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병두(뉴스투데이 회장)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① 미군정과 개신교의 운명적 만남
개신교는 한국 보수주의정치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의 보수는 ‘정당(국민의 힘) - 뉴라이트 - 개신교’ 3각편대를 이루고 있다. 1989년 보수교단을 총망라해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이 설립되고 2003년 이들이 행동에 나섰다. 이승만 시절 부터 보수 정권을 지원하면서도 겉으로는 성속이원론(聖俗=元論)을 표방하던데서 벗어나 현실정치에 대한 개입을 선언했다.
비슷한 시기에 주사파가 전향한 뉴라이트가 출범했다. 둘은 상호연대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미국에서 개신교 우파(christian right)가 정치에 직접 개입하기 위해 조직화를 한 것이 1979년. ‘도덕적 다수’가 결성되어 행동하던 흐름이 수입되었다. 개신교우파는 지금 뉴라이트 청년을 양산하는 사관학교 기능까지 맡고 있다.
우리의 질문은 두가지이다. 첫째는 해방 직후 남한 인구의 2,3% 안팎이었던 개신교가 어떻게 최대종교가 되었냐 하는 점이다. 개신교는 통계청 조사로 2015년에 인구대비 19.74%, 967만명의 성도를 확보해 최대종교로 부상했다. 둘째는 개신교가 어떤 연유로 친미 반공 반북이라는 3대가치와 친일 반중 친이스라엘이라는 보조가치로 단일화되었냐 하는 의문이다.
개신교보수주의 뿌리는 미 군정과 이승만정부, 한국전쟁과 월남 기독교인이다. 미 군정의 반공기독교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목표에 영어가 가능한 유학파 기독교인들이 응집했다.가장 강한 교세를 갖고 있었던 평양의 기독교인들의 대거 월남은 기독교국가 건설의 지원군이 되었다. 이승만은 기독교국가로 가기위한 로드맵을 실천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개신교와 반공주의가 하나로 결합했다.
박정희 시대에 대규모 반공집회를 통해서 교세를 성장시켰다. 2000년대에 들어서 한때 교세가 정점을 찍었지만 태극기집회(정치행동) 예수천국(불신지옥), 번영종교(기복신앙)과 함께 개신교의 3대 부정적 이미지가 만들어지면서 영향력이 하락하고 있다. (이 글은 개신교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어서 하느님이라는 표기 대신에 하나님이라는 표기를 선택했다)
해방직후 미군정청은 공인교(公認教) 정책을 시행했다. 공인교 정책이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종교에만 각종 혜택을 주는 정책이다. 실질적으로는 교세가 컸던 유교 불교 천도교 대종교 무교를 인정하지 않고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만을 공인했다
1945년 10월 미군정청은 일제 때 경축일을 폐지하고 미국의 축제일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이 되었다. 부처님 오신날이 공휴일이 된 것은 그로부터 30년 후인 1975년이다. 심지어 미국의 독립기념일 (7월 4일)도 평화기념일 등과 함께 남한의 5대 축제일이 되었다.
미군정청은 영어를 공용어로 선포했다. 영어와 번역한 한국어의 불일치가 생길 경우에는 영어를 기본으로 했다. 한국어는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육용 언어이고 영어는 정부에서 사용하는 유일한 언어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영어가 권력이 되었다. 400명 가까운 영어 통역관은 대개 친일 지주의 자녀로 유학을 다녀온 자,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공부를 한 자들이었다.
“미군정 초기의 고문정치에서 개신교 신자들은 군정 최고 책임자 주변에 포진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 중장의 통역 겸 비서실장을 지낸 이묘목, 군정장관 비서장과 민정장관 보좌관을 지낸 이교선은 핵심적인 사람들이고, 윤보선, 전용선 목사, 이매리 양주삼 목사 등이 중앙행정기관에서, 김광현 목사, 정기원 김정기 등은 지방행정기관에서 고문으로 활약했다.” <강인철 박사학위논문 ‘한국기독교회와 국가 시민사회’>
강인철의 논문에 따르면 미군정이 임명한 11명의 행정고문 중에서 목사 3명을 포함한 6명(55%)이 개신교 신자다. 1946년 미군정의 최고위직에 임명된 한국인 50명 가운데 35명이 기독교 신자였다. 제헌의회가 만들어지기까지 대의기구 역할을 했던 과도 입법의원 90명 가운데 21명이 개신교 신자였다. 초대 입법의원 190명 중 38명(목사 13명 포함)이 개신교인이었다. 미군정 당시 남한의 인구가 2천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개신교와 가톨릭을 합해 45만명 정도, 인구의 2,3%인데 이에 비하면 과다비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직후 미군정은 적산(일제의 부동산과 재산)을 처분했다. 적산기업 적산가옥 적산종교시설을 불하했다. 이중 신사와 천리교 등 일제의 종교자산 대부분을 개신교에 몰아줬다. 천리교는 일본에서 유입된 종교로 식민지 시절 교세가 커서 재산도 많았다. 1947년 9월19일 조선불교중앙총무원장 김법린은 군정청재 산관리관에게 “당연히 불교계에 이양되어야 할 일본 불교적산이 하등의 연고 없는 단체 또는 개인에 의해 불법점거 또는 부적당하게 이양되어 있으며 이미 점유중에 있거나 임대차계약 완료된 재산까지도 다른 곳으로 이양되어 있다”는 항의공문을 보냈다. 해방직후 불교계가 관리하던 40여개의 일본 천리교 사원 가운데 30여개가 교회와 유관기관에 이양됐다.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 김재준 목사의 경동교회, 송창근 목사의 성남교회 등 대형교회들과 주요 신학대들 대부분이 천리교 자산의 특혜 배분으로 자리를 잡았다. “해방 후 일본신사나 일본사원 자리가 예수교 예배당 혹은 교회 학교로 변모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인 동시에 기독교의 승리이며, 한국교회의 광영이며 사교(邪敎)에 대한 역사적 심판”이라고 개신교측에서는 의미를 부여했다. 대교회주의가 이때에 만들어졌다. 대교회는 ‘하나님의 은사의 징표’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려고 했지, 대교회를 세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미군정 고위관리들은 남한을 기독교 국가화 하여 소련에 맞선다는 점령지 건설 원칙을 갖고 있었다. 이같은 원칙은 1947년 10월9일 군정장관 대리 헬맥이 로마 교황청 사절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건국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기초로 하여야 한다”는 취지의 환영사를 한데서 잘 드러난다.
일제시대 일본불교가 전담했던 형무소 교화사업도 목사만 참여켰다. 형목(荊牧) 제도는 목사가 공무원 자격을 획득하여 전국 18개 형무소 교무과장직을 맡는 정도로 까지 발전했다. 개신교가 독점하다시피 하던 형목은 1961년에서야 타종교에도 개방됐다. 형목(교도소 선교) 군목(군대 선교) 경목(유치장 선교)이 중요한 이유는 어려운 환경하에서 사람들이 회심을 하게 되고, 그들의 회심이 사람들에게 주는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의 기준에서 볼 때는 외진 곳이지만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의 영혼을 구제해주는 것을 물론이고 선교의 블루오션이다.그 블루오션을 특정 종교에 몰아준 것이다.
