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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제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에서 연합군 승리를 기념하는 날은 5월 8일과 5월 9일 양일로 되어 있다. 나치독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것을 유럽국가들이 기념하는 날은 5월 8일로 ‘유럽 승리의 날(Victory in Europe Day)’이 공식 명칭이다. 반면에 러시아는 5월 9일을 ‘승리의 날(Victory Day)’로 기념한다. 러시아와 유럽의 승전일이 서로 다른 것은 독일의 항복 조인식이 두 차례 일어난 결과다. 첫 번째 조인식은 1945년 5월 7일 연합군 사령부가 있던 프랑스 랭스에서 거행되었고, 거기서 작성된 항복 문서의 발효 시각이 5월 8일 오후 11시였던 것에 따라 유럽에서는 그 날이 ‘유럽 승리의 날’이 되었다. 러시아 승리의 날이 5월 9일로 된 것은 세계대전에서 자국의 엄청난 희생과 위업을 내세운 스탈린의 요구로 베를린에서 격식을 더 갖춰 다시 열린 조인식에서 명시된 항복 발효 시각이 5월 8일 오후 11시 1분이었고 이 시각이 모스크바에서는 5월 9일 0시 1분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9일 러시아는 ‘대조국전쟁’—러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했다. 올해 행사는 80주년을 기념한 것인 만큼 의의가 커서 러시아로서는 행사 준비를 위해 각별한 신경을 썼던 모양이다. 외국에서 27개국 국가수반과 10개 국제기구 수장이 참석했다 하니 대규모 국제적 행사로 치렀음이 분명하다. 현재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지라 승리의 날 행사를 가능한 한 성대하게 치름으로써 자국의 위용을 널리 과시하려 한 의도도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번 행사를 치르는 과정에서 러시아는 적잖은 사보타주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같은 유라시아 대륙에 속한 유럽국가들의 방해 공작이 만만치 않았다. 그것은 최근에 우크라이나전쟁을 두고 유럽국가들과 러시아 사이에 심각한 지정학적 갈등이 빚어져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럽의 27개국이 가입해 있는 유럽연합 집행부가 러시아 승리의 날 행사를 놓고 드러낸 시선과 행동은 도를 넘어도 한참 넘는 것이었다. 올해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유럽국가들의 수가 거의 전무였던 것은 참석하는 회원국에는 불이익을 주겠다고 한 유럽연합 집행부의 협박 때문인 점이 적지 않다.

현재 유럽국가들 가운데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는 나라는 헝가리와 세르비아, 슬로바키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헝가리의 대통령 오르반 빅토르는 유럽국가 수반들 가운데 친러시아 행보와 발언을 가장 적극적으로 해온 편이지만, 이번 승리의 날 행사에는 초대받고도 참석을 거부—사양?—한 것으로 알려진다. 거기에는 역사적 이유가 있다. 헝가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 아니라 추축국에 속했던 나라다. 일부 언론은 오르반이 모스크바에 가지 않은 이유를 러시아의 승리는 헝가리에는 “쓰라린 패배”라는 데서 찾기도 했다. 반면에 세르비아 대통령 알렉산다르 부치치와 슬로바키아 총리 로베르트 피초는 5월 9일 행사에 기어이 참석하는 태도를 보였다. ‘기어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그들의 모스크바행에 대한 유럽연합의 견제가 너무나 집요했기 때문이다. 부치치의 경우는 미국 방문 중이던 5월 2일 심박 정지로 의심되는 건강 이상으로 급히 귀국한 상황에서도 러시아행을 포기하지 않았다.

