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저 인용하는 일 넘어서서 남이 쓴 책에 길게 입대는 일 접은 지 벌써 3년이 훌쩍 지났다. 특히 제국 지식인이 쓴 책은 앞으로도 그렇게 할 작정이다. 오늘은 그 적조 딛고 부득불 이야기해야 할 시집 한 권을 꺼내 든다. 김선우 제7 시집 『축 생일』이다.
김선우는 내게 각별한 시인이다. 나는 그를 천하 시인이라 부른다. 그는 나를 도반 선생이라 부른다. 내가 그에게 어떤 도반(道伴)인지 나는 모르지만, 내게 그는 시로써 내 삶 결과 겹을 되작거려 없는 틈을 내고, 있는 새를 메우도록 하는 도반 시인이다.
김선우 시는 나를 시 바깥에서 불러낸다. 그 부름은 문학이나 언어 본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시 이전 얼 결, 넋 살이 비인과(非因果)로 이어질 때 시공간이 특정되면서 엄밀한 냄새를 피워올린다. 엄밀해서 그 냄새를 아무나 언제 어디서나 맡을 수는 없다.
냄새가 온몸을 돌고 시에 되스며들어 그 거점을 지우고야 세계로 번져간다. 나는 다른 시에서는 이렇게 경험하지 못했다. 이 경험이 『축 생일』에서 또다시 일어났다. 시를 읽어서 내 인생을 한층 더 깊게 알아차렸다고 말했더니 시인은 신비롭다고 답했다.
그 신비로운 알아차림은 “다정함”, 그러니까 “살가움”에 관한 내 인생과 생각에 “없는 틈을 내고, 있는 새를 메우도록” 해주었다. 살갑지 못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나무와 물 본성인 살가움에 끊임없이 다가가야겠다고 한 결론이 온전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면 뭐가 온전하지 못했는가? 여전히 인간중심주의에 몸 담그고 있어서 그렇다. 나무와 물로서 살가움이 인간 살가움과 같지 않다고 했을 때, 나는 인간 살가움을 따랐다. 나무와 물 살가움이면 족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인간은 왜 특별해야 하는가?
결국 내가 좀 더 살가워져야 한다고 한 각오는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다짐이다. 아니다. 나는 잘못하지 못했다. 나는 나무와 물 방식으로 살가웠을 뿐이다. 그게 나다. 왜냐하면 나는 태어나 처음 먹은 음식이 모유 아닌 미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물성 모유보다 식물성 쌀, 그리고 바깥 물을 먼저 만나서 시생대 식이, 냄새 감각이 형성되었다. 그 감각을 따라 70년을 살았다. 70년 감각에 공명하는 냄새가 김선우 시에서 나는데 어찌 그가 내게 천하 시인이 아닐 수 있겠는가. 가히 숙명이다.
『축 생일』을 받아 한 호흡으로 읽어 내렸다. 하루 내내 그 영성과 기운에 깃들어 있었다. 마침내 “시의 마음이어야 닿을 수 있는 어떤 있음이 세상에 스미고 번져 세상을 아름답게 지킬 수 있도록”(김선우) 널리 알려야겠다고 다짐해 이 기묘한 글을 쓴다.
개천절 아침이다. 내 인생 들마, 이제 분명하고도 모호한 새 길 열기 카이로스에 당도했음을 직감한다. 필경 천하 시인 김선우도 그런 특이점에 서 있을 테다. 하늘 열린 날 나지막이 내려앉은 잿빛 하늘 보며, 폴짝폴짝 뛰어 平平 세상 여는 백일몽을 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