개신교는 1947년 3월부터 매 일요일마다 KBS의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HLKA)을 통해 선교 방송을 내보내게 하면서 개신교를 우대했다. 선교방송은 다른 종교들에게도 허용이 되었다. 다른 종교는 월 2-3회 선교방송의 기회를 가졌지만 개신교는 매주 방송을 할 수 있었다. 서울중앙방송은 일제 때 부터 국영방송의 역할을 했다. 일황의 항복선언도 이 방송을 통해 들었다. 국영방송 같은 위상을 갖고 있어서 이 방송에 자자 노출될 수록 특정 종교가 국교 처럼 인식되는 효과를 주게된다.
이규태의 책에 보면 일제 말기에 학교에 다녀오면 형들이 이불 속에 들어가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들었다. 일제가 곧 패망한다는 소리를 듣고, 이 얘기를 밖에 나가서 했다가 혼쭐이 났다는 회고가 있다. 당시 이승만도 주기적으로 방송을 했는데,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이 대통령감이라는 인식을 굳히게 하는데 방송이 기여했다. 그만큼 미디어의 영향력은 크다. 가톨릭에는 경향신문사를 불하했다. 경향신문은 이승만 시대에 대표적인 야당지가 되었다.
한반도 5천년의 역사에서 문명은 인도와 중국을 통해서 들어왔다. 종교적으로나 문명적으로나 동양에 속해 있었다. 한반도의 분단과 미군의 점령으로 문명과 신앙의 경로가 하루 아침에 바뀌었다. 서양문명 특히 미국문명과 기독교가 하루 아침에 남한 땅을, 공산주의와 소련문화가 북한 땅을 지배했다. 해방 이전과 해방 이후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다. 개신교 보수파에서는 미국과의 만남을 하나님의 계획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의 개신교 보수화② 이승만과 개신교
이승만(1875~1965)은 유학가문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독실한 불자였다. 영어를 배우려고 1895년 배재학당애 입학했다. 선교사들을 통해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접했다. 한성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기독교로 개종을 했고 기독교 국가 건설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문명국이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에 유학하여 프린스턴대학에서 공부했다. 프린스턴대학은 당시에는 복음주의, 기독교 보수주의의 산실이었다. 그는 미국 생활을 하면서 기독교 국가 건설 꿈을 점점 구체화 하였다. 한인기독학원, 한인기독교회 및 한인 YMCA를 창설하여 교포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 미국인들을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미국의 건국이념과 제도를 따른 ‘형제 공화국’의 건설이라고 선전했다. 1919년부터 한국을 동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라고 알렸던 것이다.
이승만은 해방 후 귀국하여 1945년 11월 한 연설에서 “지금 우리나라를 새로이 건설하는 데 있어서 튼튼한 반석 위에다 세우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예물로 주신 이 성경말씀을 토대로 해서 세우려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반석 삼아 의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매진합시다”라고 했다. 이어 1946년 3·1절 기념식에서는 “한민족이 하나님의 인도하에 영원한 자유독립의 위대한 민족으로서 정의와 평화와 협조의 복을 누리도록 합시다”라고 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총선거는 원래 5월9일 일요일로 정해졌으나 개신교에서 주일날에 선거를 할 수 없다고 미군정을 설득하여 월요일인 5월10일로 바꾸었다. 이승만은 1948년 5월27일 국회의원 예비회의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됐는데, ‘하나님과 순국선열과 3000만 동포 앞에 삼가 선서함’이란 제목의 선서문을 채택했다. 5월31일 제헌국회 제1차 회의는 “임시의장 이승만 박사가 등단하여 전 국회의원들에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제의하고, 이윤영의원(목사)이 기도했다.”(속기록)
임시의장(이승만) :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만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성심으로 일어나서 하나님에게 우리가 감사를 드릴터인데….
이윤영 의원 기도 : (일동 기립) ”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국회가 처음 열린 날에 이승만 의장이 4번, 이윤영 목사가 12번(주님 1번, 예수 그리스도 1번 포함) 국회의원 전원에 의해 1번, 하지 중장에 의해 1번 하나님을 호명해서 사실상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의식이 되었다. 이승만은 그해 7월24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기며, “오늘 대통령 선서하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책을 다하기로 한층 더 결심하며 맹세합니다”라고 밝혔다. 1950년 9월 서울을 수복하고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환도식에서 맥아더는 참석자들에게 기립할 것을 요구하고 주기도문을 바쳤다. 이승만은 해마다 성탄절 메시지를 발표하고 국회에서 성대한 성탄 파티가 열렸다. (강인철의 논문에서)
국가의 주요 의례를 기독교식으로 행하고, 허리를 숙여 하는 국기에 대한 배례(경배)를 주목례(注目禮)로 대체하였다. 미 군정, 그리고 정부 수립 이후에도 학교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다. 개신교에서는 “국기를 우상화했던 일본과 나치 독일은 패망했다”며 배례는 국기를 우상화하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범 개신교의 의견으로 1950년 3월 반대서한이 이승만에게 전달되었고 그 해 4월 국무회의에서 국기를 주목하며 오른편 손을 왼편 가슴 심장 위에 대는 주목례로 바뀌었다.
이승만은 1954년 한국 최초 민간방송인 기독교방송국과 1956년 극동방송국 설립에 특혜를 줘 선교 인프라의 구축에 큰 역할을 했다. 기독교방송은 1960년대 초반 이미 부산 광주 대구 등 전국 방송망을 갖추며 수십 년간 종교방송 시장을 독점했다.
이승만 정권에서 19개 부처 장을 역임한 153명 중 47.7%, 차관까지 포함한 242명 가운데 38%가, 국회의원 208명 가운데 약 21%가 개신교 교인이었다. 개신교는 1952년 8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기독교선거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조직적인 선거운동을 실시하는 선거 때 마다 이승만을 노골적으로 지원했다. 가는 정과 오는 정이 돈독했다.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 때에도 서울 정동 감리교회에 출석했으며 1956년 명예장로로 추대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군종제도를 실시해 군선교를 하도록 했다. 부상 당하고 죽어가는 군인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군종에서 불교만 빠졌다. 기독교와 천주교만의 군종제는 엄청난 결과를 불러왔다. 군종제도가 실시되고 불과 3년만인 1954년 군장병의 종교 분포가 개신교 20%, 천주교 4%, 불교 6%, 유교 12%, 기타 7%, 무종교 51%로 나타났다. 1951년 부터 1967년까지 군종제도를 기독교가 독점한 결과는 오랜동안 지속되었다. 개신교 군종장교의 비율은 1997년에 66.7%, 2004년에 58.3%, 2018년 국방부 자료로는 총 492명 중애 258명으로 총 52.4%에 달했다.