피초와 부치치가 끝내 승리의 날 행사에 참석하려 하자 유럽연합 측이 보인 행각은 가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소련에 속했으나 지금은 유럽연합과 나토에 가입해 있는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의 경우 부치치가 탑승한 비행기의 자국 영공 통과를 허가하지 않았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는 피초가 탄 비행기의 영공 통과를 허용하지 않는 상식 밖의 태도를 드러낸 것이다. 유럽연합 회원국 가운데 승리의 날 행사에 유일하게 참석한 슬로바키아의 피초 총리의 모스크바행도 쉽지 않았다(세르비아는 아직 유럽연합 회원국이 아니고 가입 신청국이다). 그는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 이어 나중에는 에스토니아까지 자국 영공을 봉쇄한 바람에 가까운 모스크바로 가기 위해 터키와 지중해, 대서양을 지나는 긴 우회로를 거쳐야만 했다. 발트 3국(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과 폴란드의 행보는 에스토니아 총리 출신의 유럽연합 집행위 부위원장 겸 외교·안보 정책 고위 대표 카야 칼라스가 승리의 날 모스크바 행사에 참석하면 불이익을 각오하라고 세르비아와 슬로바키아에 위협해온 것과 궤를 함께한다.

러시아 승리의 날 행사를 두고 드러낸 유럽국가들의 태도는 ‘역사 지우기’ 또는 ‘역사 용도 변경’의 전형적 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라시아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은 반인륜적이고 반문명적인 인종주의 범죄를 자행한 파시즘 세력을 패퇴시키기 위해 힘을 합쳤고, 승리를 거두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함께 치른 바 있다. 당시 가장 큰 피해를 받은 나라는 소련으로, 군인 870만 명, 민간인 1,900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지금 유럽연합 국가들을 보면 프랑스나 영국까지도 과거 소련과 연합을 이뤄 파시즘을 패퇴시킨 역사적 사실은 외면하고 오히려 과거 나치 독일 중심의 추축국 후예의 행태를 보이는 모양새다.

며칠 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자신이 설립한 소셜미디어인 트루스소셜에 이상한 거짓말을 써서 올렸다. “많은 우리 동맹과 우방이 5월 8일을 승리의 날로 기념하고 있지만, 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거둔 데는 우리[미국]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 훨씬 더 많은 몫을 했다.” 당시 미국이 적잖은 희생자를 낸 것은 사실이다. 미군은 전투 중 사망 29만2천 명, 비전투 사망 11만3천 명으로 모두 40만5천 명 정도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그것은 소련의 전체 사망자 2,700만 명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가장 큰 역할을 했노라고 허풍을 떨고 있다. 트럼프의 허세는 세계대전을 포함한 세계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미국 또는 유럽 중심적 이해를 조장하는 데 앞장선 할리우드 영화나 주류 매체 등에서는 진실로 통할지 몰라도 역사적 사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미국과 유럽의 역사 왜곡, 회원국의 러시아행을 막고 나선 유럽연합 집행위의 방해 공작, 발트 3국과 폴란드 등의 영공 폐쇄 등에도 불구하고 올해 승리의 날 행사에는 실로 많은 나라의 대표가 참석했다. 어렵사리 모스크바에 간 부치치 대통령과 피초 총리 외에 중국 주석 시진핑, 브라질 대통령 룰라 다 시우바, 베네수엘라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 쿠바 대통령 미겔 디아스카넬, 베트남 공산당 총비서 또럼, 벨라루스 대통령 알렉산더 루카셴코, 이집트 대통령 압델 파타 앨 시시, 에티오피아 대통령 테이 아스케슬라시, 팔레스타인 대통령 마무드 아바스 등 많은 국가수반이 모스크바를 찾은 것이다. 이들 외에도 아프리카의 콩고공화국, 적도 기니, 기니-비소, 짐바브웨와 아시아의 미얀마, 그리고 과거 소련에 속했다가 1990년대 초에 독립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압하지야, 투르크메니스탄, 남오세티야, 아르메니아 등의 국가수반도 참석했다. 원래 참석할 예정이던 인도 총리 모디는 최근에 국경 테러 문제로 파키스탄과 군사적 갈등이 빚어져서, 라오스 대통령 통룬 시술리트는 코로나19에 감염된 관계로 오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과거 소련과 연합하여 대 나치 전선을 구축해 싸운 유럽국가들, 나치 독일과 함께 추축국이 되어 유럽 대륙을 유린한 유럽국가들은 절대다수가 외면했어도,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상당히 많은 나라의 수반이 제2차 세계대전 전승절 80주년 기념행사 참석을 위해 모스크바를 찾은 셈이다(아래 사진을 보면 기념식 행사에 참석한 외국 수반들과 국제기구 수장들 30여 명이 도열해 있다).

