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동유럽과 서아시아라는 두 지정학적 단층선을 무대로 세계 역사를 뒤바꿀 군사적 충돌이 진행되는 대격변을 두고, 세계 주류 언론과 지배 계급은 지금 제국주의의 패퇴라는 전황의 현실과 이를 은폐하고 호도하는 기만적 서사 사이에서 분열적 증상을 계속 드러내고 있다. 갈수록 객관적 진실을 은폐하기 어려워지자, 서방의 열세를 인정하는 보도를 이따금 내놓는 서방 주류 매체들이 없지는 않다. 우크라이나군이 전선에서 회복 불능의 패색을 드러내고 있다는 서방 매체의 보도도 이제 자주 나오고 있고, 서아시아 정세에 관해서도 영국의 텔레그래프 같은 유력 보수 매체조차 패배를 자인할 정도인 것이다.

그럼에도 서방 주류 언론이나 지배 블록은 대중의 눈과 귀를 가리는 기만적 관행을 멈추지 못한다. 최근 우크라이나 측이 주도한 드론 공세가 러시아에 치명적 타격을 주며 전세를 뒤집었다는 가짜 뉴스가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고, 이런 와중에 서방 고위층의 거짓 발언도 이어지고 있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이 최근 “나토가 강자이고 러시아는 약자”라며 러시아가 서방이 지시하는 조건대로 휴전 협상에 응해야 한다는 황당한 발언을 내놓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서아시아 전선과 관련해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의 군사력을 초토화”했노라는 새빨간 거짓말을 하거나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이 “강력한 새로운 경제 제재가 이란을 완전히 무너뜨릴 것”이란 허언을 내놓으면, 서방 주류 언론은 그 진위를 가려내기보다 제국의 오만을 중계하기에만 바쁘다. 이런 체계적인 기만은 세계 인민대중의 눈을 가려 지정학적 현실 상황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게 막는다. 세계 정세의 실상을 파악하려면 제국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허위적 프로파간다를 걷어내는 작업이 선결되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지정학적 흐름을 비판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다른 길도 있다. 서방의 선전전과는 거리를 두며 반제국주의 시각에서 우크라이나, 이란 사태를 제대로 다루는 국제정세 분석을 제공하는 흐름이 그 예다. 단, 여기서도 관점들이 다양해서 제출되는 분석을 선별하고 종합할 필요가 있다. 대안적 분석은 대략 세 갈래로 복잡하고 치열하게 나뉜다. 이들은 미국의 패권 전략과 그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동조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는 공통된 토대 위에 서 있으면서도, 다극화 질서의 현재와 한계를 평가하는 데서는 시각차가 뚜렷한 편이다.

첫째는 반제국주의 진영 내부에서 ‘주류’를 형성하는 관점으로, 오늘날의 미국을 이미 ‘쇠망의 길에 들어선 제국’으로 규정하며 일극 체제의 종말을 선언하는 목소리다. 이들은 미국이 동유럽(우크라이나)과 서아시아에서 벌이는 침략 행위가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이며, 오히려 그 무리한 개입이 미국의 쇠망을 가속하는 자멸적 악수가 되고 있다고 전망한다. 예컨대 전직 CIA 분석관인 래리 존슨(Larry Johnson)은 우크라이나, 이란 전선에서 미국의 재래식 군수 조달 체계가 회복 불가능한 고갈 상태에 직면했음을 군사 데이터로 입증하며 서방의 물리적 한계를 짚어낸다. 또한 페페 에스코바르(Pepe Escobar)를 위시한 지정학 분석가들은 동유럽에서 러시아가 굳힌 군사적 우세와 더불어, 브릭스(BRICS)의 확장 및 ‘저항의 축’이 일궈낸 서아시아의 전략적 목줄(호르무즈 및 바브엘만데브 해협) 장악을 다극화 질서의 불가역적 승리로 규정한다. 나아가 마이클 허드슨(Michael Hudson)과 리처드 울프(Richard Wolff) 같은 급진적 정치경제학자들은 금융화된 제국주의의 물적 토대 상실과 대러시아·대이란 경제 제재의 부메랑이 초래한 전 지구적 ‘탈달러화’의 흐름을 근거로 삼아, 미국의 구조적 내파(implosion)를 역사적 필연으로 짚어낸다.

둘째는 섣부른 낙관론을 경계하며, 여전히 유효한 제국의 군사적 파괴력과 지정학적 흔들기를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는 브라이언 베를레틱(Brian Berletic)의 ‘비관적’ 시각이다. 그는 미국이 동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를 대리 소모품으로 동원해 러시아와 유럽의 연결을 영구히 절단하고, 서아시아에서는 시리아를 전복시켜 레바논 헤즈볼라의 후방을 차단하며 유라시아 공급망을 폭격과 교란으로 봉쇄하는 ‘통제된 혼란(managed chaos)’ 전략을 가동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동유럽과 서아시아 양면에서 전개되는 제국의 집요한 교란 작전 속에서, 다극화 진영과 저항의 축 역시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방어적 생존 국면에 들어섰다는 그의 지적은 다극 질서를 지지하는 진영이 자칫 빠질 수 있는 경솔한 승리주의에 경종을 울린다.

