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을 샀다. 책 내용이 좋아 덥석 사느라 그랬는지, 앞 면지가 심하게 접히고 구겨진 채로 날개 속에 숨어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 생각 않고 반품하면 그만이지만, 비록 일부 하자는 있더라도 정성들여 만든 600쪽 가량의 책이 폐품 처리 되어버린다면, 이만저만 안타까운 일이 아니다 싶어, 출판사에 전화를 했다. 책도 살리고 면지를 깔끔하게 손보는 길이 있는지 문의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죄송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현재 상태에서 내 힘으로 손보아 소장하기로 마음먹고 통화를 끝냈다.



우선 접히고 구겨진 부위를 손으로 펴는 일부터 시작했다. 손가락 머리와 손톱을 써서 가급적 반듯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에는 자와 칼로 삐져나온 부위를 잘라냈다. 거친 부분들은 소형 가위로 다듬었다. 접히면서 잘려나가 모자란 부위는 어쩔 수 없으므로 그대로 두었다. 그 결과, 일부러 들추지 않는 한 하자를 알 수 없는 겉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작업을 하는데 간호사가 들어와 묻는다. 반품하지 왜 그런 수고를 하느냐? 나는 되물었다. 이 책 한 권을 만드는데 목숨을 바친 나무가 몇 그루 쯤 될 것 같으냐? 애쓴 사람이 몇 명 쯤 될 것 같으냐? 간호사가 고개 끄덕이다 나가며 이의 한 자락을 남겨둔다. 그렇긴 하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내 이런 자세를 보통은 ‘사물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해둔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대부분 비웃을 테니 말이다. 더 나아간 내 속말은 ‘신을 경외하는 것’이다. 신을 경외함으로 삼가 옷을 꿰매던 손이 오늘은 책을 고쳐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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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죽지 못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우울증 환자에게서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어온 제게 한 바퀴 구른 이 말은 정서적 현기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수없이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두 번 죽음 맛을 보기는 했으나 ‘아쉽게도’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그에게는 아무 의미 없이 어렵기만 한 무엇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우물우물 말했습니다.


생애 초기부터 그에게 어머니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5세 때 마침내 어머니는 머나먼 나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일을 계속했으므로, 어머니 부재상태는 전혀 변함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사실상 그를 버렸듯, 그는 사실상 자신의 삶을 버렸습니다. 20살 이후, 단 한 순간도 삶에 애착을 품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머니에게서 찾지 못한 따스한 인간관계를 찾으려고 연애를 여러 번 시도했습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병든 연애였으므로, 그는 거기서도 언제나 버려졌습니다. 헌신할수록 비참하게 ‘차였습니다.’ 차일 만큼(!) 헌신하는 데도 트라우마가 작용했습니다. 중학생 때 그를 좋아하던 여학생이 자신을 만나러 오다 눈앞에서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깊은 죄책감의 또 다른 진원지였습니다. 그런 취약점을 간파한 여성들은 가차 없이 포식자가 되어주었습니다.


상호작용으로서 따스한 삶을 그는 마침내 포기해버렸습니다. 어느 날부터 그는 여성의 속옷, 액세서리, 소지품 따위에 집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절도를 해서라도 지니려 시도했습니다. 정서적 충동이 격렬히 휘몰아칠 때는 거의 발작 수준이라 의식이 소실되기도 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파출소에 잡혀와 있는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그의 마음은 닫혀만 갔습니다. 삶은 그저 시간에 밀려 떠내려가는 맛도 영양도 없는 건더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저 또한 우물우물 그에게 제안 하나를 했습니다.


“음·······기왕 없어진 김에 맛이 없다, 영양도 없다·······뭐 그런 생각조차 거두면 어떨까요?”


말하자면 그냥 ‘함 살아보기로’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없는 건데, 그걸 애써 있다, 있다 하는 것만큼이나 없다, 없다 하는 것도 거시기하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물끄러미 저를 봤다, 멍 하니 허공을 봤다, 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음 주에 와서 그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우물우물 하던 말에 살짝 속도가 붙었습니다.


“선생님,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만세!


그는 얼마 뒤,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해보고 싶은 일을 하러 떠난 것이었습니다. 돌아오면 찾아온다, 어쩐다, 따위 약속은 없었으니 그 다음 그의 삶은 모릅니다. 다만 저와 함께 일으킨 종자 변화를 간직하고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우물우물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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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날 인간이면 누구나 행복 추구를 천부인권으로 여긴다. 대한민국헌법 제10조가 보장하는 것은 말할 나위조차 없고, 철학과 종교의 난사람들 입에서 매순간 쏟아져 나오는 말이 행복 추구다. 진실은 다르다. 행복 추구는 역사적·정치적 개념이다.


행복은 객관적 실체가 아니다. 행복은 행복감으로 실재한다. 행복감은 개별적인 것이다. 설혹 함께 향유한다손 치더라도 각자가 느끼는 바는 다르다. 개별적 존재로서 인간을 자각하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 자각이 자연스럽게 일어나 연착륙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어떤 계기에 폭발적으로 자각이 일어나 경착륙되었다. 경착륙은 전쟁·차별·학대·착취·파괴를 결과하면서 도리어 행복 추구를 억압하는 정치체제로 공고히 되었다. 이 억압의 정치에 저항하여 일어난 혁명운동이 비로소 평등한 개인의 행복 추구를 천명하였다.