올해 승리의 날 행사를 다룬 워싱턴포스트 5월 9일 자 기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과 유럽의 동맹은 허물어지고 키예프 군대는 러시아가 원하는 대로 전쟁을 끝낼 협상을 하라는 압박을 받는 가운데, 푸틴은 승리의 날 선전 공세를 통해 우크라이나를 물리칠 자신감에 찬 글로벌 지도자로 자신을 내세우고 있다.” 세계 27개국 수반과 10개 국제기구 수장이 참석한 기념행사가 러시아와 푸틴에게 선전 공세가 될 수 있으리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5월 9일의 행사를 푸틴의 선전 공세로만 보는 것은, 워싱턴포스트 같은 미국의 유력지, 그런 주류언론을 통해 자신들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펼치는 미국의 정치계급, 나아가서 서방의 지배 블록이 승리의 날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얼마나 잊고 싶어 하고 왜곡하려는지 잘 보여준다.

러시아가 국경일로 기념하는 승리의 날이 지닌 의의를 서방 국가들이 깎아내리는 것은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겪고 바친 희생과 공헌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일만이 아니다. 그것은 당시 2,700만 명이나 목숨을 바치고 소련 인민이 싸운 대상이 인류의 적인 파시즘 세력이었음을 부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과거 추축국에 속했던 독일과 이탈리아, 핀란드,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스페인 등은 물론이고 소련과 함께 연합 전선을 구축했던 영국과 프랑스까지도 승리의 날 기념을 거부한 것은 이제 유럽 거의 전체가 과거 나치 세력이 저지른 죄악과 그에 대한 단죄 전쟁의 정의로움을 되새기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드러낸 것이나 진배없다고 봐야 한다.

유럽국가들의 최근 행태는 20세기 초 파시즘의 준동을 자유주의가 지원하던 것과 흡사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영국과 프랑스 등 자유주의 진영은 소련과 중국의 사회주의 세력과 힘을 합쳐 파시즘 세력의 물리치는 데 적잖이 이바지했다. 그런 역사는 자유주의는 파시즘과 적대적 관계일 것임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렇게만 볼 수 없다. 나치 독일이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된 데는 서방 자유주의 세력의 협력이 큰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독일 군수산업은 제너럴모터스, 포드, 제너럴 일렉트릭, 스탠더드 오일 등 미국의 대기업과 JP 모건과 같은 월스트리트 은행의 자본 투자를 통해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우는 나치 독일과 힘을 합쳐 세계를 지배할 음모까지 꾸몄다고 한다.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등 나치 독일의 팽창주의가 노골화한 가운데서도 영국은 독일과 “기업 간 세계 경제 파트너십”을 구축하려 했다는 것이다. 영국은 나치 독일과 정치적 협력을 도모하기 위해 외교적 교섭을 벌이기도 했다. (1930년대 말 영국과 독일의 협력 추진 관련은 Kit Klarenberg, “The Anglo-Nazi Global Empire That Almost Was,” Substack, 2025.5.4 참조)

