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서 곤 시간>을 쓴 날 하루 뒤인 일요일 아침 일찍 도봉산 회룡 계곡 노누라지-노나지와 아우라지 합성어-로 일곱 번째 향한다. 폭염경보가 발령된 날씨라 오전에 구름이 떠 있을 때 들어갔다가 청명해지는 이른 오후부터 드리울 산그림자 밟으며 나오면 체력 소모를 줄일 수 있겠다 싶어서다. 마음은 홀가분하고도 안온하다.

 

마른 늦장마 뒤라 전반 수량이 그리 많지는 않으나 골짜기 올망졸망한 쏠 물소리가 제법 여돌차게 들린다. 노누라지 복류 지점은 지지난번과 같은데 수량만큼은 눈에 띄게 더 많아 심사가 한결 넉넉해진다. 지난 40여 일간 있었던 일을 고하고 고마움을 전해드린 다음 손바가지로 흐르는 물을 떠서 마신다. 몸에 둘린 땀을 씻어낸다.

 

돌과 바위를 만나 모습 울리고 소리 풍기는 작은 물 구경하느라 맨발로 뒤뚱대며 돌아다닌다. 하는 짓이 공격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는지 작은 가재 하나가 은근슬쩍 제 몸을 보여준다. 그 찰나, 시간이 휙 접히면서 나는 단박에 일곱 살 아이가 된다. 통통대는 심장 대신 반짝이는 눈망울을 물웅덩이에 쏙 빠뜨린다. 이십분(已十分)!

 

이십분(已十分)은 이름 잊힌 어떤 비구니 게송이라는 이야기서껀 여러 서사가 떠도는 옛 중국 시 마지막 구다. 인적 없는 깊은 계곡에 빙의되어 대고 스며드는 이 발길에 무슨 기적 같은 사건이라도 걸려 있겠지 싶지만, 작은 물웅덩이에 모습 나툰 가재만으로 이미 신비는 꽉 차고 넘친다. 달망달망 율동 타고 소도 숲을 떠난다.

 

진일심춘불견춘(盡日尋春不見春)

망혜편답롱두운(芒鞋遍踏隴頭雲)

귀래우과매화하(歸來偶過梅花下)

춘재지두이십분(春在枝頭已十分)

 

종일 봄 찾아 헤매었지만 보지 못하고

짚신 닳도록 구름 등성만 두루 밟았네

돌아오며 우연히 매화나무 아래서 보니

봄은 이미 매화 가지 끝에 흠씬 와 있네

 

(* 번역: 글쓴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픈 지 40일이 넘어가고 있는데 몸 상태가 아직 온전하지 않다. 통증도 거의 사라지고 쾌적한 감각은 대부분 돌아왔지만, 체중이 여전히 50kg 근처에서 맴돈다. 회복세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으니 그래도 안심하면서 마치 사골을 고듯 차마 버릴 수 없는 자투리 곡절 거두기로 솟을굿 채비에 갈음한다.

 

자투리 곡절이라고 했으나,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내가 견지해 온 반인간중심주의에 경도된 표현일 수도 있다. 인간인 한 인간에서 출발한 표현을 써야 자연 이치에 부합한다고 한다면 미상불 가장 근원에 해당하는 곡절일 테다. 이 이야기 하려고 마음먹은 계기는 이번에도 독서였다. 동시성 작동이다.

 

우연과 필연이 맞물린 경계에서 내 눈길을 붙잡은 책은 재키 히긴스가 쓴 감각의 신세계였다. 글쓴이가 다른 사람을 인용한 한 문장이 돌연 나를 불러 세웠다. “어머니로부터 받는 세심한 보살핌의 손길이 어디까지가 자신이고, 어디부터가 타인인가 하는 감각을 우리 안에 새겨넣는다.” 이 어인 말인가?

 

여기 보살핌의 손길은 추상적 의미 돌봄을 뜻하지 않는다. “쓰다듬거나 어루만지는또 다독거리거나 포근히 감싸안는 피부 접촉을 뜻한다. 이 접촉이 자기 몸에 대한 소속감, 그 몸이 자기 것이라는 의식을 강화한다. 어머니와 아기 사이 유대, 애착이라는 연속성에 매몰돼 있던 통념을 단칼에 자른다.

 

이 접촉은 모유 수유 행위에서 자연스럽게 최초 작동한다. 모유 없이 시생대를 보낸 나는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엄마까지 안아주거나 업어준다고 다가오면 손을 내저었다.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 들과 내를 누비며 비인간 존재와 마주해 살았다. 이 자타 분별 범주 변이도 우울증 고갱이다.

