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동욱(동아대 교수)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한국 민주주의가 겪는 위기를 단일한 사건으로 규정하는 시도는 이제 설득력을 잃었다. 불법계엄에 의한 내란사태는 물론이고 검찰의 정치적 개입, 사법부를 둘러싼 조작 의혹, 대통령 중심의 권력 과집중, 지방자치의 약화 등 모두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뿌리에서 자라난 구조적 결과다. 한국의 권력 구조 자체가 시대 변화에 맞추지 못하고 노후화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위기의 순간마다 정의로운 목소리를 내왔던 천주교정의평화연대가 “내란 종식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 지금 벌어지는 사법적 반란을 수습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절박함이 중요한 견해의 사각지대를 만든다. ‘우선’이라는 단어는 지금의 위기가 단일한 층위에 있다는 전제를 함축한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복수의 균열이 동시에 터져 나온 구조적 파열이다. 내란적 사태를 진정시키는 일은 필수지만, 그 사태를 가능하게 했던 구조를 그대로 두고 위기만 봉합하는 방식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마치 도시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싱크홀을 보며 “이번 구멍만 막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반복의 원인은 노후한 지하 배수망이다. 지금 한국 민주주의가 딱 그런 상태다.
정치권 일각은 조국 대표의 개헌 언급을 “국면 전환용”으로 평가절하한다. 그러나 위기의 본질이 구조적이라면, 개헌—즉 제도 설계의 재구성—은 전선 이탈이 아니라 위기 재발 방지를 위한 당연한 수순이다. 내란 종식은 제방의 균열을 막는 일이고, 개헌은 물길을 바로잡는 일이다. 둘은 선택지가 아니라 병행해야 하는 과제다.
그럼에도 한국 정치에서 “하나의 의제에 모든 화력을 집중하는 방식”은 오래된 습관처럼 반복돼 왔다. 박근헤 탄핵 이후 “적폐청산”만 강조되면서 다른 개혁들이 뒷전으로 밀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적폐청산이 “검찰개혁”으로만 남게 되면서 전체 개혁 동력은 줄었다. 단일 의제 정치의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단기적인 동원 효과는 있었으나, 구조 전체는 건드리지 못했고, 결국 같은 위기가 다른 얼굴로 되돌아왔다.
지금도 똑같은 패턴이 반복될 조짐이 있다. “내란 종식만 우선하자”는 주장에 세력 전체가 빨려들어 간다면, 위기의 뿌리가 다시 방치될 위험이 크다. 이는 지난 10년간 개혁이 왜 매번 중도에 멈춰 섰는지에 대한 반성으로 충분하지 않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단일한 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과제를 동시에 조율해 내는 것이다. 오늘의 혼란을 진정시키는 손과 내일의 제도를 설계하는 손은 다른 손이 아니라, 정치가 반드시 함께 써야 하는 두 손이다. 둘 중 하나라도 묶이면 전체 방향은 흔들린다.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은 세 개의 축이 동시에 움직일 때 가능하다.
첫째, 지금 벌어진 내란적 사법 훼손에 대한 단호한 정리.
둘째, 검찰·사법·행정·지방권력 등 권력기관 전반의 견제 구조 재편.
셋째, 제7공화국을 향한 헌정 구조 개편, 즉 개헌 논의의 본격화다.
이것을 ‘순서’의 문제로 이해하면 안 된다. 이 세 가지는 선후 관계가 아니라 동시적 관계다. 위기가 구조에서 비롯되었다면, 처방도 구조적이어야 한다.
한국 민주주의는 지금 “붕괴된 오늘”과 “설계되지 않은 내일” 사이에 흔들리고 있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둘을 잇는 다리를 놓는 것이다.
그 다리가 놓이지 않는다면,
오늘의 위기는 어떤 이름으로든 다시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