러시아의 승리의 날 기념행사를 놓고 오늘날 유럽국가들의 보인 태도를 보면, 과거 미국의 자본, 영국의 국가가 나치즘에 대해 보인 호의가 저절로 연상된다. 사실 지금 미국과 유럽, 그리고 집단서방은 신나치 세력이 집권한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끝까지 지원하려는 모양새이고 러시아에 대해서는 최근에 미국은 약간의 태도 변화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극히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적대적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주된 가치로 내세우는 자유주의 세력임을 자처하는 서방, 특히 유럽국가들이 파시즘과의 연대라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상황을 그대로 연출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사실 자유주의는 파시즘과 적대적이라 하기 어렵다. 파시즘은 자유주의가 궁지에 몰릴 때, 다시 말해 자유주의를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삼는 자본주의가 축적의 위기에 내몰릴 때 곧잘 추종하는 이데올로기다. 말하자면 그것은 자유주의의 타락한 형태인 셈인 것이다. 자유주의와 파시즘은 그래서 동색인 셈이고, 사회주의를 공동의 적으로 삼는다. 서방 자유주의 세력은 자신의 변형인 파시즘의 폭력이 극단에 치달아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과 협력해서 파시즘을 패퇴시켰으나, 대전이 종료되자마자 사회주의를 적으로 돌리고 파시즘 세력은 두호해왔다. 2023년 9월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가 방문했을 때 캐나다의 지배 블록이 과거 악명높은 나치 SS 부대원인 98세의 야로슬라브 훈카를 의회에 초대해 기립박수를 봉헌한 사건은 영국과 미국 등이 나치 포로들을 처벌하는 대신 캐나다로 이민시키는 ‘배려’가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 신나치 세력이 집권한 것도 미국과 영국이 나치의 잔존세력을 대공 전선 투입을 위해 온존함으로써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 승리의 날 행사에 대한 세계 여러 나라의 태도를 보면 한편으로는 서방 자유주의 세력의 타락과 파시즘으로의 전환이 눈에 띈다.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서방은 지금 파시즘을 옹호하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모양새다. 신나치 세력이 집권한 우크라이나를 일방적으로 지원하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협상을 통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오히려 막고 있다. 유럽국가들의 친 파시즘 행보는 팔레스타인의 가자지역에서 인종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시온주의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지지하는 것으로도 드러난다.

하지만 서방의 그런 태도는 글로벌 여론의 지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이번 러시아 행사에 비유럽 국가의 수반 다수가 참석한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참석국 다수가 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와 콩고공화국, 짐바브웨, 라틴아메리카의 베네수엘라와 쿠바 등 글로벌 남반구 국가라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이것은 세계체계를 장악해온 서방의 힘이 이전과 같지 않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서방의 자유주의 세력이 최근에 보이는 파시즘으로의 선회는 자유주의 헤게모니가 붕괴하는 징조로 보인다. 자유주의가 자본주의의 지배 이데올로기임을 고려하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징표라 할 수도 있다. 단, 헤게모니의 붕괴는 바로 새로운 질서의 확립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심한 혼란과 폭력을 동반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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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놈 제국한테 멸문지화를 당했지만, 집안 어른들은 성씨 자부심이 강해 여러 경로를 통해 어린 시절 내게 그런 서사를 전해주곤 했다. 청소년기 한동안 거기 심취했던 기억이 새롭다. 진주강씨는 대성(大姓) 가운데 유일하게 고구려계다. 시조인 강이식 장군 고구려부터 고려로 이어지면서 무가(武家)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 그 대표 인물이 다름 아닌 인헌공 강감찬 장군이다. 그래서 강감찬 장군은 내 기억 지성소에 오래 굳게 머물러온 영웅이다.

 

비록 무지렁이 부역자에 지나지 않으나 내가 나라 걱정할 때 걷곤 하는 길이 바로 강감찬길이다. 집에서 나와 대부분 숲길을 걸어 낙성대-강감찬 생가터-로 간다. 묵념·기원을 올린 다음 안국사-친일 매국노 박정희가 지은 강감찬 사당- 경내 낙성대 삼층 석탑으로 향한다. 석탑 꼭대기 장식 부위는 왜놈이 훼손해 사라지고 없다. 게다가 박정희가 본디 낙성대에서 멋대로 여기다 옮겨놓았다. 아픈 역사를 되새긴 다음 돌아 나와 관악산으로 향한다.

