나는 모른다. 몰라도 아는 진실은 만나지 않는다는 말과 서로 고립된다는 말은 같지 않다는 초인과·초합리. 여낙낙한 봄바람으로 배웅하는 숲에 두 손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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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산 걸은 날 숲 걷기가 사실은 개화산으로 끝이 아니었다. 방화역에서 지하철 타고 광화문 교보로 갔다. 이병도·신석호는 해방 후 어떻게 한국사학계를 장악했는가를 품에 안고 다시 버스를 탔다. 서울대학교 치과병원 정류장에서 내려 잠시 생각했다. 가본 적이 없는 건너편 청룡산을 걸은 다음 곧장 집으로 갈까, 서울 둘레길을 따라가다가 강감찬 숲을 한 바퀴 돈 다음 샤로수길을 거쳐 집으로 갈까. 시간·거리를 헤아려 후자를 택한다. 그때는 알지 못했으나 이 선택은 이틀 뒤 놀라운 결과로 이어졌다.



 

강감찬 숲으로 들어가기 전에 낙성대 표지석 앞에서 정화 의례를 행한다. 여러 번 걸은 방향과 반대로 서울 둘레길을 따라가다가 갈라져 강감찬 숲을 한 바퀴 돈다. 지도를 확인해 샤로수길로 들어간다. 생각했던 대로 젊은이들이 물결치며 흘러간다. 고깃집, 찻집, 그리고 의외로 타로 사주 보는 집이 주로 눈에 띈다. 웬만한 식당은 엄두도 못 내다가 일반 음식점이라 써놓은 ㅇㅇ식당 앞으로 갔는데 거기도 안팎으로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결국 일부러 사람 없는 샤로수길 이전모습 식당으로 들어간다.

 

밥과 소주를 주문하고 기다렸다가 제법 먹을 때까지 나 말고 다른 손은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절반가량 먹었을 때다. 갑자기 음식 맛과 술맛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까닭은 물론 전혀 모른다. 먹기를 멈추고 일어서 나온다. 심사가 묘하게 곤두선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생각은 그리로 향하는데 도무지 풀리지 않는다. 이윽고 화요일 저녁 진료가 끝나 단골 백반집으로 가서 맥주잔에 따른 소주를 들이켠다. 벼락처럼 한 생각 떠오른다. 스마트폰으로 희석식 소주를 검색한다.

 

희석식 소주는 일제가 1899년 발명한 저질아니 가짜소주다. 싸구려 원재료를 발효시킨 뒤 연속 증류해 맛과 향을 모두 날려버리고 역한 냄새만 남은 주정에다 물을 타서 만든다. 역한 냄새를 감추려 인공감미료를 섞는다. 그렇게 오로지 취기만을 목적으로 하는 알코올로 개돼지대중을 순치시킨다. 이 사악한 제국주의 부산물은 그대로 식민지 조선으로 번져간다. 관련법과 조세제도까지 바꿔가며 소주 시장을 석권할 수 있게 해준 조선총독부와 부역 대한민국 권력 덕에 희석식 소주는 소주 본진이 된다.”

 

나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막지 못한다. 1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50년 넘게 이 희석식 소주를 마시며 순치된 개돼지로 살아온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 서둘러 한의원으로 돌아와 비통하게 운다. 식민지에서 태어나 무지렁이 부역자로 살아가는 참담함이 이렇게까지 파고들다니. 가짜 소주, 그 알코올에 온 세포가 절 듯이 내 영혼도 절어 이렇게밖에 살 수 없다 싶으니, 통곡은 여간해서 잦아들지 않는다. 스스로 우는 소리를 감지하는 순간 그 소리는 더욱 크게 꺽꺽대고 만다. , 이제야 알겠다, 왜 맛이 사라졌는지.

 

나는 그 일요일 저녁부터 이 시각까지 일어난 일을 다시 한번 찬찬히 돌아보았다. 홀연히 희석식 소주가 내 제국주의 탐색 이미지에 포착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아니 모르긴 몰라도 가닿게 된 특별한 시공에 주의를 기울여 보았다. 물론 이성적·인과적 인식으로는 설명도 의미 부여도 당최 당치않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맞서는 일을 기조 삼은 내 삶에서 이런 소통로는 각별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를 팡이실이라 이름하며 그 실재를 이처럼 확인한다. 오랜 벗 희석식 소주, 이제는 그 우정을 끝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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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학교 독도종합연구소장인 호사카 유지 교수가 페이스북에 일제 부역 패거리한테 공격 받는  영화 <파묘> 이야기를 썼다. 그 글을 그대로 옮겨 싣는다.


