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혁(성형외과 전문의)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SNS, 인별이나 스레드 등에 이런 말들이 참 많았다. "내가 그 시절에 살았더라면, 일제는 싫지만 그래도 체제에 순응하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았을 것같다. 내가 독립운동가가 될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독립운동 영웅 vs 체제 순응 일반"이라는 이분법적 선택으로 당시 상황을 재단하고 판단하고 있다는 자체가 놀라운 것이다. 우리가 위인전에서 보아 온 영웅들은 몇몇 안 되는 소수일 뿐이지만, 영웅이 아니었던 사람들도, 적어도 소극적으로라도 일제에 저항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사실 대다수였다고 봐야 한다. 이들은 당연히 이름도 남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의 정신까지 망각해선 안 된다.

일제 강점 말기로 갈수록 3.1운동처럼 대중적인 대규모 집회나 노출된 독립 운동이 급감하고 대다수 민중이 체제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소극적 저항이나 비밀 지원조차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형태를 바꾸어 밑바닥에서 집요하게 항일 저항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우리 조상들은 겉으로는 일제의 잔인한 압박과 통제에 따르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물밑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일제의 전시 동원과 강압에 침묵으로 거부하거나 태업으로 맞섰다.

일제가 놋그릇, 숟가락, 곡식, 짚신까지 공출해 가자, 농민들은 곡식을 땅속에나 벽 속에 숨기고 놋그릇도 산속에 들어가서 묻어 버렸다.(일제의 전쟁에 도움을 주느니, 차라리 내가 안 쓰고 만다는 것이다.)
쌀 공출에 있어서도 일부러 나쁜 품질의 곡식을 내놓는 등 소극적 비협조 운동이 전국적으로 만연했었다. 이걸 독립운동이고 영웅적 행동이라고 역사에 기록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름도 없이, 제대로 된 조선인이라면 일제의 전쟁 놀음에 가담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대세였다는 것이다.

태평양 전쟁때 징용이나 학병. 징병 통지서가 나와도 조선 민중은 잘 응하지 않으려 했다. 산속으로 깊이 숨어들어가 피신을 하거나, 병을 핑계로 도피하는 청년들이 수두룩했다. 전북, 전남, 강원도 등의 깊은 산중에는 징용을 피한 청년들이 무리를 이뤄 은신하기도 했다.

창씨 개명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거에 앞장서서 자기 이름부터 일본식으로 고친 자들은 친일행각을 했다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대부분의 조선 민중은 이를 마지막 날까지 미루거나, 일제 당국을 비꼬는 이름 - 예를 들어 '개자식'이라는 뜻을 담거나 - 자신의 가문 성씨를 잊지 않겠다는 은밀한 뜻을 넣은 이름으로 신청하곤 하였다.

일제가 언론을 장악하고 미군과의 전쟁에서 계속 승리하고 있다며 학도들 전쟁 참여를 독려하고 있을 때, 우리 조상들은 겉으로는 믿는 척했지,만 결코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 소리방송이나 임시정부의 단파 라디오 방송을 몰래 듣고 "일본이 미국에게 밀리고 있고 곧 망한다"는 소문들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일제는 이런 운동에 굉장히 고민이 깊었고 어떻게든 색출하려 난리를 쳤었다.

1944년 몽양 여운형 선생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 바로 밑에서, 조선내 전국적 비밀 조직을 결성한다. '조선 건국동맹'이다. 이 밑에서 농민 동맹, 학병 거부 운동, 유사시 무장 투쟁까지 준비했다. 이 조직은 광복 직후 즉각적인 국가 건설 활동으로 이어졌다. 맥아더 미 군정이 이를 무시하고 억눌렀을 뿐이다. 이런 건국동맹에 참여하고 또 자금을 보태고, 아니면 적극 참여를 못한다 해도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조선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째서 자기 조상들이 민족적 자긍심을 모두 버리고 매국의 뒷줄에 쫄래쫄래 서 있었다고 자꾸 말하고 싶어하는 걸가? 어째서 당시에 친일매국이 대세였다고 자꾸 무지하고 무식한 말들만 자꾸 늘어놓는 건가? 우리 조상들은 강제적으로 병합을 당했을 뿐, 절대 일본이 우리 모국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우리 말과 우리 글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극소수의, 영웅적 행동을 할 수 있던 분들의 이름을 우리가 기억하지만, 영웅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기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비타협적으로 태업하고 일제의 동원과 공출에 저항하며 속으로 언제나 우리 민족만의 국가를 염원하며 살아갔다. 그런데 그 후손이라는 것들이 "당시엔 다 친일 했지 뭐" 이따우 소리나 하면서 너절하게 SNS에 글을 ㅆ부린단 말인가? 따라서 위와 같은 조선 민중의 분위기 속에서, '친일 반민족 행위'의 가장자리에라도 이름이 올랐다면 이는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런 언급들 - "내가 그때 살았더라도, 과연 내가 뭘 했겠느냐, 체제 순응하고 친일 할 수밖에 없었떤 거 아니냐?" 이런 건 역사에 대한 무지이기도 하지만, 패배의식이기도 하다. 분명히 한국은 교육 수준이 높은 나라라고 하고 문맹률도 최저에 속하지만, 정작 자신이 속한 집단, 민족이 살아온 지난 일에 대해서는 무지와 패배주의 따위로 함부로 입을 놀리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것이다.