 

낙성대에서 출발해 큰 산줄기 타고 관악 올라가는 첫 숲에다 나는 강감찬숲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린 강감찬이 우뚝 솟은 관악을 바라보며 영웅 기상을 키워갔을 그 숲을 천천히 걷는다; 앉아서 잔잔히 생각에 잠긴다; 풀과 나무, 그리고 버섯을 살피며 나아간다. 얼마 뒤에 곧장 올라가면 관악 큰 봉우리고 오른쪽으로 틀면 완만히 돌아 내려와 다시 낙성대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 길을 따라 낙성대 건너편 또 다른 길에 가 닿기로 한다.

 

그 또 다른 길은 이순신길이다. 소년 이순신이 한양서 내려와 배를 타고 노량진에 닿은 다음 살피재 넘고 봉천천 건너 선영-여기를 나는 이순신숲이라 부른다-에 이르러 제사 올리는 광경을 상상한다; 묘역에서 내려다보이는 건너편 삼층 석탑이 인헌공 강감찬 장군을 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안 소년 이순신은 돌아가는 길 낙성대에 들른다; 구국 영웅 기상을 품어 키운다. 두 영웅이 걸었던 길을 이어 걸으며 나는 자주·민주를 빌어마지않는다.


충부공 이순신 5대조 정정공 이 변 부부 묘-낙성대 맞은편 나지막한 산에 있다

 

요즘처럼 나라가 요동할 때는 내 삶도 따라 요동한다. 숲으로 들어가는 발길은 인간사를 끌고 들어갈 수밖에 도리가 없다; 도시 골목으로 나오는 발길은 숲 생기를 안고 나올 수밖에 도리가 없다. 아프고 슬프다. 얼마만큼만이라도 성공 거둔 사람은 주파수 높은 소리를 내지만 내가 쓰는 글 쪼가리는 자루 뒤집어쓰고 눈 부라리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그래서 그런 글 쪼가리라도 증언으로 남기기 위해 강감찬길에서 이순신길까지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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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버러지 준동에 이어 국짐 쌍·권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당내 민주주의 탈을 쓴 조직력으로 김문수가 살아나긴 했으나 다시 문제는 이제부터다. 여전히 내란은 진행 중이다. 바람 불고 비 오는 광장으로 나는 간다. 연속 스물네 번째 발길이다. 장기전이 불가피해 보인다.

 

미도산 허리께에서 들리는 외침 소리가 심상치 않다. 악에 받친 한 사람 소리가 계속 반복해서 들려온다. 그리고 듬성듬성 태극기를 손에 들거나 어깨에 두른 사람이 숲길을 지나간다. 아니나 다를까, 촛불행동 집회 장소에 숭미·모일 매판 떼거지가 우글거린다. ‘우리 편은 어딨지?

 

까만 백 팩에 커다란 노란 리본을 매단 채 나는 그들을 가로질러 서초역 쪽으로 내려간다. 왜 공지가 없지? 스마트폰 열어보니 황급히 장소 변경한 흔적이 뜬다. 대법원 앞이라는 상징성을 빼앗으려 저 성조기 부대가 경찰과 짠 듯하다. ‘우리 편은 사랑의교회 앞으로 쫓겨났다.


 

하기는 사랑의교회 앞도 나쁘지 않다. 사랑의교회나 사랑제일교회나 큰 차이가 없을 테니 말이다: 사랑제일교회나 대법원이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으니 말이다. 개신교 판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대법관 호명할 때 덧붙일 후렴 인명 더 생겨서 신명 아연 비상한다.

 

비바람 맞으며 있다가 조금 먼저 나온다. 찬 빗물이 모자와 옷을 뚫고 살갗에 닿기 시작해서다. 저녁을 먹으려 식당으로 들어간다. 20대 젊은이 넷이 술을 마시면서 시종일관 나누는 이야기는 스포츠 스타와 연예인 미셀러니다. 나이 든 저들 손에 들린 성조기가 환상으로 나타난다.