강인철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정규 장교로 임명된 목사들로 군종장교단이 구성된 것은 미국의 피선교지 가운데 한국이 처음이었다. 전쟁 기간 중 17만 명에 달하는 공산군 포로 가운데 6만여 명이 한미 양국 목사들의 안수로 개신교 성도가 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기독교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낳았다. 미군정 당시 전체 인구의 2~3% 불과하던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7.5%를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1941년 30여만명이던 개신교 신자수가 1950년 약 130만 명으로 늘어나 10년 사이에 4배의 성장을 보였다.
이승만은 한국전쟁과 그 후 계속된 원조 물자 배분 과정에서 기독교계에 특혜를 주었다. 외국의 기독교 구호단체들이 보내오는 구호금과 구호물자를 한국기독교 연합회(KNCC)를 통해 배분하도록 조치했는데 이는 기독교세를 급성장 시키는 물적 기반이 됐다. 교회에 가면 빵과 우유를 얻어먹을 수 있었고, 부활절과 성탄절에는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수가 늘었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 교회에서 울려퍼지는 찬송가 소리와 따듯한 죽 한 그릇은 사람들에게 없던 신심도 생기게 했다. 60대 이상 많은 이들이 당시를 회고하면서 부활절 달걀과 성탄절 선물이 신앙을 갖게 된 계기였다고 말한다.
전쟁 직후 피난민이 260만 명, 이재민이 340만 명, 빈민이 430만 명 등 총 1000만 명이 구호의 대상자였다. 한국 정부나 민간단체는 재정이나 조직 면에서 감당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외국의 대규모 원조가 시작되었다. 조직이 있는 기독교가 원조물자의 배분을 담당했다. 미국은 전체 구호물자의 대부분을 담당했고,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구원자로 비쳐졌다.
미국은 일제에서 우리 민족을 독립시킨 해방자이고, 공산주의 침략에서 우리를 지켜준 수호자이고, 경제를 일으켜 준 구원자라는 인식은 한국 개신교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미국은 하나님이 선택하고 하나님이 임재한 국가이며, 그런 미국과 한미동맹을 맺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민의 신망을 잃은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과 반공주의를 이용해서 권력을 안정시켰다. 북한의 남침 위협은 이승만의 비타협적인 반공주의를 강화했고, 이승만이 미국을 압박해서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국을 한반도에 묶어두었다. 미군이 인계철선이 되었다. 자유민주주의 단독정부 수립과 한미동맹을 주도한 이승만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이승만 국부 추대운동의 한 배경이 된다. 한국의 보수개신교가 신앙처럼 강조하는 친미 한미동맹 반북 반공의 가치관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개신교 지도자들은 미국과 함께 반공의 최전선에서 선교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특권이자 은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독교의 보수주의와 함께 정치적 보수주의도 이때 태통한다. 보수주의라는 용어는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처음 사용됐다. 그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직후 기존 질서가 거부당하자 “역사 속에서 쌓아 온 보존하고 지켜야 할 가치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즉 확인된 가치들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해서 근본적 변혁, 외과적 수술(surgical operation)을 꿈꾸는 진보주의와 대립하는 점진적 변화, 표면적 치료(cosmetic healing)의 보수주의가 탄생했다.
한국의 보수주의는 무엇을 지킨다는 토대 위헤서 시작을 하지 않고 무엇을 반대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자유 민주 공화 같은 가치는 원래 우리 보수의 것이 아니었고 체득되지 못했다. 우리가 보존하고 지켜야 할 가치라는 공감대와 경험이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이승만이 반공을 매개로 하여 독재로 치닫는 것을 제어하지 못했다. 한국의 정치적 보수주의와 개신교 보수주의는 이렇게 불안정한 출발점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한국의 개신교 보수화③ 한경직과 개신교의 DNA
해방 이전 우리나라에 파송 온 개신교 선교사 1530명 중 66%가 미국이이었다. 1893년에서 1983년 까지 개신교 선교사의 87%가 미국에서 왔다. (강인철, ‘한국기독교회와 국가-시민사회’) 고종의 특사로 만국평화회의에 간 호머 헐버트,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한 프랭크 스코필드 같은 선교사는 극히 예외적이었으며 대부분은 일제에 순응하도록 가르쳤다. 미국선교사들의 입장은 정치 참여 불가였다.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지배적이었던 복음주의 특히 태통단계인 근본주의를 신앙의 무기로 하여 조선 땅에 들어왔다. 조선에서는 성경을 가르칠 선교사가 부족하여 성도들끼리 주기적으로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는 사경회가 집회와 전교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처럼 성경을 중시하는 신앙적 분위기에 성경무오설(무오류설)을 믿는 미국의 복음주의 선교사들이 들아왔다. 주로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황해도 평안도 지방에서 선교했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존중했다. 일점일획도 마음대로 해석하지 않았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한 종말론(세대주의 전 천년설)에 입각하여 말세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 시기가 말세라는 여러가지 신학적 해석 근거를 갖고 있었다. 종말이 임박했음으로 인간의 힘으로 무엇을 하기 보다는 회심을 하고, 복음을 전하고, 성령체험으로 부흥을 하고 예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는 교리를 갖고 있었다. 기도하며 휴거와 천년왕국을 기다려야 한다는 신앙이 조선왕조 5백년의 치정과 유교에서 희망을 찾지 못했던 조선 민중에게는 그야말로 복음처럼 들렸다.(배덕만)
감리교의 1903년 원산 부흥운동, 1907년 장로교의 평양 대부흥운동은 한국개신교 역사에서 기록적인 성령체험으로 전해져온다. 원산에서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한 이 체험은 평양에서 1500명의 성도들의 고백이라는 대부흥으로 이어졌다. 예수 사후 다락방에서 초대교회가 탄생한 것처럼 한국교회의 오순절사건이라고 할 정도로 개신교 부흥의 단초가 되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희망을 잃은 유대인들이 성령체험으로 기독교 부흥을 일으켰던 것과 비슷한 체험으로 인식되었다.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별칭도 대부흥에서 비롯되었다. 평양이 개신교의 중심이 되었다.
복음주의 개신교의 평가와 달리 다른 쪽에서는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운 시기에 한가로이 죄를 고백해서 되겠냐, 개신교의 비정치화 전통을 만든 것 아니냐는 비판을 했다. 누구는 독립운동을 하고, 누구는 해외망명을 하는데 일제의 침략에서 피해가는 듯한 자세라는 지적을 받았다. 개신교는 한기총 설립 이전까지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마태오 복음 22장 15절-22절)을 근거로 삼아 독재정권과 폭정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평양의 대부흥에 힘입어 서북교회(평안도 평양 중심) 황해도 교회가 전체 개신교의 70%의 비중을 차지했다. 신학교가 설립되고 미션스쿨이 만들어졌다. 해방 후 서울에는 겨우 30개의 교회가 있었고, 남한 전체에 기독교인은 10만명에 불과했다. 북한 교회가 월남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해방 후 10년간 신설된 2000여개의 교회 중에서 90% 이상이 월남한 개신교들에 의해 세워졌다. 이들의 힘으로 남한의 개신교는 비약적으로 교세를 확대하게 된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한 한경직 목사(1902-2000)의 월남은 개신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기가 된다.