*

 

영화 파묘가 반일영화니 좌파영화니 민족감정을 악용한다는 기이한 비판이 나왔지만 개봉 12일만에 관객수 600만을 넘었으니 나도 보러 갔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이 영화를 만든 장재현 감독은 일본의 음양도를 제대로 공부한 훌륭한 감독이라는 점이었다. 오히려 일본에서 만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상당한 일본문화가 녹아 들어 있는 영화였다.

 

우선 영화에는 악지에 묘지를 만든 기쓰네(=여우)라는 일본 스님이 언급되는데 그 기쓰네 스님은 음양사였다. '파묘'에서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음양사'. 음양사란 일본역사에서 6세기쯤 백제로부터 전래된 음양오행설을 설파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일본 왕조에 들어가 국가기관을 만들어 점을 보기도 하고, 땅의 길흉(풍수)을 보고, 천체관측, 달력작성, 날의 길흉판단 등을 직무로 했다.

 

이후 음양사들은 일본의 신도나 불교를 이용해 주술적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일본 왕조나 무사정권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한마디로 일본역사에서 음양사, 음양도는 사무라이시대가 끝나 근대화된 일본이 시작된 후에도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할 때까지 일본중앙정부의 체계화된 직책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일본의 음양사들(=여우들)이 범(=한반도)의 허리를 끊었다고 표현했다. 이것은 음양사들이 조선의 기운을 죽이기 위해 한반도의 허리에 해당하는 땅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의미다.

 

쇠말뚝은 한반도의 명산 여러곳에서 발견되어 한때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쇠말뚝은 일제가 한반도의 기운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근대적 개발을 위해 박은 것이라는 주장이 나와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영화 '파묘'는 그런 쇠말뚝에 대한 관심을 다시 환기시켰다.

 

예를 들어 북한산(삼각산)의 정상에는 26개나 쇠말뚝이 한곳에 박혀 있었다고 그것을 기억하는 강북구의 전 공무원이 증언한다. 사람의 이름을 쓴 종이나 헝겁 등에 쇠말뚝을 박아 저주하는 방법은 일본에서 음양사들이 자주 사용한 저주방법 중 하나였다.

 

영화 '파묘'에서 음양사는 스님의 모습을 빌려서 기쓰네(=여우)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일본에서 음양사들은 불교나 신도를 저주를 버풋기 위해 사용했다. 그리고 불교의 경전 중 반야심경을 독경하면서 그 독경의 힘으로 상대를 저주하는 것이 음양사들의 중요한 수법이었다. 영화에서도 무사 귀신이 독경을 했는데 그것이 반야심경이다. 그런데 반대로 반야심경은 상대방의 저주를 막아내는 힘도 있기 때문에 이도현, 김고은, 최민식, 유해진 등이 몸에 반야심경을 써서 무사 귀신의 공격을 막으려고 했다.

 

'파묘'의 감독은 일본의 음양도와 불교(=밀교), 신도 등의 융합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훌륭하게 영화 속에 녹였다.

 

194112월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의 군부는 음양사들을 시켜 저주의 힘으로 미영 연합군이 불타서 전멸하도록 매일 열렬하게 저주를 올리게 했다. 이런 이야기는 모두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저주는 결국 저주를 잘못 사용한 사람에게 돌아오는 성질이 있어 일본은 도쿄대공습,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로 상징되듯 반대로 자신들이 비참하게 불에 타 버렸다. 음양도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을 잘못 저주하면 그 저주가 자신에게 돌아와 반대로 저주를 받는다는 일본 음양도의 역습을 스스로 체현한 것이 당시의 일제였다.

