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혜원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오늘날 전 세계 가톨릭 신자 중 약 5분의 1은 아프리카에 거주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대륙의 가톨릭 인구는 1960년대 이후 무려 여섯 배 이상 증가했다. 특히 콩고민주공화국, 나이지리아, 케냐와 같은 나라들은 사제와 수도자를 가장 빠르게 배출하는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유럽에서 신앙의 동력이 점점 쇠퇴하고 있는 현실과 대조적으로, 아프리카는 가톨릭의 ‘미래’로 불릴 만큼 활력을 지닌 공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대륙을 자주 방문하고, 단순한 목회적 차원을 넘어 교회의 존재론적 중심이 남반구로 이동하고 있음을 반복해서 강조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에게 아프리카는 ‘돕는 대상’이 아니라, 가톨릭이 다시 태어나고 있는 장소, 곧 교회가 새롭게 자기를 성찰하고 재정의할 수 있는 실존적 경계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소식은 그가 남긴 깊은 도덕적 유산을 되새기게 만들었다. 많은 매체들은 그가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 보여준 ‘연민’과 ‘애정’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흔한 프레임을 잠시 멈추고 물어야 한다. 그가 진정 남긴 것은 제국의 해체 이후, 남겨진 기억의 폐허 위에서 신학적 존재가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지를 묻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교황은 한 국가의 수장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제국 그 자체였던 가톨릭 교회의 수장이었다. 로마 교황청은 유럽 제국주의의 내면적 윤리를 구성하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식민지화에 정당성을 부여했던 조직이었다. 16세기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선교사들의 ‘영혼을 위한 사역’은 곧바로 토지의 약탈과 노동 착취로 이어졌고, 그 구조는 깊은 침묵 속에서 세계의 기억으로부터 지워져갔다. 그렇기에 오늘날 ‘교황’이라는 존재가 아프리카 대륙의 상처받은 기억과 마주선다는 것은 단순한 정치적 제스처를 넘어선다. 그것은 제국이 자신을 신처럼 내세웠던 질서를 낮추고, 그 질서가 남긴 상처 앞에 마침내 무릎을 꿇는 순간일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이 나라의 피를 빨아먹은 외부 세력들”을 지목하며, 단순한 평화 담론이 아닌 역사적 고발을 택했다. 이는 정치 지도자들이 대부분 피하려 드는 “누가 피해자인가, 누가 가해자인가”의 도식을 적시한 행위였다. 이 발언은 결코 가벼운 수사가 아니다. 가해의 구조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고, 국제 자본과 광산 경제는 오늘도 제국의 경제적 심장을 다시 뛰게 하고 있다. 교황의 그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닌 기억의 재정치화였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사과하지 않았다. 그는 공식적인 국가 수장이 아니며, 교황청은 콩고를 식민 지배한 벨기에도 아니다. 그리고 그 침묵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깊은 윤리적 힘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잘못을 고백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공동의 기도를 위해 자리를 비우는 자로서,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개입이었다.
우리는 흔히 정치의 언어로 사과와 용서를 정의한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의 침묵은 정치적 침묵이 아니었다. 그는 사과의 주체가 되기를 자처하지 않았고, 대신 경청의 존재론을 선택했다. 이 세계에서 피해자의 말이 살아남으려면, 누군가는 말하기를 멈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제국의 계승자로서 권위를 잇되, 그것을 기도와 경청의 방식으로 전복시켰다. 프란치스코는 제국의 잔해 위에 다시 제국을 세우지 않았다. 그는 폐허 위에 머물렀고, ‘폐허 위에 있다는 감각’ 그 자체를 교회의 윤리로 되살렸다.
그의 마지막 발걸음은 지도자의 행보가 아니라 순례자의 길이었다. 제국이 남긴 기억의 조각들 사이를 걸으며, 그는 다시금 교회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아마도 그는 아프리카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제국이 망가뜨린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고, 그 안에서 함께 고통을 견뎌낸 이들과 눈을 마주쳤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를 “아프리카를 사랑한 교황”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아프리카가 잊히지 않도록 기억을 지켰던 자, 그리고 그 기억 앞에서 제국이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대신 침묵했던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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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일이송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그 포도를 먹지 마시오", "그 급식을 먹지 마시오"
내일은 지구의 날. 그런데 애초에 1970년 처음 열린 지구의 날 행사는 백인 중산층 중심으로 설계된 환경운동이었다. 여기엔 환경정의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가장 환경오염에 시달리는 노동자와 유색인종이 말하는 환경 이야기 말이다.