한경직 목사는 서북지역 개신교계 거물로 먼저 남하한 윤하영 목사(미 군정청 공보관)과 미 군정의 도움을 받아 영락교회를 설립했다. 윤하영은 신의주 제1교회 담임목사, 한경직은 제2교회 담임목사를 지냈다. 반공의 상징인 오제도, 장도영 등이 신의주에서부터 한경직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한경직은 영락교회의 초고속 성장을 이끌었다. 창립 당시 27명이던 신자가 이듬해 말에는 1,500명에 육박하게 되었고, 1949년에는 6000 명에 이르는 대형교회가 되었다.
고도 성장의 배경은 북한지역에서 월남한 이들의 안식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945년 말에 월남한 사람들은 주로 기독교인이거나 중상류층으로 속했다. 이들은 김일성의 토지개혁으로 땅과 고향을 빼앗기고 인민재판으로 숙청을 당할 위기에 처한 계층이었다. 오고갈데가 없는 그들은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로 몰렸고, 교회는 그들에게 원조물자와 경찰 등 일자리를 알선했다.
그많은 월남 교회 중에서 영락교회로 사람들이 몰린 이유는 한경직의 반공주의가 강력하면서도 신앙적으로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의주 반공 투쟁 등에 앞장섰던 그들은 반공투사를 자처하고 폭력의 선봉에 섰다. 서북청년회를 결성하고 좌익과 민간인 테러에 앞장섰다.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무서운 게 없었다. 당시에 지지 기반이 미약했던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뉴욕에 있는 국제선교협의회(IMC)와 국제문제교회위원회(CCIA)에 급전이 당도했다. “북한의 침략했다.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두 줄 짜리 전문은 한국기독교연합회 남궁혁 총무가 발신자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한경직 목사의 아이디어였다. 이 전보가 자유세계와 유엔을 움직여 한국파병을 결정하는데 어느 정도 작용했는지는 증명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한경직이라는 인물이 한국기독교의 지도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것은 한국개신교 역사상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존재인 한경직의 성공스토리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다. 동시에 전쟁으로 사회시스템의 완전 붕괴상황에 놓인 한국사회의 재구성 과정에서 가장 막강한 사회세력으로 발돋음하는 계기를 맞이한 한국개신교 성공스토리의 중대한 계기적 사건이기도 하다. 즉 한경직 개인의 성공과 한국개신교의 성공이 만나는 지점에서 한국전쟁이 자리잡고 있다.”(김진호)
한경직의 성공스토리는 구호물품을 만나면서 더욱 빛난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세계에서 구호물품이 답지했다. 한경직이 주도한 ‘대한기독교구제회’는 구호물품을 받고 전달하는 인프라라 되었다. 물품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들었고, 교회에 대한 충성심은 더욱 강화되었다.
“한경직 자신은 늘 타자에게 희생적이고 독설을 퍼부을 때조차 점잖은 품격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추종자들 대부분은 너무나 공격적이었고, 그런 공격성의 화신들에게 한경직은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무튼 영락교회는 경제적 생존을 위한 기회의 장으로서 큰 매력을 갖고 있었고, 이것은 교단을 불문하고 무수한 개신교 성직자들과 교회들이 한경직과 영락교회를 선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여 전쟁과 전후 복구의 시간인 1950년대는 한경직과 영락교회의 시대였다. ”(김진호)
한경직은 역대 정부의 신뢰를 받았다. 1948년 신탁통치와 남한단독정부 문제를 두고 여론을 청취하기 위해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방한했다. 미군정은 한경직을 개신교의 유일한 대표로 위원단과 면담하도록 주선했다. 박정희가 쿠테타를 일으켜 집권했을 때, 미국은 그의 남로당 전력 때문에 신뢰를 주는데 망설였다. 한경직은 특사자격으로 김활란 등 개신교계 인사들과 함께 미국을 방문하여 쿠데타 당위성을 설명했다. 이후 반공연맹(자유총연맹 전신으로 개신교가 설립을 주도) 임원 등을 맡아 군사정권을 옹호하였다.
한경직은 1975년 '나라를 위한 기독교 연합 기도회', 1987년 10월 3일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대성회' 등을 열었다. 여의도 광장에는 수십만명의 성도들이 모였다. 그는 위기에 처한 독재정권에 힘을 실어주는 기도를 했다. 1975년은 월남이 패망했을 때 였고, 1987년은 6월항쟁이 있었다. 공산주의 위협 앞에서 나라를 구하자는 기도회는 반공주의 정권에게 힘이 되었다.
한경직은 1989년 개신교의 정치참여를 행동으로 옮기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설립을 주도했다.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인 전광훈 목사 등 많은 목회자들에게 한경직이 아이콘이 되었다. 그는 반공주의와 반북, 친미와 한미동맹을 성경 못지 않게 믿음의 가치로 생각하는 한국교회의 원형과 DNA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들었다.
“한경직은 1950-1960년대 개신교를 대표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개신교의 특성을 만들어낸 존재였다. 하여 그는 이 시기 한국개신교의 절대1인이 되었다. 그는 수많은 목사들의 롤모델이었고, 영락교회는 수많은 교회들의 선망과 모방의 대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 한국개신교는 ‘한경직의 종교’였다고 과언이 아니다.”(김진호)
한국의 개신교 보수화④ 박정희에서 전두환까지
박정희는 어릴 적에 구미에 있는 교회를 다녔다고는 하지만 종교적으로는 모호했다. 육영수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는 이승만 장면 처럼 국가의식을 기독교식으로 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유교 불교, 나중에는 불교 개신교 가톨릭를 초대해서 의식을 치렀다. 박정희 시기를 특징지우는 것은 개신교의 비약적 교세확대이다. 조용기의 순복음 교회 등 초대형 교회가 만들어졌다. 또 한편 민중신학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탄압을 받았다.
박정희는 취약한 기반을 넓히기 위해서 적절하게 종교를 활용했다. 호국불교가 다시 등장한 것도 불교와의 관계 개선의 결과이다. 반공을 고리로 하여서는 개신교와 우호관계를 유지했고, 전통문화를 매개로 하여서는 불교와 잘 지냈다.