18세기부터 일어난 민주주의 혁명이 거의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면서 마침내 20세기 말에는 민주주의 진면모가 미증유의 모습을 드러냈다. 드러나는 찰나 그 민주주의는 즉각 퇴행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지금은 다시 민주주의가 거대한 위기를 맞고 있다.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와 정략적으로 결합하면서 야기한 행복의 파편화 때문이다. 행복의 역설이다.


행복은 개별적이다. 끝내 개별적이어서는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이 이율배반의 진리가 고통스럽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섰다. 이제 어찌 할 것인가. 개별자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행복은 없는 걸까. 있다. 숭고다. 숭고는 개별자의 경계를 넘어서는 공적 참여다. 공적 참여가 장엄을 향해 탱탱 느슨한 연대의 고리를 이룰 때, 숭고와 진정한 행복은 하나가 된다. 바야흐로 숭고의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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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도 애착을 끊은 표정은 저렇구나, 싶은 작고 깡마른 얼굴의 청년이 들어섰습니다. 그의 걸음걸이는 어쩐지 그 자체로 변명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공황장애 병력이 있고 우울증도 심했습니다. 무엇보다 문제는 불면증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난 몇 년 동안 2-3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 말했습니다.


“비염 치료를 받은 뒤부터 불면증이 더 심해졌습니다.”


아뿔싸! 이것은 일종의 의료사고입니다. 제가 진단한바, 그가 앓는 비염은 전형적인 알레르기비염이 아니었습니다.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이라는 긴 이름의 특별한 비염이었습니다. 서구의학 임상에서 이 둘을 실제로 구분하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대부분 알레르기비염으로 진단하고 항히스타민제를 처방할 것입니다. 이 방법이 증상을 억제할 수는 있겠지만, 제대로 된 치료는 아닙니다. 이 방법을 쓰면 나타나는 부작용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불면증입니다. 면역학의 이치상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서구 임상의들은 알지 못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그에게 상세히 해주었습니다. 제대로 된 지식 전달 자체가 치유의 한 축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항히스타민제의 원리와 다른 한약을 지어주었습니다.


제가 지어 보낸 한약의 치료원리는 우울장애 치료와 같은 기반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무얼 의미할까요? 혈관운동신경성비염과 우울증이 본질상 서로 맞닿아 있는 병이란 얘기 아닐까요? 이 통찰은 저 자신의 병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우울증 때문에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앓은 경험이 있습니다. 15년 이상 치료가 안 되어 고생하다가 40대 후반, 어떤 양방병리학 책에 첨부된 소논문을 읽다가 벼락같은 한 문장을 만났습니다.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은 대개 슬픔· 원망 등의 감정 요인이 작동하므로, 심리치료 말고는 현재 의학의 수준에서 마땅한 치료법이 없다.”


그제야 저는 여태까지 했던 노력이 왜 부질없는 것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즉시 저는 실천에 옮겼습니다. 애써 다른 전문가를 찾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심리 상담을 진행했습니다. 칠흑 같은 밤의 어두움 속에서 침묵과 절규를 가로지르며 극진히 자기 대화 나누기를 서너 시간, 이윽고 희붐하게 동이 터오고 있었습니다. 어느 한 순간 문득, 연거푸 나오는 재채기·엄청난 양의 맑은 콧물·코 막힘·가려움·미열·두통 등의 증상들이 아침 해 뜨면 물안개 사라지듯 없어지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이내 소름 돋는 느낌이 와락 달려들었습니다. ‘아, 병은 이제 없구나!’ 그렇습니다. 그것으로 제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의 긴 역사는 막을 내렸습니다.


임상 현실에서 혈관운동신경성비염에 심리치료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일 의료인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제 경험을 토대로, 진단 과정에서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인가, 아닌가를 면밀하게 살핍니다.


거꾸로 접근하는 진료도 필요합니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진단할 때 코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특히 우울장애일 경우는 이 진단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문진과 경추압진頸椎壓診-목뼈를 손가락 끝으로 누르는 진단 방식-을 하면 거의 완벽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울장애와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은 ‘혈통’이 같은 병입니다. 기억 속에 저장된 아픈 감정을 되살려내어 마음의 장애를 유발·지속·증폭시키는 것이 후각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합니다.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오랫동안 우울장애와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따로 생각하면서 시달려 온 전형적인 예가 바로 제 자신입니다. 제가 자기 상담으로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치료한 것은 결국 우울장애의 치료를 겸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이치를 저는 그에게 그대로 적용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어머니가 주입한 근거 없는 기준으로 말미암아 어린 시절부터 자기혐오를 격렬히 겪었습니다. 외모·학교·전공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속 깊이 나누며, 그는 점차 불면과 비염과 우울의 동굴에서 빠져나왔습니다. 나와서 돌아보니 하나의 동굴이었다는 진실을 간직한다면, 언제 어느 때 또 그런 동굴을 만나도 그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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