 

어머니에서 출발한 부드러운 피부 접촉이 가져다주는 쾌감은 건강한 자아 정체감 형성을 넘어 삶이 즐거운 놀이이기도 하다는 진실을 느끼게한다. 이 느낌에 둔해지면 놀이로서 삶이 전해주는 재미에 흥미를 잃게 된다. 재미에서 멀어지면 의미로 보상받기 마련이다. 진지와 엄숙도 우울증 고갱이다.

 

피부 접촉을 통한 즐겁고 재미있는 놀이는 생명 안전감을 보충하고 증강한다. 이 길이 근원에서 막히면 자기 생명 자체를 불안전으로 느끼는 존재론 차원 불안에 빙의(possession)된다. 이 빙의 불안은 인격으로 파고들어 살고자 하는 원초 감응을 삭제한 채 우울과 동맹한다. 여기가 우울증 골갱이다.

 

우울증 골갱이는 모든 접촉에서 고립된다; 가장 깊은 정신장애, 아니 심신장애, 아니 () 생명장애다. 재키 히긴스는 다시 그 사람을 인용한다. “저는 접촉이 정서적 탐닉이 아니라 생물학적 필수 요소라고 봅니다.” 아파서 고아 낸 시간이 알려준 엄밀 섬미(纖微)한 진실이다. 이 진실을 살고 싶다.

 

이 진실을 살아갈 때 나는 비로소 마지막 그리움에서 온전히 놓여날 수 있다. 모유 결여는 내게 질기디질긴 물 그리움-허갈(虛喝)-과 당 그리움-허기(虛飢)-을 가져다주었다. 이 둘은 각각 다르게 뒤떠들다 마침내 알코올 애착으로 수렴했다. 알코올 애착은 우울장애와 찰떡궁합 죽맞아 50여 년간 함께했다.

 

알코올 애착과 정면으로 마주해 70년 동안 얽히고설켜 온 온갖 고통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면 내 삶은 모름지기 카덴차를 남겨 놓은 협주곡 상태로 들어설 테다. 내 인생 계통수를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게 이끈 숲 정령들께 가없는 고마움을 전한다. 지난 40여 일 다시없이 힘들었고 더없이 복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한 달 넘게 몸살 앓으며 인생 내림굿을 하는/받는 동안 내게는 당연하게도 형언하기 어려운 변화가 일어났다. ‘내림굿세 축인 숲·물 걷기, 아픔·삶 고치기, ·나무 동무하기가 서로 엮으며 복잡다단하고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빚어냈다. 한 생이 닫히고 또 다른 한 생이 열리는 카이로스였다. 화룡점정이 남아 있는 시점에서 각단을 잡고 간각을 세워 본다.

 

최근 5년 동안 내 삶 이정표 제시와 각성, 그리고 변화는 언제나 숲·물에서 일어났다. 장소가 아니라 주체로서 숲·물은 내 스승이었다. 실마리를 제공하는 정보·지식은 인간인 내 사유와 독서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또한 미소 생명 팡이시질(networking) 속에 있고, 영감과 동력은 숲·물에서 온다. 도봉산 회룡 계곡과 방이 습지, 궉림(鴌林)이 그곳이다.

 

궉림(鴌林)은 매일 출근길에 40여 분가량 머무는 자그마한 숲이다. 관악구와 동작구 경계 지역으로 동서 방향 긴 능선과 남북 방향 골들로 오종종하게 구성된 이름 없는 숲을 궉림이라 부르는 까닭은 그 지성소에서 꿩이 울고 날갯짓하는 새벽 의례로 내가 초대받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아픔을 떠나보내고 새 삶을 맞아들인 일대 치유 사건으로 새겨졌다.

 

봉황을 상징하는 꿩, 그래서 궉()이라 일컫는 새와 소통하고 나서, 이치에 따라 그 지성소 경계에 있는 물오리나무하고 소통을 이루었다. 물론 물오리나무가 나를 불러서였다. 물오리나무를 깊이 몰랐을 때 내가 고쳐 부른 이름이 물팥버들이었다. 소통 후 더욱 깊이 알고 나서 다시 고친 이름은 메팥버들이다. 옛사람 통찰이 옳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오리나무 한자 이름이 적양(赤楊)이다. 물오리나무처럼 물을 좋아해 습지에 산다. 다른 점은 버드나무처럼 물살이 약한 하류 습지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물오리나무는 물살이 세고 빠른 상류 산 습지, 심지어 습지 아닌 산등성이에서도 잘 살아 산적양(山赤楊)이라 불렀다. 이런 이름은 콩과 식물과 같은 성질도 지닌 물오리나무를 정확하게 반영하니 제격이다.