박정희 시대에는 개신교 입장에서 볼 때 불편한 몇가지 조치가 있었다. 이승만은 국기를 ’성화‘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국가주의자인 박정희는 국기와 국가를 ’성화‘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국기하강식, 국민교육헌장, 영화관에서의 애국가 연주 등이 박정희 시대에 늘 만나는 일상이었다. 거리를 지나가다가도 오후 6시 국기하강식 애국가 연주가 나오면 전 국민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경의를 표해야 했다. 숙연했다. 하루라도 애국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였다. 새벽종소리를 들으며 새마을운동을 하고 반공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시대였다.
단군 신전 및 동상 건립운동을 통해 단군 신화를 부활시켰다. 이승만이 하나님으로 시작하는 인삿말을 했다면 박정희는 단군 성조로 시작했다. 지금에 와서는 개천절이 아니면 누구도 인삿말에 단군을 거론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대통령을 따라서 각종 훈화에서 단군을 거론하는게 유행이었고, 달력에는 서기와 함께 단기를 병기했다
박정희의 종교 중립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반공주의 개신교는 박정희의 쿠테타와 10월유신을 지지했다. 이미 기독교는 반공의 보루였고 박정희는 그 보루의 세속적 사령관이어서 개신교의 정교일치는 자연스러웠다. 5.16쿠테타를 군사혁명이라고 찬양했던 김준곤 목사는 대통령조찬기도회(1966)에 이어 국가조찬기도회를 잇달아 성사시켰다. 국가조찬기도회는 1953년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미국 복음주의가 대통령을 포섭하기 위해 만든 행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첫 회 부터 “링컨대통령과 같이 은총을 받는 사람” “모세와 같은 능력으로 민족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에게 지혜의 지팡이를 달라”는 기도가 이어졌다. 재선 고지가 불안했던 박정희는 만족스러워 했다.
개신교는 국가조찬기도회를 통해 ‘대표 종교’의 외양을 얻는 효과를 얻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국무위원이 참여하는 조찬기도회는 고위공직자와 교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교회가 성장하고 번성해 가면서 더 크고 웅장한 교회 건물, 사무실과 기관들을 짓기를 갈망한다. 정부를 비판하지 않아야 재산개발에 대한 승인이 가능할 뿐 아니라, 공개적으로 정부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하면 눈에 띨 정도의 재산 증식이 빨라진다‘(진 매튜스. 당시 한국에서 선교했던 미국인 목사. News & Joy)
개신교는 초대형 대중 전도집회 등 많은 새로운 특권들을 얻어냈다. 반공주의와 개신교가 결합한 대형집회는 교세 확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전국복음화운동(1965 김활란) 빌리 그래함 내한 전도(1973) 엑스폴로74(1974 김준곤) 민족복음화대성회(1977 신현균) 등 수십만명, 연인원 수백만명을 넘는 초대형 예배는 정권의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했다. 교회의 반공 반북 신앙은 정권을 지원했다. 카터 대통령의 미군의 철수 움직임에 대해서도 그가 마음을 돌리도록 하나님에게 기도로 호소했다
군 정신력 강화를 위해 전군 신자화화운동(1969)에서도 개신교가 가장 과실을 많이 얻었다. 군대에서 개신교 장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김준곤은 10월유신을 정신혁명이라고 칭송했고, 전군신자화운동은 세계 기독교의 자랑거리라고 의미 부여했다. 박정희는 1976년 신앙전력화(信仰戰力化)라는 친필휘호를 군 부대마다 하달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군 부대에 좌익의 침투를 우려한 박정희는 반공을 신앙으로 하다 시피하는 개신교가 든든한 후원군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혁명 공약 제1조에서 반공을 첫번째 국시로 표명했다. 자유와 민주가 아닌 반공이 국시였다. 자유와 민주 수호의 결과물로써 반공이 아니라 반공이 우선인 것이다. 개신교도 비슷한 양상을 띄었는데 공산주의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괴물', '악마', '붉은 용' 등으로 묘사했다. 한국전쟁을 겪고, 박정희 시대의 반공주의를 경과하면서 개신교의 선민의식은 한국이 세계 반공 전선 최전방에 서서 사탄과 아마겟돈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자부심을 만들었다.
이승만 시대에 한경직 목사가 중심이었다면 박정희 시대에는 조용기 목사가 새로운 별이 되었다. 박정희 시대에는 너나 없이 “잘살아보세”라는 염원이 지배했다. 산업화 도시화가 시작되면서 그 열망이 퍼져나갔다. 이 시대의 코드에 잘 맞는 것이 조용기의 번영신학이었다. 번영신학은 한마디로 하면 “예수 믿으면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우리가 교회에 가면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번영신학적인 인사이다. 조용기가 교회의 대세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변화이다. 조용기는 질병에 대해서도 적절한 해법(기적의 은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도 조용기의 새마음운동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조용기현상’이 대유행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이제 많은 이들은 조용기와 순복음교회를 롤모델 삼아 선망했고 모방했다. 조용기도 병든 몸의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과 영의 구원이 별개가 아님을 주장했다. 여기에 하나 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갈망까지도 포함되어야 진정한 구원이라고 강변했다. 한경직은 이런 세속적인 갈망은 자칫 영적인 구원을 타락시킬 뿐 아니라, 그런 세속적 갈망이 무속적인 기복성의 발로라고 보았다. 그래서 한경직은 이런 신앙을 ‘이단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김진호)
개신교에서 급속하게 번영신학이 전파되었다. 교회에서 한 설교를 기억나는대로 옮겨 본다. “여러분 성경말씀에 하늘에 재물을 쌓으라 했어요. 어떻게 하면 하늘에 재물을 쌓겠어요. 강남에 땅을 사는게 하늘에 재물을 쌓는 길은 아닙니다. 주식을 사는 것이 하늘에 재물을 쌓은 길은 어니예요. 땅금이 올랐는지, 주가가 내렸는지 분심이 들어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교회에 헌금을 하세요. 하늘에 재물을 쌓으세요. 교회에 헌금을 하면 하나님이 복을 내려줍니다.“
아멘으로 답하는 소리가 나오고 십일조 헌금, 감사헌금이 쌓인다. 교회에 순종하고 봉사하면, 목사에 충성하면 복이 내려온다고 믿게된다. 하늘의 처소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을 하나님이 약속했는데, 지금 내가 부자가 되고, 자녀가 성공하는 현세의 복부터 구하면서 기복신앙화된다. 하나님이 내 아들을 서울대에 합격시켜 주기 위해서 기도가 부족한 남의 아들을 결과적으로 서울대 입시에서 떨어트린다는 사고가 어떻게 가능할까? 기도와 헌금의 반대급부로 하나님이 현세의 복을 내린다면 하나님은 고대 원시 종교에서부터 내려오는 탐욕과 질투의 신과 다를 바 없다.