1962년 세상에 나온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현대 환경운동의 경전과도 같다. 살충제 오염을 경고해 세상을 놀라게 하고 경각심을 불어넣었다. 개인적으로도 레이첼 카슨을 존경한다. 하지만 환경정의를 이야기하는 <침묵의 봄>에도 정작 살충제 오염에 시달리는 농장 노동자 이야기는 별반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백인 중산층 중심의 환경사는 1960년대 필리핀과 라틴계 농장 노동자들이 살충제와 환경오염에 대해 어떻게 치열하게 싸우며 환경정의를 일궜는지에 대해서도 거의 조명하지 않는다. 1940년대와 50년대 오염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환경정의를 외치고 싸웠던 사실에 대해서도.
1965년 미국의 유색인종 농장 노동자들이 포도 파업을 일으켰다. 미국 최초로 불매운동(보이콧)을 노동쟁의의 중요수단으로 채택한 파업이다. 필리핀계와 라틴계로 구성된 '전국농장노동자협회'이 주도했다.
이 조직의 리더는 세자르 차베스 César Chávez. 미국 환경운동사가 간과했지만, 이 농장 노동자는 미국 최초의 환경운동가 중 한 명이다. 또 환경정의를 거의 처음으로, 그리고 압도적으로 웅변한 존재다. 간디를 존경했던 그는 미국의 농장 노동자를 이끌며 비폭력 투쟁, 그리고 불매운동을 노동쟁의에 효과적으로 접목시켰고, 오늘날에도 미국 이주 노동자들의 전설로 남아 있다.
1965년에서 1970년까지 펼친 '포도 파업'이야말로 미국인들 머리에 환경정의를 각인시킨 최초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파업은 그 동안 누적되었던 저임금과 차별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지만, 환경정의에 대한 요청이기도 했다.
"이 포도를 먹지 마시오"
전국에 걸쳐 포도를 먹지 말라는 불매운동이 펼쳐졌다. 전단지가 사방에 뿌려지고 사람들이 점차 포도 불매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 포도에는 독성 살충제가 잔뜩 살포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농장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살충제에 중독돼 있었다. 또 농장 노동자들의 거주지는 '암 마을'이라고 불리워질 정도였다.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
포도 파업은 간단한 방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신의 입에 들어가는 포도에 농약에 잔뜩 묻어 있어요. 또 농장에서 일하는 우리도 농약에 절어 있어요. 우리의 노동 환경이 위험하면 사람들의 건강도 위험해집니다. 그러니 이 포도를 먹지 마세요."
몇 년의 불매운동 끝에 포도 파업이 승리했다. 1970년 농장주들은 근로계약서를 갱신했고, 살충제를 덜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물론 세자르 차베스의 투쟁은 계속됐다. 감옥을 들락거리면서 80년대 후반까지 끊임없이 노동 환경 개선과 살충제 투쟁을 전개했다.
엊그제 민주노총 대전본부 강의에서 세자르 차베스와 포도 파업 이야기를 잠깐 전했다. 환경정의가 어느 지식인의 책상머리에서 뚝딱 나온 게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길어올렸다는 점, 중산층의 환경운동과 달리 환경정의에 기반한 빈자들의 환경운동의 시작점에는 노동자들의 실존적 투쟁의 역사가 각인돼 있다는 이야기들.
강의가 끝나고 잠깐의 뒷풀이에서 한 간부가 조심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하신다.
"오늘 환경정의에 대해 듣고 보니, 최근에 파업한 급식 노동자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될 것 같아요. 급식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이 열악하면 결국 그게 고스란히 아이들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치는 거잖아요."
당연한 이야기, 당연한 방정식이다. 아이들 굶는 게 걱정스러운 부모들 마음이야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급식 노동자의 노동 환경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모두가 알다시피 급식 노동자는 조리 과정에서 각종 유해물질에 노출된다. 세계보건기구 산하 국제 암연구소는 그것을 2A군 발암물질로 분류했다. 그런데도 시-도교육청은 시설비부터 삭감하고 있다. 세손 결손이 그 이유다. 내년 전국 학교 환기시설 개선 예산이 무려 31.8%나 줄었다.
학교 급식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선 이유는 최저임금보다 낮은 기본급, 그리고 급식실 환기시설 개선 등 노동환경과 직결된 예산 삭감 때문이다. 한국의 거대 양당이 경쟁하듯 펼쳐놓는 감세 정책은 이토록 환경에 좋지 않다.
생각해 보자. 급식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이 저렇듯 위험한데 과연 부모들이 요구하는 아이들의 '건강권'이 도대체 어떻게 담보될 수 있다는 말인가? 아이들의 급식이 건강하고 안전하기를 바라는가? 그러면 급식 노동자의 노동 환경이 건강하고 안전하면 된다. 이런 간단한 방정식을 도외시한 채 닥치고 파업중지를 말하는 건 아이들의 건강권을 스스로 내다버리는 자가당착에 불과하다.
모든 건 연결돼 있다. 농장 노동자가 살충제에 중독되면 포도를 먹는 우리의 몸도 중독된다. 급식 노동자가 일하는 곳이 안전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의 급식도 안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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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 행동에서 후원하는 세월호참사 11주기 기억 약속 시민대회 가려고 광화문으로 스무 번째 향한다. 날씨 탓인지, 승리 집회 뒤라서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다. 오락가락하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진다. 바람도 간간이 분다. 416 유가족이 나와 발언할 때 가슴에 출렁이던 눈물이 울컥 쏟아진다. 음악인 누군가가 노래를 시작할 무렵 나는 천천히 걸어 인사동으로 나온다. 한 달여 전쯤 광화문 집회·행진에서 만난 부부와 저녁 약속 시간이 다가와서다.

