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지난 5년은 낭풀-나무와 풀-을 비롯한 비인간 생명, 그리고 비생명 존재를 공부하고 직접 팡이시질(networking)하기 위한 숲 걷기가 기축이 된 시간이었다; 단순한 자연 복귀 넘어 자연을 살해하고 약탈한 제국주의를 옹골차게 공부해 반제국주의 싸움을 실천하기 위한 수행이자 훈련이었다. 이 커다란 선율을 급히 변주한 날은 9월 13일이었다. 대통령 기자회견을 보고 받은 충격이 그날 내 발길을 돌려버렸다. 이런 날이 오다니···.


 

숲 걷기 계획을 일단 짜지 않고 무너진 마음 추슬러 광화문으로 향한다. 세종로를 떠돈다. 부역 국가 무자각 인간이 배설하는 온갖 공해 속에서 학대받는 낭풀 앞을 서성인다. 종묘로 가서도 들어가지 못하고 담장 밖에 붙박인 낭풀 주위를 기웃거린다. 깊고 고요한 숲은 차마 지금 내가 머물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다. 잿빛 칼라하리 한가운데서 부역 국가 침략을 맨몸으로 받아내는 중인 동지들을 어찌 외면하겠는가.

 

이레 뒤에도 나는 잿빛 칼라하리를 떠돈다. 서울살이가 움튼 삼선동·돈암동 골목길, 그리고 그 언저리 헐벗은 숲에서 고단함을 이고 진 낭풀과 마주한다. 어린 시절 흥천사 가던 산자락 오솔길은 막혔고, 정릉 가던 등성마루 길은 흥천사 조실채에 밀려나 있다. 부역 인간은 숲도 침략하고 숲으로 가는 시원 공간도 침략해, 결국은 숲에 깃들고자 하는 숲-인간까지 침략하고 말았다. 나는 기어이 숲과 길을 스스로 복원해 나아간다.

 

가시에 찔리고 가지에 긁혀서 전우임을 확인하며 60년을 복원해 마침내 어린 시절 뛰놀던 너럭바위에 이른다. 숲과 마을 경계인 이 너럭바위에 앉아 하염없이 내려다보던 잿빛 대도시는 그때와 비교할 수조차 없이 훨씬 더 짙은 잿빛을 뿜어내고 있다. 10대에 동경하던 그곳이 70대에는 전선으로 변해버렸다. 숲 그리움에 잠긴 사람임은 여전하되 제국과 부역 국가 실상을 알아차린 나무-사람이 된 오늘 느끼는 회한은 형언 불가다.

 

두 이레 뒤에도 잿빛 칼라하리를 떠돈다. [광화문 벤치에 주저앉아 질문을 포개간다. 어느 순간 나와 눈길을 주고받던 땅바닥 돌이 자기 문양으로 조형해 낸 표정 변화로 말을 건넨다. “고난받는 존재를···” 예? 다음 순간, 마무리다. “응시하고 증언하라!” 구체 방법은 내 몫이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거리를 걸어서 나아간다. 도처에서 신음과 비명이 들려온다. 그 소리를 사진에 담는다. <도시 나무 비가(悲歌)>가 탄생한다.](인용)

 

세 이레 뒤에도 잿빛 칼라하리를 떠돈다. 종로3가역에서 내려 돈의동, 인사동, 공평동, 종로1가, 세종로, 무교동, 다동을 점·점으로 흐르는 나무 따라 걷는다. 도시 경관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곳곳 또는 구석구석 심어놓은 나무들이 어찌 살아가는지 심은 사람도 보는 사람도 도통 관심 두지 않는 적나라한 현장은 슬프고도 역겹다. 인간 타락은 신에 대한 사건이 아니라 비인간 생명, 무엇보다 낭풀에 대한 사건임을 통렬하게 새긴다.

 

유익 여하 이전에 나무 없이는 인간이 당최 존재할 수조차 없음에도 인간은 스스로 나무에서 떨어져 내렸고 도리어 나무를 열등 생명으로 떨어뜨렸다. 그 과정과 체제를 우리는 제국주의라 부른다. 제국주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존재는 오직 깨달은 부역자뿐이다. 깨달은 부역자는 나무를 응시한다; 증언한다. 증인은 욕되나마 끝까지 살아남아 고난받은/는 위대한 존재를 증언해야 한다. 나는 욕된 삶을 욕되게 오늘도 이어간다. 喝!