하영의 발언도 결국 무지와 역사의식의 빈곤에서 비롯된 것이다. 차제에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하겠다. E,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간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부러울 것 없이 교육을 받고 자란 젊은 사람이 저토록 우리의 아픈 역사에 대한 문제 의식이 전무했다는 건, 우리 모두가 뼈아프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역사 과목을 교육시킬 때 학교에서는 교육의 방향을 완전히 수정해야 하겠다. 하영의 사건이 심각한 이유는 우리 사회가 철학도, 역사의식도 전무한 빈껍데기뿐이라는 걸 알려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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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일에 걸쳐 씻김굿’(20)내림굿’(20), 그리고 솟을굿’(8)이 진행되었다. 49일째(88) 새벽에 통각(統覺)이 일어났다. 50일째 아침부터 한나절, 해방과 재설정을 상징하는 희년(jubilee) 걷기로 대연지수(大衍之數)에 감응했다. 내 삶 모든 각성·치유·영령 제의 막이 내렸다.

 

걷기 장소는 60여 년 전 서울 와 처음 살기 시작했던 성북구 삼선동과 돈암동 일대, 삼선초등학교, 그리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틈만 나면 달려갔던 백악 기슭 정릉 숲이다. 해방과 재설정 의식이라면 지구별에 도착해 10년간 자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간평리 오대천 노누라지 일대와 월정초등학교를 걸어야 마땅하지만 시절이 하 남루하다 보니 오지랖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정릉은 그냥 숲이 아니다. 조선 최초 능으로 개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태조 계비 신덕왕후 묘역이다. 태종이 미워해 본디 정동에 있던 묘를 파서 사실상 폐릉 상태로 내쫓은 곳이 바로 여기다. 지난 60, 올 때마다 나는 그 역사를 가슴에 깊숙이 안아 삭혀냈다. 마치 내 인생인 듯이.


 

6백 년 전 왕후가 영면에 든 숲과 남루한 내 현실 모습은 그야말로 극명한 대조를 이루지만 기이하게도 나는 여기서 아늑한 고향에 닿는다. 엄마 냄새를 향한 그리움 대신 숲 냄새에 심취한다. 나무가 엄밀하게 건네는 말을 듣는다. 상실과 질병으로 얼룩진 시간이 말갛게 되돌아오는 풍경을 본다. 금천 노누라지 건너 4백 세 느티나무께 감사 인사 올리고 물소리 장단에 나온다.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성북천을 건너면 야트막한 언덕길 너머 삼선초등학교가 있다. 내가 1965년 가을 전학해 와 다녀서 졸업한 모교다. 이 아련한 공간에 다시 와 아득한 시간을 통짜배기로 느끼는 까닭은 여기 드리운 어둠을 가로질러 건너온 존재로서 온전한 빛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가난과 모멸에 결박된 채 학교를 오가던 삼선동과 돈암동 골목길을 걷는다. 6학년 때 육성회비 9개월 치를 내지 못해 졸업장을 받지 못했던 일, 그 가난을 근거로 중학교 배정 원서를 쓸 수 없었던 일이 문득 떠오른다. 물론 모두 지나갔다. 거기서 나는 해방되었다. 상처받지 않았던 태초 모습처럼 살아갈 수 있다. 그 자유를 얻고 기리기 위해 50일 동안 통엄한 시공을 지나왔다.