 

즉 일제는 1945년 패전까지 음양사들을 국책에 동원했다. 그런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일제강점기에 음양사들(=여우들)이 조선침략(1592-1599)과 일본의 세키가하라 전투(1600)를 통해 만명을 베어 죽여 신이 된 일본 무사 귀신의 미라에 쇠말뚝을 넣어 한반도(=)의 허리 부분에 그 귀신을 박아넣아 한반도를 영원히 지배하려고 했다는 게 '파묘'의 중요한 모티브 중 하나다. 그리고 그런 일제의 저주를 풀어서 한반도의 진정한 해방을 성취해야 한다는 게 영화 '파묘'가 말하고 싶은 주제라고 나는 이해했다. 그리고 영화에서 무사 귀신이 두 번 큰 불덩어리가 되어 공중을 날아다니는 장면이 나오는데 원래 일본의 유령은 작은 불덩어리가 되어 주변을 날아다닌다. 그런 영혼의 모습을 '파묘'에서는 활활 타오르는 큰 불덩어리로 표현했다. 그것은 사악함의 크기를 표현했다고 본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해 영화처럼 음양사들을 시켜 한반도에 주술적 공작을 펼첬을 것이다. 그 당시 음양도는 일본의 국책이었으니 당면한 일이다.

 

영화에서 귀신이 말했다. "자신은 남산의 조선신궁에 묻혔어야 했는데 음양사들이 나를 이런 것에 묻었다." 만명을 베어죽여 신이 된 자신은 당연히 조선신궁의 신이 되어 조선인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야 했는데 자신을 이상한 곳에 묻었다고 화를 냈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조선인 대학살을 저지른 인물도 '도요쿠니신사'의 신으로 모셔져 있다. 도요쿠니신사는 일본에 네 곳이나 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낭인도 신사의 신으로 모셔져 있다. 그런 사악한 인물들도 일본에서는 오히려 신이 되어 신앙의 대상이 되는 일본의 특이한 문화를 영화 '파묘'는 잘 표현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일제는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서울을 점령했다. 서울은 사방으로 현무, 청룡, 백호, 주작의 풍수에 입각한 도시였다. 현무 위치에 있는 북악산 앞에 조선총독부를 세워서 경복궁을 눌러버렸고 주작의 위치인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립했다. 청룡과 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과 낙산에는 그 정상에 쇠말뚝을 박았다.이처럼 일제는 수도 서울(한양)을 점령했을 때도 근대적 기법뿐 아니라 음양사들의 풍수지리적 수법도 동원했다. 조선에서 풍수지리는 국가와 왕의 기를 살리기 위해 활용되었으나 일본에서 풍수지리는 막부의 기를 살리는데도 사용되었지만 음양사들에 의해 상대를 저주하는 기술로도 많이 이용되었다.

 

영화에서는 최민식이 풍수사(지관)로 나왔지만 일본에서는 음양사들이 풍수사(지관)였다. '파묘'에는 한국의 풍수사와 일본의 사악한 풍수사, 바로 음양사의 대결이 펼쳐진다.

 

무당 김고은의 배후에는 수호령 할머니가 있는데 그 영혼은 혼령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도 수호령의 개념이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신들은 김고은이 말한 '정령'이 되어서 삼라만상에 붙어서 존재한다. '파묘'는 그런 일본의 종교 신사신도문화가 잘 녹아들어가 있다. '파묘'는 일본 역사와 전통 문화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고 재미있는 매우 훌륭한 작품이다. 강력히 일견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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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는 제국주의 부역 문제를 개인적 숲 걷기와 결합한 서사로 빚어 온 지 제법 됐다. 이제 한 동강 매듭지으려 한다. 마지막 발걸음은 개화산, 거기 있는 국립국어원이다. 나나보조 이야기가운데 아베의 축원이라는 부제를 지닌 공시적 이야기 첫 번째가 <말글 부역 서사>고 거기서 국립국어원 이야기를 했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말을 혁명하다>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했다. 그만큼 중요하다. 마침내 여기서 마무리 이야기로 삼음으로써 바로 이 일이 더없이 중요함을 명토 박는다.