 

내 잿빛 칼라하리 순례는 왜 하필 대통령 기자회견 직후였는가? 대통령 기자회견은 전선을 확실하게 이동시킨 선언 또는 선포 사건이다; 싸워야 할 적을 바꾸어버린 도발이다; 정확히 말하면 전선이 넓어지고 적이 늘어났음, 그러니까 ‘나도 적에 포함하라’는, 다시 그러니까 반제 전쟁이 더 어려워졌음을 까발린 자기폭로다. 그는 명백히 기망을 저질렀으며 여전히 그러는 중이다. 하여 나는 저 초원을 떠나 이 칼라하리로 들어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내 이름은 네모


발 한번 쭉 뻗어봤으면


고독사


들러리


묘비명


네 잘못 아니야


형식논리


내가 아직 나무로 보이니


내 몫까지 살아주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 백창욱(목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나는 이 공간에서 한국전쟁 때, 미국이 폭격으로 한반도 전역을 말살했다고 줄기차게 말했다. 미국을 은혜의 나라로 알고 있는 대중에게는 그게 무슨 소리야 하겠지만, 미국이 폭격으로 한국과 조선을 아작낸 것은 명백한 역사사실이다.
근거가 뭐냐고? 여러 증언이 있지만 김태우의 <폭격> 이 책이 압도적이다. 이 책에는 미국이 어떻게 폭격으로 한반도를 유린했는지가 자세히 나온다. 한국 대중들이여, 피 토하는 심정으로 말하노니 미국은 은혜의 나라가 아니고 원수의 나라다.
------------------------------------
김태우 저,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권정생 소설 <점득이네>에 미군의 전투기가 하천부지에 모인 피난나간 한국 민간인들을 기총소사로 몰살하는 내용이 있다. 이 참변으로 주인공 점득이도 부모를 잃고 자신은 시력을 잃고 누나 점례와 함께 거리의 악사로 살아간다. 나는 처음에 이 내용이 소설적 요소를 가미한 줄 알았다.
‘한국인의 자유를 위한 전쟁’을 벌이는 미군이 ‘흰 옷입은 민간인’들을 이처럼 학살하는 범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폭격>을 읽어보니 미군 전투기들이 한반도 영공에서 조선 민중을 일상적으로 학살해 왔음을 확인했다.
이 책은 한국전쟁기 미군의 북폭 전말을 담았다. 조선 전역을 폭격으로 초토화시킨 과정을 기록을 통해 소상히 밝혔다. 그러나 폭격피해자는 조선만이 아니었다. 남하하는 인민군의 이동전선을 따라 유엔군을 지원한다는 목적으로 공중작전에 나선 미군 전투기들은 꽁꽁 숨어서 보이지 않는 인민군 대신 한국의 민간인과 건물들을 적으로 간주하여 그들이 전투기에 가득 싣고 온 폭탄들을 남김없이 터뜨렸다.
정찰기인 모스키토호가 신호를 보내면 폭격기들은 민간인과 마을을 향해 게임하듯이 주저하지 않고 폭격을 퍼부었다. 충북 영동의 노근리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이다.
한국전쟁기 내내 조선에 쏟아 부은 폭격 때문에 가족은 물론 모든 것을 잃은 조선 주민들은 상층부 권력의 반미노선과 무관하게 미국에 대한 증오가 하늘에 솟구쳤다.
예를 들어 평양은 해방 때까지 가장 대표적인 친미공간이었다. 청일전쟁 때 교회로 피신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역사경험은 민중들을 교회로 몰려오게 했고 그 결과 전 조선의 장로교인 80%가 평안도와 황해도에 운집할 정도의 대성장을 이루었다. 평양은 개신교와 미국을 동일시하는 대표적인 친미도시였다.
그러나 한국전쟁기동안 가장 친미적인 도시는 가장 반미적인 도시로 변했다. 조선 사람들은 교회는 미군폭격으로부터 안전할 것이라 믿고 교회로 피신했지만 오히려 교회당의 첨탑은 미군이 폭격하기 좋은 타깃이 됐다. 수많은 폭격몰살 가운데는 이렇게 교회도 예외없이 몰살장소가 돼버렸다.
미 권력층 안에는 한반도 폭격에 대해 대립적인 두 가지 큰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일본폭격 경험이 있는 공군장성들 입장으로, 전쟁 승리를 위해 적의 인구밀집지역 전체를 핵무기나 소이탄으로 불태워 없애버려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반면에 또 다른 주장은 2차 대전 후 유럽에서 활발해진 반전평화주의와 전시 민간인 보호에 대한 인도주의적 관점으로 폭격 시 군사목표만을 정밀폭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미대통령도 합동참모본부도 후자를 지지해서 형식상으로는 군사목표만을 타격한다는 기조가 우세했다.
그러나 정밀폭격도 말뿐이었다. 전혀 정밀하지 않은 레이더로 좌표를 찍어 폭격한다는 것 자체가 적중률이 제로에 가까웠다. 그래서 타격지점에 폭탄을 쏟아 붓는 방식으로, 적을 공격했다. 그 와중에 군사목표가 아닌 민간인, 마을, 민간시설등도 속절없이 폭격으로 폐허가 됐다.