 

백악산 동북 줄기가 동남쪽으로 흐를 때 성북천과 정릉천을 양쪽에 거느린다. 이 두 지천은 청계에서 만난다. 그 사이 능선·기슭인 삼선동 일부, 돈암동, 정릉이 노누라지를 형성하는 셈이다. 노누라지 정령 green shaman은 내 팔자 맞다. 팔자대로 살아서 여기에 와 닿은 거다. 목숨껏 한껏 솟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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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 성패 여부와 무관하게 내 삶은 심층 소통을 향한 상담자·중재자로서 흐름을 이루며 여기까지 왔다. 직업으로 삼기 전에도 신기할 만큼 주위 사람들과 나는 그렇게 마주했다. 마침내 숙의로 마음 치유하는 늦깎이 한의사가 되었고, 거기서부터 내 길은 줄곧 확장되었다. 최근 5년 동안 비인간 생명에까지 그 소통은 번져갔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결국 식물에 도달했다. 내 일상 경로 주축인 나지막한 산 궉() 소도()에 사는 물오리나무, 곧 메팥버들이 바로 .

 

궉궁 메팥버들이 내게 말을 건 첫 번째 통로는 눈이었다. 궉궁 앞을 지나던 중, 마치 바로 직전 그 자리로 왔다는 듯 내 눈을 이끌어 멈추도록 했다: 나 메팥버들이야! 여기를 봐~ 두 번째 통로는 손이었다. 첫 만남에서 그 몸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내가 생명 주파수를 손으로 전달하자 어느 순간 그가 공명 진동을 전해왔다. 이때 접촉을 통해 내 생명 에너지를 받고 있다는 파동 동기화 말고는 다른 감각 메시지가 없었다. 오늘 새벽 드디어 그가 다른 대화를 제시했다.

 

해 뜨기 전, 집을 나설 때 기온이 이미 31도를 웃돌고 있었다. 잠시 망설였다. 숲을 걷지 않고 지하철역으로 바로 가서 체력 소모를 줄여야 하지 않을까? 이 폭염이 당분간 계속될 텐데···. 노화가 진행되는 면면을 피부로 느끼는 터라 매사에 이런 걱정을 되풀이하게 된다. 갈림길에 도달했는데 숲 반대쪽 길 신호등이 붉은색으로 떨어진다. 3분 이상 찜통 속에 서 있느니 내게는 영원한 궁금증인 숲으로 가자 한다. 속도를 늦추어 땀 분비를 줄이며 열류를 헤치고 나아간다.

 

숲길을 걸을 때 반드시 멈추어 인사하고 지나가는 나무 몇이 있는데 오늘은 딱 한 나무만 챙기기로 한다. 궉궁 메팥버들이다. 천천히 걷는다고 걸어도 땀이 옷을 끌어당겨 척척 들러붙는다. 가장 짧은 경로를 거쳐 궉궁에 이른다. 메팥버들 앞에 선다. 평소 습관을 돌연 바꾸어 무념무상으로 그저 두 손만 조용히 가져다 댄다. 다음 순간, 메팥버들이 먼저 나지막이 파동을 보내온다. 그다음 찰나, 들려오는 한 소리에 몸이 온통 열린다. “사랑한다고~!내 어찌 전율 따위 하랴.

 

차분하게 시각을 확인하고 기록한다: 2026850611. 솟을굿.

 

실은 숲에 들어오기 직전 문득 이런 의심이 들었다. “내가 메팥버들한테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걸까? 어떤 면에서는 다 아는 이야기일 테고, 또 다른 어떤 면에서는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일 테니, 어떤 경우든 무의미하지 않을까?” 그때는 사랑한다라는 말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막상 그 말을 듣고는 절대 고요로 침잠할 수밖에 없었다. 모름지기 죽고 나서도 나는 그 고요 품에서 사랑한다 발화하는 무한한 웅사(雄辭)를 듣고 다시 들어야 하리라.

 

내가 웅사라는 표현을 쓴 며리가 있다. 왜 메팥버들은 사랑한다!” 하지 않고 사랑한다고~!했을까? 이 곡절에 내 천명이 걸려 있다고 나는 차마 생각한다. 이 사랑은 인간이 지녀온 그런 사랑과 차원이 다른 특이점을 통과한 사랑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묵시록 차원 고백과 고함이 절박하게 엮인 최후 신음이며 절규, 심지어 욕설아닐까. 홀라당 뒤집어엎을 최후 화두가 아닐까. 내가 너무 각 잡았나 보다. 안 될 일이다. 소주 한잔하고 다시 글 앞에 앉아야겠다. !

