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비밀을 통짜로 풀고 나니 아연 정적이 찾아든다. 모두 가만 내려놓고 나갈 생각 접은 채 양말 속옷 바느질로 오전을 다 보낸다. 살짝 이르게 국수 삶아 점심 먹고 60년 정든 정릉으로 향한다. 거기서는 무슨 목표나 목적 헤아림이 없어지고 무심히 풍경 속으로 배어들 수 있으니 내겐 수평 신성 공간으로 딱 적소다.

 

소나무와 참나무 사이로 천천히 걸으며 세월과 빛살을 촘촘히 헤아린다. 세월이 빚은 버섯을 아껴 보고, 빛살이 빚은 눈부신 경계를 기려 본다. 마르고 짧은 늦장마라 금천 물소리가 올 고운 바람결에도 휘어지며 뭉그러진다. 작디작은 쏠을 찾아 그 앞에 쪼그려 앉는다. 제 나름 여돌차서 고마움 증표 삼아 영상에 모신다.

 

출입구 언저리를 수백 년째 지키고 계신 느티나무께 새삼 인사하고 염천 망토를 둘러쓴 채 숲을 나온다. 지하철 갈아타며 이동해 조용한 음식점에 든다. 그 집 김치는 휘뚜루마뚜루 후려 섞지 않아 밥 한 숟가락 뜨고 그 위에 직사각형 배추 조각을 얹어 먹기 좋다. 습관대로 먹던 어느 순간 나는 그 김치 조각을 물에 넣는다!

 

빨간 양념을 헹궈낸 뒤, 다시 김치 조각을 입으로 가져간다. 남은 양념을 마지막으로 고이 빨아내고, 밥 위에 착 얹는다. 지그시 눈 감고 오물오물 먹는다. 포한(抱恨)이 사라지는 강력한 시간이다. 내가 신어미도 신딸도 되어 뛰노는 내림굿 아기 과장이다. 눈물이 흘러내린다. 온몸과 혼에 소름이 돋는다. 웃자란 어른 없다.


 

홀가분하게 집으로 향한다. 전과 달리 미세 의식 오솔길을 따라 불연속으로 기우는 마음 풍경을 느낀다.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 특히 고통은 다 연속돼 있다는 느낌에 잠겼던 뿌연 시야가 아침 안개 걷히듯 맑아지는 중이다; 결핍과 상처로 들어온 여성성에 출구가 빼꼼히 열리는 중이다. 사나이 과장이다. 틈새 엄마 없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든다. 아니다. 갑자기 삭신이 쑤시고 신열이 오른다. 처음 이 문제와 정면으로 맞닥뜨렸을 때와 같은 증상이다. 신음을 흘리며 그저 뒹굴던 한 찰나 내 입에서 나온 말: “그래 아가야, 이 아픔 지나면 이쁜 짓 한단다~” 나비 포옹해 주고 다독다독···. 아기가 웃으며 손 흔든다.

 

다음 날 아침. 신열, 근육통, 밭은기침, 그리고 불면 때문에, 몸이 물먹인 솜 같다. 3km 훨씬 넘는 숲 걷기를 생략할까, 지난밤에 연속된 망설임이 들어서는 순간 듬직한 사나이가 야젓하게 앞으로 나선다. “이럴 때 숲에 들면 몸이 가벼워져~” 그래도 현실 몸은 일흔 늙은이라 천천히 걸어 숲을 향한다. 는개가 화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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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원 탕전실 바깥쪽 긴 다용도실 창문에는 담쟁이덩굴이 흡착근(吸着根) 내리고 무성하게 살아간다. 그들 모습 지켜보면서 틈새로 하늘까지 우러를 수 있는 거기가 내겐 참 정겹다. 16년째 서 온 자리인데 올봄 어느 날 아연 그들에게 말 건넬 마음이 들었다. 낭풀을 바라보는 시각 변화가 쌓여 시간 중력이 강해지면서 감지하기 전에 카이로스로 들이닥친 듯하다.

 

내가 말을 건넨 까닭이 있다. 담쟁이덩굴 본성상 흡착면이 형성되는 공간을 우듬지가 자연스럽게 따라가면서 덩굴이 번져가기 마련이다. 창문틀인 경우는 여닫으므로 문제가 된다. 닫을 때 잘릴 수밖에 없다. 여태까지 나는 손으로 걷어내고 창문을 닫았는데 귀찮아선지 간호사가 잘라내곤 했다. 내 제지로 다시 그러지는 않으나 근본 대책이 없어 변화가 필요했다.