셋째는 서방 제국주의에 가장 급진적인 비판을 가하면서도, 다극 질서를 주도하는 국가들의 기회주의적 한계를 매섭게 타격하는 바네사 베일리(Vanessa Beeley)와 피오렐라 이사벨(Fiorella Isabel) 등의 시각이다. 베를레틱이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삼가는 반면, 이 두 여성 분석가의 ‘내부 비판’은 그야말로 신랄하다. 이들은 중·러가 다극 질서 구축의 선봉에 서 있다고 자처하면서도, 정작 서아시아에서 제국의 총알받이가 되어 피 흘리고 있는 팔레스타인, 레바논, 이란 등 ‘저항의 축’에 대해서는 철저히 자국 이기주의에 빠져 적극적인 군사적·물질적 지원을 방기하고 있다고 일갈한다. 냉정히 보면 이들의 비판은 과도한 면이 없지 않다. 러시아는 동유럽 전선에서 나토와의 직접적인 체제 대결에 국력을 집중하느라 전선을 확장하기 어려운 군사적 현실이 존재하며, 최근 서아시아 전쟁 국면에서 드러나듯 중·러의 대이란 군사적 지원은 미국의 침략 역량 억제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서아시아 현장의 참상을 고발하는 이들의 비판이 동유럽 전선에 묶인 러시아와 경제적 실리를 우선하는 중국의 계산 속에서 다극화 진영의 연대가 지닌 구조적 한계를 날카롭게 드러낸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이상 세 갈래의 관점들을 종합해 보면, 오늘날 지정학적 위기를 읽어내는 데 필요한 입체적인 시야가 열린다. 앞서 두 번째 시각에서 확인했듯, 미국이 동유럽과 서아시아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인 대리전을 강행하며 ‘통제된 혼란’을 무기화하고 있다는 베를레틱의 분석은 매우 유효한 현실 인식이다. 그것은 몰락하는 제국이 결코 평화롭게 물러나지 않으며, 오히려 다극화의 안착을 방해하기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끔찍한 군사적 파괴력을 뿜어낸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다시 말해 제국은 그동안 주도해온 ‘영구전쟁’을 중단하는 일이 절대 없을 것이며, 일부 전선에서 격퇴당하더라도 다른 전선을 펼치며 끊임없는 반격에 나설 것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미국과 서방은 동유럽과 서아시아의 주 전선에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벌이며 사실상 돌이킬 수 없는 궁지에 내몰리면서도, 세계 곳곳의 지정학적 주변부에서 끊임없이 패권 개입을 이어가고 있다. 유라시아의 또 다른 단층선인 코카서스와 동유럽 접경지대(몰도바, 조지아, 아르메니아 등)에 제국주의 지배의 새로운 교두보를 구축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으며,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네팔,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등)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색깔 혁명을 시도해 친서방 정권 교체를 관철하거나 정치적 불안정을 조장하고 있다. 이는 핵심 전선에서의 패퇴를 만회하기 위해 주변부의 혼란을 부추기는 제국 특유의 ‘흔들기’ 전술이다.

하지만 제국이 행사하는 파괴력은 힘의 여유에서 나오는 공세가 아니라, 새로운 생산 질서를 창출할 능력을 잃어버린 낡은 체제의 절망적인 소모전이다. 유라시아 양단에서 동시다발로 벌어지는 제국의 군사적 개입이 길어질수록 서방의 재래식 군수 공급망은 파탄 나고 연방 재정 적자는 폭증하며 ‘탈달러화’의 시계는 더욱 빨라진다. 즉, 다극화 세력의 숨통을 끊으려는 제국의 집요한 발악 자체가 역설적으로 제국 자신의 수명을 기하급수적으로 단축하는 ‘자멸의 변증법’이자 ‘자가포식(自家捕食, autophagy)’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구조적 쇠망을 짚어내는 에스코바르나 허드슨 등 비판적 정세 분석가들의 통찰은 바로 이 지점에서 베를레틱의 비관론을 포섭하며 뛰어넘는다.