 

한의원 앞 국숫집으로 가서 다스운 국수에 소주 한잔하며 가만히 되짚어본다. 얼마 전, 청딱따구리가 예쁜 소녀 웃듯이 운다는 사실을 알고도 의심했을 바로 그때, 청딱따구리가 날아와 그렇게 울어 답해주었듯, 오늘 새벽 메팥버들도 내 어리석은 의심에 현명하게 답해주었다. 그 대답이 꼭 똑 사랑한다고~!였고. 해석 준거는 이거다: 이미 다 아는 사랑도 아니고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랑도 아닌, 사랑. 각을 뭉그러뜨릴수록 각이 잡힌다는 기이한 이 온다.

 

단도직입으로 나아간다. 나무가 먼저 사람에게 고백한 사랑은 이미 다 아는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랑이란 말인가? 제국주의 시민 인간과 거기 부역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인간에겐 그렇다. 제국주의에 살상당한 사람과 부역자임을 깨달은 사람에겐 아니다. 후자는 알아듣는다. 알아듣는 사람에게 왜 나무는 사랑한다고~!라는 묵시록 차원 어법을 썼을까? 대멸종 카이로스여서다; 시간이 없어서다; 사랑 화신 메팥버들로서 안타까워서다.

 

사랑을 묵시록 차원에서 재정의해야 한다. 사랑, 특히 오늘 대멸종 카이로스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사랑은 우리 세계에서 발원하는 모든 공존·공생 감정을 대표함과 동시에 끌어안는 감정, 나아가 감응이다. 감정과 감응이 분리된 사랑은 메팥버들 사랑이 아니다. 감응은 반제국주의 정치경제학 비판이며 실천 팡이시질이다. 달콤한 긍정, 얄팍한 행복, 몽롱한 합일은 없다. 비인간 생명, 비생명 존재와 함께 행진하는 queer 항쟁 여정이 사랑이고, 그 사랑이 우주다. 그뿐이다.

 

메팥버들이 해준 말을 손으로 감지해 몸에서 온전히 들은 첫 번째 이야기 대강을 이렇게 정리했다. 첫 번째인데 끝 번째처럼 임계 질량을 느낀다. 여기가 언제고 되돌아올 내 영혼 앉을 자리. 주술도 명상도 과학도 아닌 이 범주 인류학 경험으로 향후 내 삶을 이끌리라; 거룩하고도 즐겁게 사랑한다고~!를 되새기며 다시없는 겹, 더없는 결로 내 삶을 펼치리라; 남은 날이 얼마일지 모르겠으나 꼭 똑 찰나 카이로스를 살아가리라. 첫 번째 글을 똑 끝 번째처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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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서 곤 시간>을 쓴 날 하루 뒤인 일요일 아침 일찍 도봉산 회룡 계곡 노누라지-노나지와 아우라지 합성어-로 일곱 번째 향한다. 폭염경보가 발령된 날씨라 오전에 구름이 떠 있을 때 들어갔다가 청명해지는 이른 오후부터 드리울 산그림자 밟으며 나오면 체력 소모를 줄일 수 있겠다 싶어서다. 마음은 홀가분하고도 안온하다.

 

마른 늦장마 뒤라 전반 수량이 그리 많지는 않으나 골짜기 올망졸망한 쏠 물소리가 제법 여돌차게 들린다. 노누라지 복류 지점은 지지난번과 같은데 수량만큼은 눈에 띄게 더 많아 심사가 한결 넉넉해진다. 지난 40여 일간 있었던 일을 고하고 고마움을 전해드린 다음 손바가지로 흐르는 물을 떠서 마신다. 몸에 둘린 땀을 씻어낸다.

 

돌과 바위를 만나 모습 울리고 소리 풍기는 작은 물 구경하느라 맨발로 뒤뚱대며 돌아다닌다. 하는 짓이 공격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는지 작은 가재 하나가 은근슬쩍 제 몸을 보여준다. 그 찰나, 시간이 휙 접히면서 나는 단박에 일곱 살 아이가 된다. 통통대는 심장 대신 반짝이는 눈망울을 물웅덩이에 쏙 빠뜨린다. 이십분(已十分)!

 

이십분(已十分)은 이름 잊힌 어떤 비구니 게송이라는 이야기서껀 여러 서사가 떠도는 옛 중국 시 마지막 구다. 인적 없는 깊은 계곡에 빙의되어 대고 스며드는 이 발길에 무슨 기적 같은 사건이라도 걸려 있겠지 싶지만, 작은 물웅덩이에 모습 나툰 가재만으로 이미 신비는 꽉 차고 넘친다. 달망달망 율동 타고 소도 숲을 떠난다.