 

강하게 머리를 젓는다: 설마. 설마가 얼마나 편안하게 우리 뒤통수를 후려쳐 왔던가. 인간이라면 차마 해서는 안 될 짓을 언제 어떻게 벌여도 죽기 살기 지지하는 극우가 국민 1/3 이상인 해괴한 나라에서 설마를 또 입에 올릴 수 없다. 소걸음이더라도 범 눈을 뜨고 나아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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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경근(청주지방법원 판사) 님 글을 전재한다 



“대법원이 선거판에 뛰어들었다. 대법관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재판을 통해 정치를 한다.” 등의 국민적 비판이 온라인, 오프라인 할 것 없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DJ 정치자금 수사와 같이 선거철이 되면 진행 중이던 수사나 재판도 오해를 피하기 위해 중단했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사법 불신사태를 누가 왜 일으키고 있는지, 사상 초유의 이례적이고 무리한 절차진행이 가져온 이 사태를 과연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선거 후 사법부가 입을 타격이 수습 가능할 것인지 그저 걱정될 뿐입니다.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 고쳐 매지 말고, 오이 밭에서 신발 고쳐 신지 말라.”, “결론과 절차가 공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공정해 보여야 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99명의 범죄자를 놓치더라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면 안 된다.”

법관생활 30여년 동안 참 많이 들어본 말입니다. 워낙 자질이 부족한 저로서는 이를 제대로 지키며 살지 못했지만, 대법원에 계신 ‘저스티스’들께서는 적어도 저보다는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믿고 그 판결을 존중하였습니다.

6만 쪽이 넘는다는 방대한 기록을 이례적으로 항소심 선고 후 불과 2일 만에 정리하여 대법원으로 송부하고, 피고인의 답변서가 제출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날인 4. 22. 소부 배당 후 즉시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고, 당일 오후 1차 합의기일을 갖고, 이틀 후인 4. 24일 2차 합의기일을 갖은 후 1주일 후인 5. 1. 판결을 선고하였습니다. 30여년 동안 법관으로 근무하면서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초고속 절차 진행이더군요.

1, 2심이 정반대의 판결을 선고하였고, 대법관들 사이에서도 찬반이 갈리는 사안을 말입니다. 게다가 보도되는 판결이유를 살펴보니 사실관계 확정이 결론을 좌우할 수 있는 사안이라 사건기록도 열심히 보아야 했을 사건이더군요. 1, 2심의 결론이 다르고 그 심리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그만큼 사실관계 확정 및 법리 적용이 쉽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 아닌지요.

하기야 6만 쪽 정도는 한 나절이면 통독하여 즉시 결론을 내릴 수 있고, 피고인의 마음 속 구석구석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관심법까지, 그야말로 신통방통하고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지신 훌륭한 분들만 모이셨을 것이니... 아무 일도 아닌 것을 우둔한 제 기준에만 맞춘 기우인가 봅니다.

대법원이 대선을 불과 한 달 남짓 남겨둔 상황에서 이렇게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이재명 대표의 사건을 심리할 때부터 저는 “대법원이 왜 정치를 한다는 국민적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저런 무리한 행동을 할까”라고 의아해 했습니다. 이번 사건의 주심대법관이 불과 몇 개월 전 유사한 사건에서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렸고, 항소심판결이 무죄 선고의 법리적 근거로 삼은 판결이 바로 위 판결이며, 파기환송 하더라도 절차와 시간상 대선 전에 확정판결이 사실상 불가능한 사안이므로, 상고기각을 하려나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경우 “이재명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날개 달아준 후 덕 보려고 한다”는 오해를 받게 될 것이고, 설령 파기환송을 하더라도 “어떻게든 선거에 영향을 주어 이재명 후보를 떨어뜨리려고 한다”는 오해를 받게 됨으로써, 어느 쪽으로 결론을 내리든 “대법원이 선거에 개입하고 정치행위를 했다”는 국민적 비판에 직면할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대법원판결의 배경을 설명하는 보도자료, 차라리 내지 않은 것만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느닷없이 적절한 비교대상도 아닌 미국의 부시-고어 재검표 판결을 끌어오질 않나, 1, 2심의 결론이 달리나온 것을 두고 “혼란과 사법불신의 강도가 유례 없어 신속한 절차진행이 필요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다수의 평범하고 선량한 유권자들이 정말 그렇게 인식하고 있던가요. 보도자료를 작성한 분은 평소 누구를 만나고 어떤 언론매체를 보고 들은 것인지요.