결국 작금의 사태는 남은 자원과 역량을 소진하며 맹렬한 군사적 파괴를 지속하는 제국과, 제국의 힘이 구조적으로 고갈되도록 계산된 지정학적 지연전을 펴는 다극화 진영 사이의 거대한 충돌이다. 베일리와 이사벨의 지적처럼, 살육이 난무하는 지정학적 단층선의 틈바구니에서 폭격의 참상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하는 것은 결국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레바논, 예멘, 이란 등 분쟁의 최전선에 놓인 인민들이다. 몰락하는 제국이 휘두르는 파괴력은 여전히 위협적이지만, 그 힘을 지탱하는 제국의 물적 기반은 이미 내부에서 허물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의 가장 비극적인 진실은 낡은 일극 체제가 해체되고 다극 질서가 자리 잡는 과도기적 소모전 속에서 동유럽과 서아시아의 무고한 인민대중이 막대한 희생과 고통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거시적 정세를 직시할 때, 최근 한국의 이재명 정부가 호르무즈 해협에 한국군을 파병하라는 미국의 강압적 요구에 굴종하는 모양새를 드러내는 것은 스스로 주권을 내던지는 자발적 예속으로서 참담한 우려와 분노를 자아낸다. 주지하듯 호르무즈 해협은 다극화 세력이 제국의 숨통을 쥐고 있는 전략적 목줄이자, 쇠망하는 일극 체제가 필사적인 도발을 감행하는 세계 최고 강도의 화약고다. 쇠망하는 제국이 발악하듯 벌이는 자멸적 침략 전쟁의 한복판에 자국 군대를 밀어 넣으려는 것은 도도한 세계사적 변동의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자살적 선택이다. 파국을 향해 치닫는 제국의 헛된 영구전쟁에 스스로 뛰어들어 총알받이를 자처하는 어리석음을 결코 범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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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년 숲을 중심으로 강력한 시간”, 그러니까 영성과 미학이 공존하는 고밀도 시간을 보냈다. 최근 3~4개월은 인생 내림굿으로 그 5년과 인생 70년을 마무리하고 있다. 지금은 말하자면 마지막 과장 뒷전풀이 시간이다. 느슨하게 일정을 잡아 가벼이 걷고 일상에서 제의 효과가 펼쳐지도록 복귀, 재배치 작업을 하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마지막일지도 모를 새로운 발견 이야기를 하려 한다.

 

지난 일요일 오전, 광화문 교보에 들러 신간 서적을 둘러본 뒤 불광동으로 향했다. 불광역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흔히 구기터널 계곡이라 부르는-내게는 미르골- 작은 골짜기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스마트폰 지도에는 영업 중이라고 떠 있는 식당 문이 굳게 닫혔다. 하릴없이 골목을 따라 걷다가 쌈밥이라 써놓은 곳으로 불쑥 들어갔다. 혼자서는 쌈밥을 먹을 수 없단다. 된장찌개나 주문하자, 된장~!

 

그래서 특별히~! 밥만이라도 돌솥밥을 먹기로 했다. 기다리는 동안 들여다볼 요량으로 스마트폰을 여는 순간 전혀 맥락 없이 질문 하나가 홀연히 떠오른다: 모유와 미음 중 아기에게 어느 것이 더 달게 느껴질까? 몰상식한 생각인 줄 알면서도 뭔가에 홀리듯 나는 그 질문을 검색란에 올렸다. 돌아온 답 방향은 예상대로인데 그 내용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내게는 충격일 수밖에 없는 정보를 담았다.

 

모유에 다량 들어 있는 유당(Lactose)이 강한 단맛을 내고 따라서 인간 원초 미각은 단맛에 끌린다. 단순히 맛있어서끌리는 게 아니다. 그 단맛은 아기에게 생명 안전감존재 유온감-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을 부여한다. 이렇게 모유는 육신뿐만 아니라 정신 생존 토대까지 세운다. 장내 미생물과 네트워킹을 이루기 전, 인간 생명 자체가 일으키는 사건이다. 모유 결핍 어두움은 여기서부터 깔린다.

 

내가 단 음식에 진저리 치고, 쓰거나 담백한 음식에 기울어지는 곡절이 좀 더 정확하게 드러났다; 모유 대신 먹은 미음이 실제 영향을 끼친 일에 이치상 선행하는 원인이 밝혀진 셈이다. 그동안 내가 빙의 불안이라 부른 원초 불안과 빙의 우울이라 할 원초 우울이 같은 데서 발원했음을 알고 나니 이제야 진정한 해방이 왔구나, 싶었다. 홀가분했다. 때마침 돌솥밥이 나왔다. 밥 퍼내고 물을 부었다.

 

먼저 뽀얀 막걸리부터 한 양재기 가득 따라 모유로 모시어 꿀떡꿀떡 마신다. 오늘따라 다디달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돌솥 바닥에 있던 밥이 물에 불어 흰죽처럼 되었을 때 그 표면에 뜬 미음을 걷어내 한 숟가락 떠먹는다. 오늘따라 심심하디심심하다. 눈시울이 적셔진다. 천천히 오래오래 씹으며 70년 세월을 접어 찰나에 모은다. 눈시울이 뜨거운 물로 흘러넘치자, 고개 숙여 절한다: 고맙디고맙습니다!


우리 생명 팡이시질(networking)은 다 계획이 있으시어따. 미르골 향하기, 문 닫은 식당 검색해 정하기, 쌈밥집 가나 쌈밥 못 먹기, 된장찌개라서 밥이라도 돌솥밥 먹기, 모유와 미음 떠올리기···. 우연이 제곱 되면 섭리다. 이렇게 복귀와 재배치를 일구며 뒷전풀이 삼매로 들어간다. 삼매경에서 생은 감화한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들여다볼 때만 보이는 찬란함”(자연은 퀴어하다)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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