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겨울 제주행의 본디 목적은 강정마을과 올레1길이었다. 올레1길이 터진목을 지난다는 사실, 그리고 터진목이 4.3유적지 중 하나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걷다가 맞닥뜨렸다. 순간 탄식했다. 아, 어차피 제주에서 4.3을 피해 갈 수는 없는 노릇이구나. 아직도 매판의 세상이다 보니 내 감수성은 어쩔 수 없이 이런 시공으로 배어든다. 일제에 부역하던 종자들이 미제의 비호 아래 사회 모든 분야의 권력을 다시 틀어쥐고 식민체제를 유지, 확산시켜온 현대사는 오늘날 여전한 발걸음으로 이리도 아프게 이리도 모질게 이리도 구석구석 민중을 짓밟으며 간다. 나는 망연히 일출봉을 바라본다. 적막을 가르는 울부짖음 소리 하나 폐부에 박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마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배우 김여진의 트워터를 보고 나는 홀연히 제주도 강정마을로 향했다. 침과 한약을 싸들고 가서 해군기지 건설 반대운동을 펼치는 주민과 활동가를 치료했다. 내가 침 치료한 곳은 마을의례회관과 구럼비 밖 모래언덕이었다. ‘의사가 막걸리 마시면서 침 놓으면 침이 고치는 거냐 술이 고치는 거냐’던 주민들 우스개가 낭자했지.^^



그때만 해도 구럼비가 온전했던 터라 나는 그 위를 맨발로 돌아다니며 경이와 맞닿을 수 있었다. 붉은발말똥게도 보았다. 그 구럼비도 그 붉은발말똥게도 이제는 없다. 그 강정과 그 주민과 그 활동가에게서 나 또한 없다. 그 기억을 더듬어 오늘과 마주 세우려 2020년의 내가 다시 강정마을로 간다.



포구를 향해 난 길을 따라가다 살풍경한 전신주에 매달린 도로 표지판을 본다. 말질로 213번 길. 행정토건이 일으킨 이름이다. 내가 그곳을 주목한 이유는 그때 구럼비로 가는 들길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발맘발맘 따라 가본다. 아니나 다를까 마치 연인처럼 그때 풍경이 와락 달려와 품에 안긴다. 물론 거기까지다. 구럼비는 살해되었고 사람 마음 한 조각 어찌어찌 살아서 전신주 신세를 지고 있다. 『해군 반대』. 앞에다 ‘미’자를 더해야겠지.





본디 이 길 이름이 할망물로였던가·······그렇기도 하겠다. 왜 마을 이름이 강정江汀이겠나. 그러나 그 가로막힌 길 너머를 보라. 범섬을 밀어내고 군함이 들어앉았다. 협잡을 국가안보의 계율로 삼는 자들이 지은 공식 이름은 제주민군복합형관광미항이란다. 제주만 빼고 모두 거짓말이다. 사제 문정현이 여적 거기 있는 까닭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강정평화상단(http://savejeju.net/)을 찾는다. 해마다 명절이면 인생은사 두 분께 인사 올리는 식품을 의뢰하는 곳이다. 감귤류 농산물, 옥돔 등 수산물, 흑돼지 등 축산물, 소시지 등 가공식품 판매 수익금 전액을 강정 생명평화운동에 쓰는 협동조합이다. 일요일인데도 분주하다. 방해가 될까봐 인사만 간단히 하고 얼른 돌아선다. 이들의 삶과 나의 삶은 대체 얼마만큼 이어져 있을까. 내 삶에 송구함이 또 한 번 번지는 순간이다. 