그런데 이 형식적인 기조인 정밀폭격도 1950년 11월 중국군 참전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거의 승리를 눈 앞에 두었다가 중국군에게 연전연패당하는 미군의 맥아더는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조선 전역을 초토화 시키라고 명령했다. 이전의 폭격보다 더 무자비한 화력으로 북한을 타격하라는 지시였다. 그때부터 미군전투기들은 제한없이 소이탄 대량폭격을 자행했다.
참으로 악랄한 것은 조선 주민들이 소이탄 폭격화재를 신속히 진화하지 못하도록 폭탄 속에 시한폭탄을 함께 떨어뜨렸고 또 점득이네 소설처럼 기총소사로 화재진압하러 달려오는 주민들을 살상했다.
또한 맥아더의 초토화 작전명령 이후에는 애초에 폭격대상에서 제외했던 수력발전소와 저수지등도 예외없이 폭격했다. 폭격으로 저수지 댐이 무너져서 홍수가 농토와 마을을 덮치는 사진이 생생하다. 이런 융탄폭격으로 조선 전역에 집이나 건물은 거의 남아나질 못했고 주민들은 토굴 속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폭격으로 죽은 사람 수를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소이탄 융탄폭격은 정전협상을 하는 내내 계속했다. 정전협정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항공압력전략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을 초토화시키는 전략을 몰아 부쳤다. 미군의 폭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김일성은 조기에 정전협정을 맺고 싶었으나 정전협정도 전쟁 치르듯이 협상한 미국과 중국의 입장차이로 시간만 끌었다.
예를 들어 포로협상에서 미국은 자원송환원칙을, 중국은 자동(강제)송환원칙을 고수하느라 협상은 지지부진했고 미군만 조선 영공을 제 집 드나들 듯 폭격놀이를 즐겼다. 이것이 폭격의 전말이다.
우리는 조선 민중들이 인민군 남하 때문에 부득이 피난길에 오른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실상은 미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한 피난이 훨씬 많았다. 그만큼 한국전쟁기 내내 미군의 폭격은 조선민중 숨통을 압박하는 괴물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미군조종사 개개인들의 전혀 소양없는 자질도 민간인 폭격학살을 부추겼다.
이 책 저자는 역작 끝에 이렇게 진단한다. “전쟁의 신은 한반도처럼 갈등하는 지역을 눈여겨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만약 한반도에서 불운의 역사가 재개되어 전쟁이 발발할 경우,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은 또다시 ‘그들만의 전쟁’을 수행할 것이다.
참으로 무거운 심정이다. 미국으로부터 자주와 주권과 독립이 왜 절실한지 이 책 역시 절절히 웅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 백창욱(목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미군정이 우익 세력들을 포섭할 때, 기독교 집단도 포섭 대상이었다. 한국 기독교와 미국은 아삼육 관계였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인들 대개가 미국 기독교를 이식받았기 때문에 정서적으로도 거부감없이 장단이 잘 맞았다.
그렇게 한국 기독교와 미국이 아삼육 관계가 된 것은 구한말 때 부터였다. 미국 입장에서 조선은 황금어장이었다. 황금어장은 선교용어이다. 어부가 다량의 물고기떼를 만나면 대박나는 것처럼, 선교붐이 일어나기 시작한 미국 선교사들에게 조선은 대박 현장이었다.
황금어장답게 선교사들은 조선에 많은 기여를 했다. 기울어져 가는 조선, 급기야 일제에 먹히고 마는 조선에서 유일한 기대처였다. 조선 민중들은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 병원, 교회를 통하여 야소교와 친숙해졌다. 그리고 자연히 선교사들의 고향인 미국도 동경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 미국 선교사들이 얼마나 많았냐면, 한 가지 정책이 증거한다. 1909년 미국 선교사들이 모여서 중대한 결정을 했다. 이른바 ‘선교지 분할정책’이다. 조선의 각 도 별로 미국의 각 교단이 분할 담당하기로 한 것이다.
예를 들자면, 미국 북장로교는 강계, 선천, 평양, 재령, 서울, 청주, 안동, 대구, 등 평안도 황해도와 충청북도 일부 지역과 경상북도 지방을 맡았고, 미국 남장로교는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등 전라도와 대전 부여 등 충청남도 일부와 제주도를, 캐나다장로교는 함경도 지방을, 그리고 호주장로교 선교부는 부산, 진주, 마산, 거창, 통영 등 경남지방을 맡았다.