 

한창 자라던 덩굴 하나가 창문틀 모서리 돌아 흡착근을 붙이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상하지 않게 들어내고 덩굴을 손으로 받쳐 든 채 사람에게 하는 말과 똑같이 이야기한다. “여기로 넘어오시면 창문을 닫을 때 잘립니다. 더 안쪽으로 들어오지 마시고 이렇게 바깥을 향해 올라가세요.” 덧붙여 말한다. “저기 위쪽에 계신 분들한테도 이 말씀을 전해주세요.”

 

나는 우듬지가 향해야 할 곳을 가리켜 잡아주고 다른 줄기와 잎을 이용해 임시 고정 상태로 만들어준다. 매일 살펴본다. 두세 덩굴이 고개를 살짝 들이미는 기척을 보여서 똑같이 말하고 방향을 잡아준다. 일주일쯤 되자 변화된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능히 들어올 수 있음에도 더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행렬이 멈춰 섰다. 손댈 수 없이 높은 곳도 마찬가지다.


아래쪽-내가 말하고 손댔던 곳 


위쪽-말 전해 달랬던 곳

 

마른 늦장마긴 해도 창문 닫을 일이 조금 더 잦은 요즘 창가에는 그들과 나 사이 평화가 낭자하다. 낭풀들은 인간 말을 알아듣는다. 인간이 그들 말을 알아듣지 못할 따름이다. 알아듣지 못하는 일은 당연하지 않다; 그 곡절이 타락과 범죄로 뒤엉켜 있다. 어떤 정치 현안보다도 끽긴한 과제가 바로 이 타락과 범죄를 자각하는 일이다. 진심으로 참회하며 낭풀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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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유를 상실한 영아가 홀로 힘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슬기(!)는 장내 미생물 네트워킹에서 왔다. 인간 진화 정보에서는 홀로 힘으로 살 수 있으려면 두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지식이 왔고. 요건 하나: 어른일 것. 그 이야기는 했다. 인제는 남은 한 요건을 이야기해 마무리 지을 차례다: 여성일 것. 우리 속담은 이렇게 표현한다. “홀어미 삼 년이면 쌀이 서 말, 홀아비 삼 년이면 이가 서 말.” 속담 다른 판본은 홀어미 대신 과부를 넣는다. 둘은 같은 말이 아니다. 홀아비와 맞추려면 홀어미를 넣는 게 옳다. 자식 키우는 위치를 부가했을 때 그 차이가 한껏 더 선명하게 드러나니까.

 

내게는 40년 가까이 인연을 이어온 제자가 한 움큼 있다. 제법 오래전 집에서 식사 모임을 한 적이 있다. 그 가운데 결혼한 여제자가 제 남편을 초대해 나중에 도착했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느낀 이상한 광경을 보고 한마디한다. “? 왜 선생님이 주방에 계시죠? 제자들은 앉아서 먹기만 하고···.” 대뜸 대답이 돌아온다. “! 선생님 우리 엄마거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 는 식이다. 내가 남선생이고 제자 모두가 여제자이지도 않은데 이상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모임은 마치 모녀 동맹과 흡사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자타공인으로.

 

나는 그들에게 오랫동안 엄마 노릇을 해왔다. 세상을 가르치고 삶을 의논하는 일에 더해 먹이고 재우는 일까지 했으니 일테면 틈새엄마였다. 그들에게 한 엄마 노릇은 나 자신에게 한 엄마 노릇 연장선에 있다. 사실상 한평생 모성 결핍 상태에서 웃자란 어른으로 살아왔기에 나는 나 자신에게 엄마 노릇을 하면서 살 수밖에 없었고, 나아가 그런 빈자리가 보이는 아이들에게 스며드는 감수성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결혼한 뒤에 내 옆지기에게도 딸에게도 엄마 같은 남편, 엄마 같은 아버지로 살아왔다. 인정한다,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프고 또 슬픈 일이라는 사실을.