개화산 신목

 

공자 정명(正名)을 후대 사람이 해석할 때 대부분 실()과 부합하는 명() 자체에 집중하지만, 엄밀 문맥은 그 정명이 근본적으로 올바른 말글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에 주의하라고 일러준다. 여기에 기대지 않더라도 문명 실재로서 인간이 말글에 그 바탕을 둔다는 진실은 상식에도 앞선다. 말글살이 고갱이가 썩어 문드러진 권력 패거리가 나라를 대놓고 말아먹는 오늘날 이 문제와 죽기 살기로 씨름해야 한다. 저들이 싸지르는 말글 때문에 공동체 정신 생명이 궤멸하고, 문화 미학이 비속함으로 미끄러져 간다.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반말·비속어·욕설을 거리낌 없이 내뱉어도, 방송 매체가 영어·일어식 낱말은 물론 불필요하고 잘못된 외래어·외국어에 올라타도, 뜨르르한 지식인이 전문가 사투리로 처바른 말글을 쏟아내도 개화산 기슭 국립국어원에는 기괴한 정적만 감돈다. 국립국어원장이 차관급도 못 되는 1급 공무원일 뿐이어서 그런가. 물론 그렇기도 하겠지만 적극적·능동적으로 부역하는 측면이 크다. 피상적이고 진부한 업무 말고 이 언어공동체가 처한 식민지적 상황을 타개할 책무에는 무관심하다고 본다.

 

달포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국립국어원 업무 보고를 받은 뒤에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국어는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며 문화 창조의 원천이자 최고의 문화 자산이다. 우리 말과 글을 품격 있게 사용하는 문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여기에 국립국어원의 역할을 강조했다고 기자는 덧붙인다. 이 얼마나 훌륭한 발언이며 정확한 보도인가. 이 말에 녹아든 일본식 어법과 어휘를 장관도 기자도 모를 만큼 짙은 식민지 그림자를 밟고서 우리는 천연스럽게 국어가 지니는 위상과 품격을 말한다, 국립국어원이라서.

 

물론 내 말과 글에도 오욕이 우글거린다. 나는 모국어 근본주의나 순혈주의를 견뎌내지 못한다. 다만 나 또한 부역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실을 온몸으로 견딜 뿐이다. 깜냥대로 있는 힘 다해 똥 먹은 입에서나마 똥 냄새를 토해내지 않으려 찰나마다 애쓸 따름이다. 이런 애씀을 모으고 다독여 식민지 말글살이를 벗어날 수 있도록 민중 앞에 서는 일이 국립국어원 책무가 아닌가. 한류 운운하며 이벤트나 벌이지 말고 사전 하나라도 제대로 만들어야 하건만 피상적이고 진부한 부역 벼슬아치에겐 어림없는 일이다.

 

국립국어원이 만든 표준국어대사전 수준은 표준적으로이렇다. “첫날: 어떤 일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날. 시작: 어떤 일이나 행동의 처음 단계를 이루거나 그렇게 하게 함.” 최종규 님이 우리말 꽃에서 비판한 대로 이 풀이는 돌림 풀이다. 사전이 지녀야 할 으뜸 가치를 저버린 짓이다. 게다가 시작이란 말은 일본에서 들어온 한자 말이다. 쓰지 말든가 최소한 지적은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몰라서 그랬다는 건 말이 안 되고 알면서도 그랬다면 더욱 용서할 수 없다. 이 국립국어원에 무슨 역할을 기대하겠나.

 

국립국어원 앞에 망연히 섰다가 정화 의식을 하고 돌아서는데 문득 개화산 봉수대 이야기가 떠오른다. 임진왜란 때 순천에서 올라오는 봉화를 받아 남산 제5 봉수대로 전했다 한다. 왜군 침략을 알려주던 산마루 아래 기슭에 똬리 틀고 앉아 왜 말로 제 말 풀이를 하고 자빠진 토착 왜구 집단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내 꼬락서니가 다시없이 추레하다. 걸어서 맞서고 말해서 진실 밝히는 일이 그나마 내가 모멸을 견디는 알량한 길이다. 더 보람된 일을 하고 싶지만, 가장자리에 틀어박혀 숨만 쉬는 무지렁이 주제라···



돌이켜보면 내가 무지렁이 부역자라는 사실을 통렬하게 일깨웠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반제국주의 전쟁 주체로 드러냈으므로 숲이야말로 이 푸른 별에 범주적 전선을 일구어낸 장본이다. 앞으로도 숲에 귀 기울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리라. 거기서 죽임당한 생명, 생명 아니라 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비생명 주체를 만나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에 깃들고 파닥이리라. 남은 날이 비록 많지 않으나, 상상하지 못할 변화를 바라는 일에서 물러서지 않겠다. 개화산을 떠나면서 걸음마다 홀가분해지는 게 꼭 마음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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