12. 3. 친위쿠데타 세력들은, 권력의 실정과 전횡을 비판․견제하는 야당과의 반목 상황을 들어 “국가적․사회적 혼란과 대립 양상이 극에 달해 군을 동원한 질서 유지가 필요했다”고 했었지요. 저는 그날 밤 비상계엄 발령 사실조차 모른 채 재판부 구성원들과 함께 술을 꽤 마시고도 늦은 시간 아주 안전하게 귀가했습니다.

민사사건이 아닌 형사사건, 그것도 과실범이 아닌 고의범 사건에서, 피고인이 어떤 사실을 말 한 적이 없거나(골프 발언) 자신이 느낀 대로 또는 이를 과장해서 말했더라도(국토부의 협박 발언) “당시 상황과 발언의 전체적 맥락을 토대로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이해되는지 살펴야 한다”는 이른바 ‘유권자의 관점’을 내세워 ‘구체적인 허위사실을 공표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이 경우 피고인은 당시 압박을 느껴 협박이라고 말했더라도, 법원이 사후에 유권자의 시각에서 판단한 결과 협박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다면 고의범인 허위사실 공표죄가 성립되는 것이지요.)라는 의문이 들기는 하나, “기록도 보지 못한 사람이 뭘 알고 그런 말을 하냐”고 할 것 같아 굳이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제 마음 속으로 “언어의 내적 의미가 아닌 사용맥락을 중요시한 천재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무덤에서 깜짝 놀라 뛰쳐나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해봅니다.

그동안 우리 사법부의 행정책임자들이 위헌․불법적인 비상계엄 사태 때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상황이 너무나 엄중한지라 사법부를 위해 참았습니다. 그 직후 열린 전국법원장회의에서 그에 관한 질의나 문제 제기조차 전혀 없었다는 것에 크게 실망했지만 그래도 참았습니다. 과거 사법행정권 남용행위 등에 적극 가담하거나 방조하고 수구 언론들과 소통하면서 그 청산 노력을 방해하던 사람들이 대법원, 법원행정처, 각급 법원의 책임자로 복귀하는 것을 보면서도, 인사권자는 대법원장이고 종전의 실수를 거울삼아 더 잘할 수도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사법부의 발전을 기원했습니다.

그런데 종전에 사법행정권 남용, 권력과의 거래 의혹 등에 문제를 제기하던 법관들에게 ‘정치판사’, ‘이념 편향적 판사’라고 그렇게도 비판하던 분들, 지금은 왜 이리 조용하신가요. 과연 무엇이 법원을 해치는 행위인지요. 법을 전공하고 그것으로 엘리트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이 군을 동원해 친위쿠데타를 일으키고, 이러한 세력들을 말도 안 되는 궤변과 허위사실로 변호함으로써 법정을 희화화하는 일이 아무 것도 아닌 듯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그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가 가진 재판권은 공부 잘 하고 시험 잘 보았다고 받은 포상이 아닙니다. 권력자가 준 것도, 변호사가 준 것도 아닙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이 세상에 잘 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 중에 ‘공부’ 그것도 ‘법률공부’ 하나 잘 해서 법관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이 사회와 사람들에 대한 공감능력, 인문학적 소양, 공직자로서의 자세 등 법률지식 못지 않게, 아니 그 보다 더 중요한 시민적 소양은 검증된 바 없습니다. 평범한 국민들 중에는 위와 같은 능력에 있어 우리 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만 모를 뿐입니다. 국민은 그저 지배대상이, 재판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를 임명한 주인입니다. 결국 국민을 이기는 권력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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