 

그 모순 역시 인정한다, 다른 선택 여지가 없는 불가피한 일이라는 사실을; 내밀 영웅이 벌인 장한 항쟁이라는 사실을. 질병 방어기제임과 동시에 영성 치유인,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역설 사건 보이지 않는 마주 가장자리에는 이 통렬한 각성이 요동한다. 짐승 과장(科場), 아기 과장, 사내(아비) 과장을 정색하고 들여놓은 내림굿을 통해 70년 모순을 달여내니 바야흐로 후천개벽(後天開闢) 시대가 도래한다. 그 들머리에 죽을 만큼 희생한 결과 쌀 서 말 하야니 놓인 대신, 뼈아프게 깨친 결과 아우라지 노나지 물이 변한 젖 서 말이 뽀야니 놓여 있다. 그 젖 먹고 참 건강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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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또 또다시, 인생 아우라지 혹은 노나지>에서 모유 먹는 아기 장내 점유율 1위 미생물인 비피도박테리움이 필수아미노산 트립토판을 이용해 나와 남/적을 구별하는 면역 교사 인돌-3-젖산을 만들어낸다. 모유를 먹지 못하고 자란 사람이 나와 남/적을 구별하는 일에 실패해 자가면역을 포함한 여러 면역 질환으로 미끄러지는 이치다. 그 대표 질병이 다름 아닌 우울장애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진실에는 또 다른 진실 하나가 결합한다.

 

모유에는 모유올리고당(HMO) 성분이 풍부하다. 이 성분을 먹는 생명체는 오직 비피도박테리움뿐이다. 그래서 장내 점유율 1위가 되고 훌륭한 면역 교사로 활동할 수 있다. 모유를 먹지 못하는 영아는 이 기전을 상실하였으므로 비피도박테리움 우위가 깨져 성인 장내 상태와 같아진다. 나와 남/적을 구별하기도 전에 때 이른 어른이 되어버린다는 뜻이다. <꿩이 나를 초대했다!>에서 ‘6개월도 채 안 된 무렵부터 걸었다라고 한 말과 직결된다.

 

아기인 적 없이 어른이 된 삶은 전방위 혼잣손이 된다. 태초부터 모든 고민과 결정을 혼자하고 감당도 혼자 한다. 결정 전에는 망설이고 망설이며, 결정 후에는 자책하고 자책한다. 그럼에도 남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한다. 아기가 자라 어른 되는 연착륙 과정을 통해 도움 청하는 일이 불가결한 사회 행동이라는 진리를 배울 수 없어서다. 사회관계망에서 소외되어 두름손도 내밀손도 점점 허약해진다. 남 손 안 타는 착한 삶은 슬프게 사위어 간다.

 

웃자란 어른이 그렇게 우울장애 주요 축으로 자리 잡아 소리 없이 희생되는 풍경 건너편에 늦깎이 어른이 존재한다. 어른이라 자처하지만, 제국 자본이 요구하는 고급 지식·기술을 지닌 가짜 어른, 실제로는 사특한 아이라고 표현해야 옳은 종자다. 이 사특한 아이들 패악과 욕설, 그리고 야비한 조롱으로 뒤덮인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2024123일 이후 대한민국엔 대놓고 함부로 커밍아웃한 저들이 싸지르는 배설물이 넘쳐난다.

 

중첩 식민지 허울 대한민국에서 우울장애, 웃자란 어른 증후군을 앓으며 70년 살아온 나는 내가 처한 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오늘 각성을 죽은 다음에서라도 기억하고 증언하련다. 그래야 내 과거가 귀환하지 않을 테니까("La seule façon d'éviter le retour du passé est de ne pas l'oublier." _Simone Veil); 그렇게 성찰과 치유를 거친 건강한 내 식물성, 여성성, 성숙성이 물팥버들과 대화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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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째 걷는 출근길 숲으로 일요일 아침에 들어가기는 처음이다. 먼 데 있는 산이나 강으로 향했던 습관을 깨뜨리면서 생기는 낯섦과 적어도 천 번 이상 걸었던 낯익음이 얽혀 묘하게 설렌다. 더군다나 최근에 만난 물팥버들(물오리나무) 상태를 빛이 충분한 조건에서 자세히 살피려는 목적으로 가는 길이라 두근거리기까지 한다. 과연 어떨까?

 

이 물팥버들과는 꿩이 나를 초대했던 그 사건 직후 출근길에서 처음 만났다. 그것도 그 사건이 일어난 곳, 바로 앞에서였다. 그동안 그렇게 여러 번 그 앞을 지나면서도 거기에 그 물팥버들이 살고 있는 줄 전혀 몰랐다. 예외 중에서도 별난 예외다. 이 숲에서 내가 지나는 길 양옆 나무나 풀을 모르고 무심코 지나는 경우가 거의 전혀 없어서다.

 

내가 그 숲을 걷는 시각쯤 해가 떠 있긴 하지만 북쪽 사면이라 아직 컴컴하다. 꿩 사건이 일어났던 내 지성소를 향해 걸어가는 중 문득 한 나무가 어둠 속에서 나를 멈춰 세웠다. 얼굴을 바짝 대고 스마트폰 전등을 켰다. 아뿔싸, 그는 물팥버들이었다! 왜 여태 몰랐을까. 물팥버들이 내 탐색 이미지에 없지도 않은데. 뭔가 특별한 곡절이 있다.