강정을 떠난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택시 한 대가 다가와 경적을 울린다. 서귀포 갈 거면 타라고 한다. 이런 일도 있구나 싶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기사가 수염 기른 내 외모를 보고 사제 문정현을 떠올린 모양이다. 그런 일 하는 사람인가 묻는다. 강정마을 문제를 전국적 이슈로 만든 장본인 가운데 하나라 하니 놀란다. 그의 놀라움이 무색하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익명의 존재다. 공동체 밖 사람이다. 회색으로 더욱 나지막이 내려앉은 강정 하늘 끝자락에서 스스로 묻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름 모를 꽃 한 송이가 나를 올려다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가 D-Day일 때

너는 휴가인 우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Photography : Abbas Kiarostami <Wind, Rain, Glass>


“Talk to me like the rain and let me listen”_Tennessee Williams 




* 출처-Jo Coyne @Jopolkadot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Eugène Delacroix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바탕 그림 일부


세계는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비대칭의 대칭운동이다. 쪼개진 둘의 영속화도 억압이고 포개진 하나의 영속화도 억압이다. 이 억압에 찰나적으로 금이 가거나 구멍이 뚫릴 때 인간은 울음 또는 웃음으로 반응한다. 울음은 무엇이며 웃음은 무엇인가? 어떤 경우는 울음이며 어떤 경우는 웃음인가? 문제의 근원성에도 불구하고 논의 수준은 높지 않다.


일상의 정서에서 울음은 어둠, 웃음은 밝음으로 느낀다. 극적인 상황에서 이 느낌은 뒤집힌다. 일상의 이성에서 울음은 눈물이란 물질로 나타나고, 웃음은 그런 물질로 나타나지 않는다. 극적인 상황에서 이 인식은 뒤집힌다. 고전물리학적 어법에서 울음은 입자고 웃음은 파동이다. 양자물리학적 어법에서 울음과 웃음은 상태함수 차이일 따름이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식으로 정리하면 울음과 웃음은 안팎으로 나뉘되 하나인 무엇이고, 하나이되 안팎으로 나뉘는 무엇이다. 안팎의 나뉨이 고정된 실체가 아님은 물론이다.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고 해서 그때그때 식별 가능한 실재도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울음은 울음인 만큼, 웃음은 웃음인 만큼 실재하는 사건이다. 그 실재가 출발점이다.


태초에 울음이 있었다. 본디 울음은 웃음과 혼융된 하나였다. 울음에서 웃음이 떨어져 나오는 찰나 울음의 소향실재와 웃음의 소향실재가 나뉘었다. 울음은 하나라고 믿었는데 둘로 쪼개지는 것을 알아차릴 때 터져 나온다. 웃음은 둘이라고 믿었는데 하나로 포개지는 것을 알아차릴 때 터져 나온다. 울음은 아프되 삽상하다. 웃음은 즐겁되 씁쓸하다.


양태는 다르지만 기존의 갇힌 세계에서 이탈하는 경험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울음과 웃음은 동일하다. 기존 세계에서 이탈하는 것은 다만 예외적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전체 진실을 향해 변화해가는 것이다. 울음과 웃음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방식으로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세계 진실의 열린 네트워킹에 참여하는 근원행위다.


근원행위임에도 주목받지 못한 것은 경계사건이기 때문이다. 경계사건은 계기로 작동할 때만 주목받는다. 계기인 경계사건은 각성과 결합한다. 각성의 심리는 상실애착과 상실혐오라는 비대칭의 대칭으로 구성된다. 상실애착 때문에 울음은 웃음보다 무거워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상실혐오 때문에 패권문명은 깨달음의 울음보다 조증의 웃음을 택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조증의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도구적·소비적 웃음이 넘쳐나는 오늘날, 웃음을 말하는 데 인문학적 관점만으로는 부족하다. 생태정치학비판이 필수다. 하물며 웃음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와 구체적 무기를 장착한 유머임에랴. 각성과 변화 없이 쾌감만 남기고 허공에 소리로나 흩어질 웃음일 뿐이라면 유머가 더는 필요 없잖나.


생태정치학비판에서 웃음이 곤경(!)에 처했다면 짝패인 울음은 어떨까? 조증 처방이 울증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더 분명한 것은 웃음의 유머와 맞먹는 울음의 ‘무엇’이 없는 도저한 편향이다. 편향을 벗어나려면 엄숙한 의례와 질탕한 축제를 이어줄 울음의 ‘무엇’을 호명해야 하잖나. 변혁의 오르가즘과 방설의 울부짖음을 물적으로 만나게 하는 그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