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낀다는 우리말은 참으로 아름답다. 소중히 여겨 보살핀다는 뜻과 함부로 쓰지 않는다는 뜻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두 의미는 결국 하나다. 아끼기 때문에 아끼는 것이다. 아끼는 것은 내가 사물을 경외하는 한 방법이다.


거품이 일지 않을 만큼 작아져 더는 쓰지 않는 세숫비누 수십 개를 모아 불린 뒤 고르고 곱게 으깨어 저은 다음 물이 다 증발될 때까지 놔두면 쓸 만한 재생(?)비누가 된다. 한의원 세면대에 올려놓았더니 간호사가 버섯을 왜 거기다 두었냐 한다.



세송이 비누. 궁상떨기로 읽힐 수 있는 내 사물 경외법에서 탄생한 비누다. 간호사도 한의원 드나드는 환자분들도 이 세송이 비누를 쓰지 않는다. 얼핏 보면 비누가 아니라 생각되기 때문이거나 비누인 사실을 알면 께름해서일 터. 나 홀로 신났다.


여러 종류의 쓰다 남은 비누가 모였기 때문에 향이 은묘하다. 살짝 호사를 뿌린다면 향이 발효된 느낌이 난달까....... ‘비누 사치’ 부리는 습성과는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는 이 풍경 속에서 나는 자못 행복하다. 향의 신들을 소미하게 만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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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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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집안에 혁이 환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어요.·······아, 무섭더라고요. 그 집에서 더는 못살겠어서 이사했어요.(65~66쪽-강혁 엄마 조순애)


사랑하는 사람의 이제 여기 없음과 그리움을 겪는 방식은 한결같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차마 떠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차라리 떠나고 만다. 떠나는 것이 단절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연속의 반어법적 표현이다. 오죽하면 무섭다 하랴.


생때같은 새끼 환영인데 뭐가 무섭냐고 말하면 안 된다. 환영은 부재를 너무나도 소름 돋게 일깨운다. 공포가 절망의 쇠꼬챙이로 쑤시며 와락 달려든다. 아련함이 단박에 부서진다. 은산철벽 저편으로 새끼는 격리된다. 어미가 떠난 것이 아니다.


새끼도 떠난 것이 아니다. 사악한 권력이 그 둘을 갈라놓았을 뿐이다. 제 목숨을 강탈당했으므로 새끼는 사무친 환영이 된다. 제 새끼를 강탈당했으므로 어미는 그 환영이 섬뜩하게 무섭다. 사무친 환영도 섬뜩한 공포도 범죄에 대한 증언이다.


416 이후 얼마간 나는 아이들의 임재를 감지하곤 했다. 아침마다 나는 그들 모두의 이름을 소리 내 불렀다. 그들은 들었다. 그들은 내가 시침 후 손 씻으러 가면 수돗물을 틀어주었다. 내 PC 속에 저장된 특정 ID를 바꿔주었다. 환각이든 신비든.


내가 아이들과 생사의 경계를 넘어 쉽게(!) 연속될 수 있었던 것은 서로 생면부지의 남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연속성이 덜 입자적이기 때문이다. 단절감이 그나마 말랑했기 때문이다. 몸속에서 키워 내보내고 손으로 기른 어미는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럴 수 없으므로 무섭다. 어찌 생에서 사로 그리 쉽게 넘어간단 말인가. 어찌 사를 생으로 그리 쉽게 받아들인단 말인가. 어미는 새끼와 한 물질이 아니던가. 단절의 공포를 견딜 수 없어 떠나고 마는 것은 연속을 영원하게 기리기 위함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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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먼저 살던 인생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소중한 걸 왜 이제 알았을까.(60쪽-세영 아빠 한재창)


사랑이란 뒤늦은 깨달음으로서만 지고하게 현현하는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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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할 때 단 한 번도 세영이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우리 딸내미는 그 추운 바다 속에서 떨다 죽었는데 나는 물 온도 맞추고 있네.......’(60쪽-세영 아빠 한재창)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누군가와 생사의 조건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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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이 첫 생일이 다가올 때 정말 힘들었어요. 그날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생각만 해도 두려웠어요. 그런데 첫째가 지현이 생릴 파티를 해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안산에 사는 고려인들이 뭐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면서 지현이 생일을 함께 챙겨줬어요. 우리한테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면서 고려인 음식으로 다 준비해주셨어요.·······


  생일이 다가올 때는 너무 힘들고 무서웠는데 막상 생일날은 썩 괜찮은 마음으로 보냈어요.·······

  지현이 아는 친구들이 그날만이라도 우리 지현이를 기억하고 마음만이라도 지현이와 함께하는 게 좋아요.(58~59쪽-남지현 엄마 전옥)


박탈감과 피해의식, 그에 상응하는 집요한 보상욕구로 똘똘 뭉쳐 있는 사람은 사유의 어떤 길모퉁이를 돌아나가더라도 결국은 ‘빼앗겨 억울하다’며 악에 바쳐 발버둥치는 곳에서 주저앉는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 것을 빼앗은 ‘범인’을 찾아 헤맨다. ‘범인’을 잡으면 자기 인생의 온갖 불행을 그에게 뒤집어씌운다. ‘범인’을 아무리 비난하고 쥐어뜯어도 행복해지지 않으므로 그는 또 다시 다른 ‘범인’을 찾아 나선다. 오직 이 일에만 매달린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들과 공감하지도 않는다. 함께 삶을 나눈 사람들을 기억하지도 않는다. 오늘의 “범인”이 어제의 ‘범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피의 제의가 무한히 반복된다.


실제 이 상황 속에 있는 사람 자신은 정확하고 심각하게 인지하지 못한다.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윤리적·인격적 문제를 본디부터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질병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끔찍한 박탈 때문에 이렇게 된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과잉되거나 왜곡된 병리적 격정이 허구의 박탈을 들어낸다. 물론 이 상태가 오랫동안 반복되면 윤리적·인격적 차원으로 침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치유가 쉽지 않다.


박탈감과 피해의식, 보상욕구가 질병이 되느냐 여부는 일상이 무너지느냐 여부를 보고 결정한다. 그 차이는 만만치 않으나 질병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은 한 순간이다. 그 아뜩한 순간에서 건져내주는 힘은 지금 옆에 있는 사람과 나누는 공감이며, 함께 삶을 나눈 사람 사이의 기억이다. 남지현 엄마 전옥이 질병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순간을 포착해 건져내준 것은 안산 사는 고려인들의 공감이며 남지현의 친구들의 기억이다. 고려인은 “고려인”이라서 공감한다. 남지현 친구는 “남지현 친구”라서 기억한다. 박탈의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이다. 공감과 기억의 공동체는 경험을 시공으로 엮어 생명 네트워킹 누리를 창조한다.


이런 공감과 기억은 삶을 전체성으로 이끈다. 너와 나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어제와 오늘의 지평이 융해된다. 나만 그렇다, 내가 더 그렇다는 생각에 함몰되지 않는다. 어제가 오늘의 부재를 뜨겁게 채운다. 너무 보고 싶어서 사진조차 차마 볼 수 없었던 엄마 전옥이 딸 남지현의 생일 파티를 연다. 끔찍한 박탈은 끝내 그를 붕괴시키지 못한다. 박탈을 자행한 권력에 맞서 당당하다. 박탈감으로 병든 사람들에게 죽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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