여하튼 박정희 시대는 개신교의 황금기이다. 무려 교회가 8배 성장했다. 지난 2013년 10월25일 박정희 추모예배에서 한 목사가 이렇게 축사를 했다. “독재니 어쩌니 그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한국은 독재해야 돼, 하나님이 독재하셨어. 무조건 순종하라고 하셨어요”(News & Joy) 하나님의 독재는 성경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박정희 시대의 개신교 부흥에 헌사를 바치고 싶어하는 바람을 읽을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은 불교에도 혜택을 주었다. 종파교회제도(宗派敎誨制度) 도입을 통한 교도소 포교 참여, 군종제도(군 법사. 1967) 참여를 가능게 했다. 이승만이 형목과 군종을 기독교에만 개방했는데 박정희는 더 넓게 문을 열었다. 1975년 불탄일을 공휴일로 하여 불교계의 숙원을 풀어주었다. 사찰입장료(문화재관람료) 징수를 허용하여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대대적 불교문화재 복원사업(1962 불교재산관리법 제정)을 지원하고, 새마을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전국의 사찰에 도로와 전기를 공급해 주었다.
박정희가 이처럼 공을 들였지만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는 ’불교계 정화‘에 나섰다. 국보위의 수사지시를 받은 합동수사단과 3만여명의 군병력이 전국 6000여개 사찰에 난입하여 2000여명의 스님들을 강제 연행했다. 전국 10·27법난은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 스님이 신군부세력이 요구한 전두환 지지표명을 거부한데서 비롯되었다. 한편 보수개신교는 1980년 8월6일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장 조찬 기도회를 열어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와에 비교하며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직책을 맡아 사회악을 제가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많은 시민들이 계엄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지 얼마 안되었을 때 였다.
당시 기독학생들은 양희은의 ‘금관의 예수’를 부르며 하나님의 정의를 구했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곤욕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텅 빈 얼굴들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여 거절당한 손길들의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 있을까 천국은 어디에….”
박정희 시대에는 산업화에 따른 양극화, 독재통치에 따른 인권탄압으로 진보주의 신앙운동이 일어나면서 정권과 긴장관계를 형성했다. 안병무 문익환 목사 등이 민중신학 이론을 제공했고 도시민빈선교회 YMCA 기독학생운동 등이 에큐네미칼운동으로 연대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은 ‘민중과 함께 하는 선교’로 전환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출애굽기의 출애굽성화, 갈릴레이의 민중운동에서 영감을 얻어 민중이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담지자라고 보았다. 개신교 에큐메니칼운동은 1987년 민주화 과정에서 역할을 하고 세력을 형성했는데 이것이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위기의식을 가져오면서 새로운 역관계가 형성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 미국의 복음주의 근본주의를 살펴본 뒤에 설명하기로 한다.
한국의 개신교 보수화⑤ 미국의 근본주의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를 당선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2024대선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개신교 근본주의 이들은 누구일까? 미국의 근본주의는 어떻게 해서 한국에 수입되었을까? 근본주의는 왜 정치에 개입할까?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한국과 미국의 개신교, 그리고 정치를 들여보아야 그 작동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은 남북전쟁 (1861-1865)이전까지만 해도 큰 도전을 몰랐다. 자원은 풍부했고 국토는 넓었다. 뉴욕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알래스카에서 루이지애나까지 국토가 확장되었다. 영국과 서유럽 보다 넓은 영토에서 종교의 낙원을 찾아 이민을 온 그들에게 미국은 하나님의 약속된 땅으로 , 미국인은 선택받은 국민처럼 생각되었다. 주님이 미국을 선택하고 여기에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는 ‘명백한 운명’을 믿었다.
남북전쟁은 큰 시련이었다. 최초의 큰 아픔이었다. 신앙에서 해답을 찾아야 했다. 전쟁의 결과, 흑인노동자들이 북으로 대거 이주하고 실업과 슬럼가 등 도시화의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드러났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1859)이라는 책을 통해 진화론을 펴냈다. 창조론을 믿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이는 중대한 도전이었다. 남북전쟁과 진화론은 미국인들이 갖고 있었던 낙관론을 흔들었고 시대적 상황은 비관론에 빠져들게 했다.계몽주의와 근대 과학의 영향을 받아 유럽에서 성서비평학이 만들어지고 미국으로도 전달되었다. 성서를 있는 그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상황등을 반영하여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진화론과 함께 성서비평학은 기존의 신앙을 뒤흔드는 도전이었다.
프린스턴대학을 중심으로 미국 개신교가 답을 찾았다. 성경은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성경의 무오설(무오류설) 즉 복음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 말씀에 따르면 종말이 다가오고 있고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 예수가 재림하며 선과 악의 아마겟돈 최후의 전쟁이 벌어지면 그때에 의인들은 들어올림(휴거)를 당하고 천년왕국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지성으로 이에 대비할 수 없으니, 사회변화로는 해결이 안되니 성령에 의탁하고 선교로 성전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성서비평학 같은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인간의 이성으로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사회개량론을 비판하는 것이다. 세상을 구하기 위한 선교, 행동주의를 촉구하고 나섰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미국의 엘리트들이 전세계로 나가 신앙을 전파했다.
미국인은 70%기독교를 믿는데 그중 개신교는 50% 가톨릭은 20% 정도가 된다.(2021) 복음주의자들은 미국 전체 기독교인의 81%이다. 그 중 오론쪽에 근본주의자들이 있다. 중간에 광의의 복음주의자들이 있다. 나머지 20%는 자유주의 진보주의적인 에큐메니칼운동으로 분류할 수 있다. 미국 기독교는 1940년 49%였는데 2차 대전 이후에 급격히 늘어났다. 기독교가 냉전에서 사탄과 싸우는 도구화하면서 급증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1949년 로스앤젤레스 부흥회에서 세계적인 부흥사로 발돋움했다. 소련이 핵을 갖게 되면 뉴욕 시카코 다음에 LA가 공격목표가 될 것이라고 설교했고,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2차대전에서 승리한 것은 기도 덕분이라며, 하나님께서 생존이냐 멸망이냐는 극단적인 선택지를 주었는데 소돔과 고모라 처럼 되지 않을려면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 1957년 뉴욕에서 열린 그의 부흥회에는 97회 설교를 하는 동안 3백만명이 참여했다. 에덴동산에는 노동조합도, 노조지도자도 살지 않았다고 하여 자본가들의 지지를 얻었다. 1966년부터 2년간은 베트남에서 설교를 하면서 “우리가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이기고 있다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여 닉슨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1970년대에는 한국으로 왔다.
무늬만 기독교 신자였던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빌리 그래함의 조언을 받아들여 “성경에 기반을 둔 기독교로 회귀해야 하고 자신이 이를 위해 미국인들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에 출마했다고 밝혔다. 1953년 1월20일 취임식에서 기도를 올린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고 백악관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대통령이 되었다.