 


그나저나 나무 건강 상태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수피 빛깔이 어둡고 들떠 있다. 도장지(徒長枝·웃자람가지)가 군데군데 있고 그나마 거기 새잎도 부실하다. 수관 쪽은 무성한 다른 나뭇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밝은 날 꼼꼼히 봐야겠다. 우선 내 생명 에너지 파동으로 응급 처방한다. 풀리지 않는 의문과 더불어 가슴이 더욱 저려 온다.

 

나무 높이나 부피, 그리고 서 있는 위치로 보아 이 숲에 있는 물팥버들을 낳은 엄마 나무가 틀림없다. 나는 다시 문득, 몇 년 전부터 알고 있던 숲 동쪽 물팥버들 가족 반대편으로 향한다. 거기도 물팥버들 가족이 혹 있을까 기대해서다. 먼저 귀에 들어온 생명은 덤불 속에 모습 감춘 붉은머리오목눈이들이 도란대는 소리다. “미우미우 배배~”

 

갑자기, 그중 하나가 튀어나와 포르르 날아오른다. 내 눈길이 닿는 순간, 그가 한 나뭇가지 위에 올라앉는다. 아뿔싸, 물팥버들이다! 이 작은 길 또한 그동안 수백 번 걸었고 한때 내 신성 공간이었음에도 물팥버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이럴 수는 없는데 이런 일이 또 일어난다. 배치가 똑같다: 사건을 새가 열고, 나무가 닫는다.


 

나는 물팥버들 앞에 우뚝 서서, 엄밀한 깨침 마주 가장자리 틈새를 응시한다. 도봉산 회룡 계곡 노나지에서 여기까지 흘러온 과정을 되돌아본다. 인과 관계에 있지 않은 숲 걷기와 글 읽기가 동시성을 거치며 인과 관계로 엮여 드는 내력을 톺아본다. 여러 결이 서로 맞물려 복잡해 보이는 서사를 되작거린다. queer 변곡점 윤곽이 드러난다.

 

숲과 물을 걸으며 낭풀을 공부하는 동안 최후 초미 관심사는 낭풀과 소통-합일하는 일이었다. 좀 더 분명히 말하면 호주 생물학자 모니카 갈리아노처럼 낭풀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지점에서 나는 늘 아득한 심정으로 서성거렸다. 이런 경우 무슨 방법따위를 찾지 않는 나이기에 그냥 묻고 기다릴 뿐이었다.

 

문제 한가운데서 도봉산 회룡 계곡 아우라지로 향했는데 노나지 인식으로 번져가자 새로운 서사가 빚어졌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내 정체성, 좀 더 정확히는 경향성이 결핍·상처·질병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총체로 깨달았다; 치유와 경계 지음이 수행되어야 열릴 길임을 알아차렸다. 걷기·독서·질병·새가 어울려 인생 내림굿 한바탕을 짰다.

 

70년 내 경향성은 모유 결여 또는 상실이라는 태초 사건에서 발원했다. 여기서 온 만성 소화기 장애, 천장관절 증후군, 우울장애가 생을 관통했다. 우울장애는 피학 본성을 지닌 식물성, 여성, 성숙성으로 분화했다: 저항할 수 없는 영아가 받아들인 전천후 수용성, 자기를 파괴하는 희생, 전방위 혼잣손. 모든 문제가 몰아 터진 스무날이었다.

 

만성 소화기 장애와 천장관절 증후군은 이 스무날 들머리 사흘에 앓은 독한 몸살, 신열로 사라졌다. 우울장애 첫 부분인 식물성 문제를 해결한 사건이 방이 습지 물까치, 소악산(素岳山) , 붉은머리오목눈이가 열어젖혀 내 본성인 동물성을 분명히 하고 피학 치유, 가학 참회에 가 닿도록 물팥버들이 마무리 지어놓은 옴니버스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에서 물팥버들은 새를 거치기는 했지만 내게 말을 건넸다; 자기 존재를 드러냈다. 이는 필수 과정이므로 다음 소통이 어떨지는 온전히 열린 결말 앞에 있다. 그 전개가 내 몫임이 더 분명해짐과 동시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더 분명해졌다; 아득함이 엷어졌다. 남은 문제를 일상에서 투명하게 맞이할수록 숲은 가까워질 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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