이 정책에 따라 미국의 각 교단이 중복을 피해서 선교지를 맡은 것이다.
미국 선교사가 얼마나 많았으면 이런 정책을 세울까, 싶다.
미국 선교사들에게 조선행은 선교사의 사명인,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순종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미국 권력에게는 선교사들의 외국행이 선교사들과는 전혀 다른 이유가 존재했다.
그것은 무엇일까? 1880-90년대, 미국은 아메리카 정복이 거의 끝나갈 시점이었다. 원주민 말살로 시작한 정복은 중미, 남미까지 확장했고 탐욕을 다 채웠다. 이제는 새로운 정복지가 필요했다. 그곳은 태평양 건너 아시아였다. 하지만 이미 아시아에서는 미국의 정복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었다. 정복을 순탄하게 하려면 이미지를 순화시켜야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바로 선교였다. 미국 권력 입장에서는 선교사들이 미국의 나쁜 이미지를 세탁해 주는 너무도 반가운 존재였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타국에 나가기 좋게 전폭적으로 협조했다.
예를 들면 지금도 선교사들이 가장 큰 애로를 겪는 게 비자문제다. 일반 여행객 신분이기 때문에 기간이 다 차면, 옆나라 갔다가 다시 들어온다. 그렇게 체류를 연장하는 것이다.
즉 당국이 본국증명서나 여권, 비자 등을 협조해 주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그런데 미국을 세탁해 주는 선교사들이 아시아로 가는 일을 막을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증명서는 극히 한 예일 뿐이다. 얼마나 많은 이해관계가 얼키고설켜 있겠는가.
조선에 미국선교사들이 득시글거릴 수 있었던 데는 미국 권력의 깊은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선교사들도 그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분야가 다르니 그냥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을 뿐이다. 그리고 헐버트 선교사같은 극소수의 선교사 빼고는 미국 선교사 대개는 미국 권력의 의도에 협조하면서 선교했다. 조선 입장에서는 미국 선교사들이 백프로 고마운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결국 미국의 속셈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1905년 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고종을 보기 좋게 배신했다. 일제의 침략에 방패막으로 미국을 의지했던 고종은 그래서 미국에게 여러 가지 알짜배기 사업권을 줬던 고종은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았다. 어떡하든 국제사회에 조선의 처지를 알리고자 했던 고종특사 헐버트 선교사도 조국의 배신에 치를 떨었다.
미국선교사들은 이렇게 일치감치 조선에 깃발을 꽂을 수 있었다. 조선 교회에 대한 독점적 지위는 일제 강점기 내내 계속됐다. 교회 안에 조선인의 자생적인 모임이 생기면 선교사들은 저주까지 퍼부으면서 자신들의 지위를 고수했다. 그렇다고 자생적인 모임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선교사들의 추악한 면모만 드러날 뿐이었다. 그렇게 미국권력과 같은 모양인 것을 스스로 증명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흐름이 8.15 후 미군정 시기에 한국을 지배하기 위해 검은머리 미국인들을 포섭하는 단계까지 온 것이다. 이게 8.15 후 한국기독교의 모습이다. 미국의 시다바리 역할로 내전과 전쟁, 조국 분단에 가담한, 자랑스럽지 못한 부역의 역사다. 그 치부를 가리기 위해 더 반공에 광분한다.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그러므로 한국 기독교가 제대로 서려면, 미국과 얽힌 관계부터 청산해야 한다. 한국기독교 현실과 동떨어진 말인가. 그렇더라도 한국이 자주독립하려면 미국과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듯이, 한국 기독교도 과거를 청산하고자 하면 반드시 이 길을 거쳐야 한다. 진실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