근본주의는 복음주의 1세대의 분리주의에서 벗어나 1940년대에 서부에 독자적인 신학대학을 설립하는 등 제도권으로 진입했다. 1960년-1970년대에 미국은 가치관에서 여러 변화를 경험한다. 원하지 않은 임신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공립학교에서 흑백인종의 통합등 새로운 이슈가 터지면서 “하나님의 가치에 맞서 인간들이 멋대로 가치를 결정하는 세속적 인본주의”에 맞서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생겨났다. 이 복음주의자들은 행동에 나서 1979년까지 백인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사립학교를 5000여개 만들었고 홈스쿨링을 보급했다. 인종분리폐지는 사탄의 행위이고 소련의 개입이라고 선전했다
복음주의자들이 볼 때 미국은 온갖 형태의 세속인본주의에 공격을 받고 있었다. 공교육의 세속화, 환경운동, 포르노, 동성애, 페미니즘으로 미국은 타락하고 있다고 보았다. 1979년 6월 ‘도덕적 다수’라는 3세대 근본주의 그룹이 결성된다. 그들은 유권자 등록 캠페인을 벌이고 우파후보에게 투표할 것을 설득했으며, 우파후보와 당선인들이 근본주의의 뜻에 따를 것을 요구했다. 또 창조박물관 등 온갖 관련문화를 만들었다.
1980년 공화당 후보인 레이건은 복음주의 신자는 아니었다. 반대편에 있는 지미 카터야 말로 신실한 복음주의자였다. 기독교우파에서 보면 카터는 자유주의자여서 지지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레이건을 설득해서 회심하게 했다. 전직 배우인 레이건은 ’도덕적 다수‘ 지도부를 만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연출했고, 기독우파는 그들이 꿈꾸던 대선 후보를 만났다고 기뻐했다. 조지 H. 부시도 지지를 했는데 레이건과 부시는 당선이 되고나서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그들이 적그리스도라고 본 클린턴이 당선이 되어 성추문으로 백악관을 오염시키는 것은 물론 온갖 세속적 인본주의로 미국을 타락시켰다며 분노했다.
마침내 그들이 원하던 최적의 후보 조지 W. 부시를 만났다. 9.11테러가 올 것을 알고 하나님이 예비한 후보였다고 그들은 말한다. 국민투표에서 지고 선거인단에서 승리한 것이 하나님이 역사한다는 증거라고 했다. 부시는 온정적 보수주의를 외치며 국가의 일인 복지서비스를 교회와 기독교자선단체에 위임했다. 복음주의 목사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고, 그들은 자신이 운영하는 기관에 유대인 동성애자의 채용을 거부했다. 하나님이 더 이상 당하고만은 있지 않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트럼프가 나타났다. 트럼프는 기독교우파가 원하는 모든 것을 약속했다. 트럼프는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나님이 이교도를 통해서도 역사한 선례가 있다고 했다. 트럼프가 죄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은 죄인을 통해 뜻을 펴기도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역사한다는 것이었다. 트럼프는 집권 4년 동안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등 약속한 것을 실천했다. 트럼프는 시련을 거쳐 다시 나타났다. 2014년 대선 와중에 그가 총격을 받았는데 살아났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근본주의자들은 굳게 믿었다. <빌 그래함 부터 트럼프 까지는 ‘The Christian Right, the Republican Party and Donald Trump’(존 뉴싱어)에서 ’노동자연대‘ 번역문에서 참조>
한국의 개신교는 태생부터 미국의 복음주의 영향을 받았다. 한기총 부터는 미국의 ‘도덕적 다수’ 등 근본주의와 궤를 같이 했다. 동질화율이 가장 높다. 미국은 공산주의와 그리고 탈냉전 이후에는 테러리스트, 북한등 악의 축과 늘 대립했다. 악마와 사탄이 있어서 세계의 경찰 역할에 국가의 재정과 국민을 동원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와 북한을 80년 가까이 대하고 있는 한국과 미국이 동질화율이 높 은 이유이고, 한국의 개신교보수파와 미국의 근본주의가 굳건한 교회동맹을 맺게 된 이유이다.
한국의 개신교 보수화⑥ 태극기 집회1988년 2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37차총회에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발표했다.“우리는 갈라진 조국 때문에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을 미워하고 속이고 살인하였고, 그 죄악을 정치와 이념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이중의 죄를 범하여 왔다. 특히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공산정권을 적대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의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한 죄를 범하였음을 고백한다“KNCC 통일선언은 민족분단의 고통을 경험한 독일 교회의 우정어린 조언과 1970년대 부터 통일을 고민한 기독교인들의 오랜 고민과 논의의 결과물이다. 평화의 종으로 이 땅에 온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와 화해와 해방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는 믿음에 기반했다.반공과 반북, 한미동맹을 DNA로 하여 성장한 보수주의 개신교는 통일선언을 결별선언으로 받아들였다. 남북화해 및 긴장완화, 주한미군의 궁극적인 철수 등의 실천사항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한 보수교단을 망라하여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라는 근본주의 단체가 출범했다. 2013년 대한예수교장로회의 탈퇴, 2019년 전광훈의 한기총 회장 당선으로 세가 위축되었지만 보수주의 정치운동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거센 물결 앞에서 지리멸렬했던 보수교단은 한기총의 등장으로 정치세혁화한다. 성속이원론을 폐기하고 정치참여노선을 채택한다. 재정위기에 처했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을 압도한다.김대중 정부 말기, 노무현 정부 초기에 대북화해정책, 효순·미선사건으로 인한 반미시위를 보면서 반공주의에 기반했던 개신교는 큰 위기의식을 느꼈다. 친북좌파정권과 그 세력이 이 사회를 지배했다고 보고 정치적 행동에 나섰다. 2003년 1월 서울 광장에서 시국기도회를 잇달아 연데 이어서 기독당을 결성하여 2004년 총선에 참여했다.개신교 우파, 기독 뉴라이트는 노무현 정부의 4대개혁 입법을 반대하고 좌절시키면서 정치적 효능감을 맛보았다. 보수언론과 사학재단, 개신교가 사립학교법 국가보안법 개정에 맞섰다. 결국 열린우리당을 분열시켰다. 기독교 국가 건설을 꿈꾸면서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 이명박 장로의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2004년 미국 의회가 북한인권법을 통과시키는데에 측면 지원을 했고, 북한 정권이 붕괴하면 10년 이내에 1만개 이상의 교회를 세우겠다며 탈북자단체를 지원했다. 대북전단살포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이런 일련의 행동에 뉴라이트도 함께 했다.이명박 정부 들어서서는 극우적 개신교 시민단체의 결성에 나섰다. 개신교 우파는 한국 극우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고 공급처이자 운동주체가 된다. 