 

진일심춘불견춘(盡日尋春不見春)

망혜편답롱두운(芒鞋遍踏隴頭雲)

귀래우과매화하(歸來偶過梅花下)

춘재지두이십분(春在枝頭已十分)

 

종일 봄 찾아 헤매었지만 보지 못하고

짚신 닳도록 구름 등성만 두루 밟았네

돌아오며 우연히 매화나무 아래서 보니

봄은 이미 매화 가지 끝에 흠씬 와 있네

 

(* 번역: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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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지 40일이 넘어가고 있는데 몸 상태가 아직 온전하지 않다. 통증도 거의 사라지고 쾌적한 감각은 대부분 돌아왔지만, 체중이 여전히 50kg 근처에서 맴돈다. 회복세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으니 그래도 안심하면서 마치 사골을 고듯 차마 버릴 수 없는 자투리 곡절 거두기로 솟을굿 채비에 갈음한다.

 

자투리 곡절이라고 했으나,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내가 견지해 온 반인간중심주의에 경도된 표현일 수도 있다. 인간인 한 인간에서 출발한 표현을 써야 자연 이치에 부합한다고 한다면 미상불 가장 근원에 해당하는 곡절일 테다. 이 이야기 하려고 마음먹은 계기는 이번에도 독서였다. 동시성 작동이다.

 

우연과 필연이 맞물린 경계에서 내 눈길을 붙잡은 책은 재키 히긴스가 쓴 감각의 신세계였다. 글쓴이가 다른 사람을 인용한 한 문장이 돌연 나를 불러 세웠다. “어머니로부터 받는 세심한 보살핌의 손길이 어디까지가 자신이고, 어디부터가 타인인가 하는 감각을 우리 안에 새겨넣는다.” 이 어인 말인가?

 

여기 보살핌의 손길은 추상적 의미 돌봄을 뜻하지 않는다. “쓰다듬거나 어루만지는또 다독거리거나 포근히 감싸안는 피부 접촉을 뜻한다. 이 접촉이 자기 몸에 대한 소속감, 그 몸이 자기 것이라는 의식을 강화한다. 어머니와 아기 사이 유대, 애착이라는 연속성에 매몰돼 있던 통념을 단칼에 자른다.

 

이 접촉은 모유 수유 행위에서 자연스럽게 최초 작동한다. 모유 없이 시생대를 보낸 나는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엄마까지 안아주거나 업어준다고 다가오면 손을 내저었다.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 들과 내를 누비며 비인간 존재와 마주해 살았다. 이 자타 분별 범주 변이도 우울증 고갱이다.

 

어머니에서 출발한 부드러운 피부 접촉이 가져다주는 쾌감은 건강한 자아 정체감 형성을 넘어 삶이 즐거운 놀이이기도 하다는 진실을 느끼게한다. 이 느낌에 둔해지면 놀이로서 삶이 전해주는 재미에 흥미를 잃게 된다. 재미에서 멀어지면 의미로 보상받기 마련이다. 진지와 엄숙도 우울증 고갱이다.

 

피부 접촉을 통한 즐겁고 재미있는 놀이는 생명 안전감을 보충하고 증강한다. 이 길이 근원에서 막히면 자기 생명 자체를 불안전으로 느끼는 존재론 차원 불안에 빙의(possession)된다. 이 빙의 불안은 인격으로 파고들어 살고자 하는 원초 감응을 삭제한 채 우울과 동맹한다. 여기가 우울증 골갱이다.

 

우울증 골갱이는 모든 접촉에서 고립된다; 가장 깊은 정신장애, 아니 심신장애, 아니 () 생명장애다. 재키 히긴스는 다시 그 사람을 인용한다. “저는 접촉이 정서적 탐닉이 아니라 생물학적 필수 요소라고 봅니다.” 아파서 고아 낸 시간이 알려준 엄밀 섬미(纖微)한 진실이다. 이 진실을 살고 싶다.

 

이 진실을 살아갈 때 나는 비로소 마지막 그리움에서 온전히 놓여날 수 있다. 모유 결여는 내게 질기디질긴 물 그리움-허갈(虛喝)-과 당 그리움-허기(虛飢)-을 가져다주었다. 이 둘은 각각 다르게 뒤떠들다 마침내 알코올 애착으로 수렴했다. 알코올 애착은 우울장애와 찰떡궁합 죽맞아 50여 년간 함께했다.

 

알코올 애착과 정면으로 마주해 70년 동안 얽히고설켜 온 온갖 고통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면 내 삶은 모름지기 카덴차를 남겨 놓은 협주곡 상태로 들어설 테다. 내 인생 계통수를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게 이끈 숲 정령들께 가없는 고마움을 전한다. 지난 40여 일 다시없이 힘들었고 더없이 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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