 

박근혜 탄핵부터만 치더라도 마흔다섯 번 나온 광화문에서 생면부지 사람을 만나 약속 잡고 식사하기는 처음이다. 그 부부는 적극 참여를 꾸준히 해왔다. 부부 정치의식이 일치하는 일만도 쉽지 않은 일인데 자기주장 담은 글을 써서 소품까지 만들어 함께 오니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전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됐다니 연배도 그리 낮지 않은데 말이다. 정치 이야기와 일상 이야기가 자연스레 녹아든 대화를 이어가다가 늦은 시각에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곰곰 생각해 본다. 이들과 우연히 만나 인연으로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능동성은 대부분 내게서 나왔다. 사실 나는 그런 식으로 살아온 사람이 아니다. 거의 모든 인연은 내가 만들어서 맺어지지 않고 받아들여서 그리됐다. 그러다가 조금 느지막이 정치의식에 눈뜨고 한참 늦깎이로 의자(醫者)가 되면서 인연을 만들어내는 습관이 형성된 듯하다. 그 의식과 직업이 능동 자발을 요구하니 말이다. 416이 이 변화를 가속한 특이점이다.

 

416은 내 정치의식을 더욱 날카롭게 벼려주었다. 광화문 분향소는 정기 순례지가 되었다. 매일 눈물로 아이들을 하나하나 부르며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은 250명 얼굴을 모두 기억한다. 416연대 회원이 되어 여태까지 회비를 내고 있다. 416 관련 소식을 접하면 남김없이 퍼 나른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416행사는 참여한다. 유가족 포함 관련 인물들과 개별 인연은 일부러 맺지 않는다. 얼굴 없이 맺는 인연으로 내 영성을 그들과 함께 나눌 따름이다.

 

벌써 열 하고도 한해가 흘렀다. 진실을 은폐한 숭미 모일 매국 세력은 내란까지 일으키며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 수괴는 탈옥해서 비공개 재판받으며, 다 이기고 돌아왔다, 5년 뒤 다시 대통령 출마한다, 떠벌린다. 헌재가 8:0으로 파면했음에도 표정이 달라지지 않는 사이코패스를 날마다 보고 살아야 하는 오늘, 지난 11년은 너무도 모질고 야속한 시간이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어찌 이런 삶을 다시 살아야 한단 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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