북한 이슈에서 동성애자 이슈까지 전선을 확대하여 전방위적 역사전쟁, 문화전쟁을 벌여나간다.노무현 정부 시절, 법무부와 진보적인 의원들이 제기했던 차별금지법을 동성애조장법이라고 본질을 왜곡한다. 법안이 통과되면 목사가 설교 중에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해도 교도소에 가게 된다며 종교탄압 프레임을 붙인다.처음에는 에스더운동이라는 소수단체에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세를 불린다. 나라사랑학부모회, 바른 성문화를 위한 국민연합과 같은 단체가 출범한다. 미국의 ’도덕적 다수‘가 성교육을 금지하고 순결교육을 하자는 캠페인을 했던 것을 한국에서도 전개한다. 2016년 21개 교단이 뭉쳐서 ’한국교회 동성애 대책협의회‘를 구성한다. 이런 운동의 와중에 종북딱지가 만능이 되었다. ‘종북게이’(성소수자 좌파) 처럼 종북=게이와 같은 비논리적인 이데올로기적 공격이 만연한다.퀴어축제 반대에 나선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이 심판할 것이라며 회개를 촉구한다. 차별반대법은 18대 국회 진보당에서 재차 발의한데 이어 19대 국회에서 민주당의원 66명도 입법안에 동의했다. 2013년 유엔인권이사회까지 권고했지만 보수교단에서 일간지에 광고를 게재하고 낙선운동을 벌이겠다고 하면서 법안을 스스로 철회했다.자신감을 가진 개신교 보수는 전선을 확대한다. 한국 내 무슬림의 세 확대를 경계하고 양심적병역거부 난민 등 소수자 인권신장에 반대한다. 성직자 납세등 제도적 이익을 수호하면서 이를 종교탄압이라고 한다. 실제로 과세대상이 되는 목사는 전체의 5% 이내이지만 이들의 목소리를 제어할 수 없는 교회 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예수 그리스도는 태어나자 마자 난민이 되었다. 왕이 태어난다는 동방박사의 말에 헤로데가 전 이스라엘의 신생아를 모두 죽이라고 했는데, 천사의 안내로 마리와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데리고 피신한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개신교인들은 난민의 수용을 반대했다. 이슬람이 들어온다는 논리로 반대했다. 개신교 우파의 목소리와 영향령이 가장 컸을 때였다.“도덕적 자유주의자들의 손가락질에서 비롯된 수치심과 피해의식과 분노,그런 수치심을 자존감으로 전환시켜주려는 강렬한 감정의 문화전쟁”(한국개신교의 보수적 시민운동. 강인철)이 중요한 동인이었다.2015년 통계청 조사와 2005년 조사를 비교해 보자. 개신교는 10년 사이에 125만명이 늘어나 967.6만명, 19.7%로 최대종교가 되었다. 이 시기에 교세를 확장한 곳은 개신교 뿐이었다. 통계청은 1985년부터 매 10년 마다 국민들의 종교 분포를 조사하고 있다. 불교는 296.9만명이 줄어든 761만명으로 15.5% 가톨릭은 112.5만명이 줄어든 389만명으로 7.9%였다.세계 50대 대형교회를 꼽으면 한국 교회가 한때 23개를 차지하고 있다.(1993년 기준) 금란교회 광림교회 성락교회 중앙연세교회 영락교회 순복음교회 은혜의진리교회 등이다. 세계초대형교회 통계(2024 Global Megachurches/Warren Bird)로는 아시아 142개 교회 중에서 32개가 한국교회이다. “기독교는 그리스로 가서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가서는 제도가 되었다. 유럽으로 가서는 문화가 되었고, 미국으로 왔을 때 교회는 기업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대기업이 되었다.”(손석희)대형교회가 많은 것이 과연 축복이냐는 데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개척교회가 있고 자립교회 중견교회가 많은 것이 건강한 생태계이다. 번영신학적 입장에서 보면 대형교회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축복을 내리는 살아있는 증거이다. 대형교회는 버스까지 동원하여 성도들을 자기 교회로 모이게 한다. 대형교회가 종교의 골목상권을 침범하면서 개척교회와 소형교회는 문을 닫는다.한국은 해외선교도 세계 제일이다. 2023년 한국선교사는 세계 174개국에 2만 3318명이다.(한국 세계선교협의회, 한국선교연구원 보고서) 한기총 설립 이후 공격적으로 해외 선교를 지원하고 있다. 미국 크리스채너티 2006년 커버스토리에서는 한국이 2위였으나 2010년 고든콘웰신학교 국제기독교 연구소 통계로는 미국 12만명, 브라질 3만4000여명에 이어 6위로 랭크되었다.인구사회학적으로 한국에서는 더 이상 교회의 개척이 가능하지 않다. 노무현 김영삼 시절에 신학대학이 늘어나고 안수를 받는 목회자들을 한국에서 수용하기가 힘들어졌다. 저출산 고령화로 선교의 대상이 줄어들었다. 해외 파송에서 길을 찾았다. 미국과 함께 세계 선교를 책임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미국과 한국 개신교에서는 근본주의가 가장 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불교국가, 이슬람국가, 중국, 이스라엘에까지 선교사들이 나가 있다. 충돌이 잦을 수 밖에 없다.2016-2017년 박근혜 탄핵국면에서 다시한번 총집결을 했다. 태극기 부대를 형성했다. 성조기 이스라엘기 일장기까지 동원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당혹감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당시 1960-1970년대 이른바 명문고 동창들이 졸업회수별 깃발을 들고 나오는 현상은 기득권층의 인식이 경도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헌법적 가치를 누구 보다 체득했어야 할 지배엘리트들이 박정희 향수와 반공주의로 평생을 살았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촛불이 승리하고 진보정권이 출범했으며 10년 보수정부는 적폐세력으로 몰렸다. 보수개신교는 절치부심하여 2022년 윤석열 정부를 출범하는데 기여했다.영적인 전쟁에 나서라고 촉구하는 전투적 기독교, 종북 좌파 동성애로 종말이 다가왔다며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을 유포하는 근본주의적 신앙, 선과 악의 최후의 결전 아마겟돈이 다가왔다며 적그리스도와 최후의 결전을 독려하는 정치적행동주의는 여전히 강한 세력을 유지한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 나한테 까불면 죽어…” 등의 전광훈 목사의 발언이 알려지고 MZ세대의 무관심에 부딪히면서 내용적으로는 신앙의 이탈자가 많아지고 있다.그들이 절치부심하여 만든 윤석열 정부는 역대급 인기없는 정부가 되었다. 신앙의 위기에 부딪혔다는 인식이 있으면 교회의 쇄신이 필요한 것인데 70년된 한국교회의 반공DNA는 변하기를 거부한다. 김정은과 핵무기가 있는 이상, 다시말해 사탄이 있는 한 그들의 영적전쟁은 계속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신앙이 형성된 탓이다.성경은 모든 민족에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가르친다. 기독교의 정신에 비추어 보면 예수가 창녀와 문둥병환자, 사마리아인을 포용했듯이 이 시대의 소수자와 난민들의 목소리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지금 이 시대의 땅끝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탄압받는 이들이다. 그것이 사랑이고 포용이다. 북한의 동포들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우리의 땅끝이다. 2000년전에 이 땅에 평화로 온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평화를 바라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