 

이렇게 거듭나 내 삶으로 들어온 물오리나무, 그러니까 메팥버들은 꿩과 더불어 씻김과 내림을 갈무리한 몸주수호신이다: 내 심신 온갖 질병을 고친 의사다: 반제 전선 참 동지다: 지구 아우라지·노나지 장엄 영주다. 인제 내게는 그가 소도다; 그가 궉궁 신장이다; 내가 다시 또다시 돌아갈”(퍼트리샤 오노니우 케이시언) 자리다; 솟아서 날아오를 자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한 달 몸살 정점을 찍었던 기침 근육통에는 오해가 따라다닌다. 기침이 일어나는 기관이나 기관지 근육에 생긴 통증이라 생각해 그토록 심하다면 엑스레이 찍어봐야 하지 않느냐라는 반응을 부추긴다. 아니다. 기침을 효율성 있게 하도록 돕는 늑간근, 복근, 광배근, 횡격막이 격하게 수축 운동해 기침이 끝난 뒤에 피로 또는 후유증으로 다양하고 기묘한 통증을 일으킨 경우다.


불편하기로 따지자면 그 격렬한 통증부터 주목해야 옳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왜 그렇게 폭발 기침을 집중해서 일으켰는가다. 아침 일찍 한의원 도착해 원장실에 들어서는 순간 날카롭고 매운 공기가 목구멍을 찌른다. 그럴만한 원인을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최근 5년 동안 변한 일이 없는 한적한 장소다. 장마철임을 고려해서 찬찬히 다시 톺아본다. 그렇다. 마른 식물!

 

동물 식으로 말하면 식물 시체(!)가 원장실 전체에 즐비하다. 그동안 숲에 드나들면서 거둬온 나무줄기와 가지, 그 껍질, 풀잎, , 열매, 거기다 다양한 버섯까지 기억과 기림을 버무려 이곳저곳에서 웅얼거리고 있다. 식물 본성이 상실과 고통으로 들어왔다는 진실과 마주한 찰나부터 내 몸이 달리 반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돌연 감각 구멍이 열린 거다. 아파!

 

, 하는 어떤 시점부터 맹렬한 구토 같은 기침이 쏟아져 나온다. 멈추기는커녕 잠시 쉴 틈도 주지 않고 가슴을 두드릴 새도 남기지 않고 쇄도하듯 목 터져라, 컹컹거린다. 눈물, 콧물 범벅에 나중에는 정신까지 혼미해지더니, 급기야 기억 끈이 뚝 하고 끊어져 버린다. 언제 어떻게 기침이 멈췄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 와중에 만들어 목을 헹군 죽염수 일부와 젖은 수건이 뒹군다.

 

넋 빼고 우두커니 앉아서 생각에 잠긴다: 식물 본성을 연속성에서만 생각해 왔던 지난 70년을 뒤집어엎은 일대 사건이었구나! 식물 본성을 나쁘게 생각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으나 그렇게만 내 본성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진실 앞에서 통렬히 무릎 꿇은 사건이었구나! 그날 밤부터 기침 근육들이 눈물을 쏟으며 몸부림치는데 차마 신음을 아낄 수가 없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꼬박 닷새가 지나 걷기를 완전히 멈추고 휴식을 취하니 비로소 통증이 물러난다. 이 근육 통증이 물러남으로써 한 달 전 따끔거리는 위 증상에서 비롯되어 장 증상, 천장관절 증상, 우울 증상-웃자란 어른 증후군, 틈새 엄마 증후군-, 그리고 기침에 동반해 다시 찾아왔던 혈관운동 신경성 비염까지 도파니 사라진다. 70년 인생을 휘감았던 귀마가 스러진다. 참삶 동살이 든다!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새벽, 나는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 정성 다해 집 안에 있는 기억·기림 식물이며 버섯을 거둬들인다. 어제 가지고 온 한의원 식물, 버섯과 함께 간동그려 집을 나선다. 내 자신이자 내 아픔이었던 이들을 내게 말을 걸어온 물오리나무 아래 모신다. 거듭난 생명으로 재회할 날 설레니, 섭섭함 넘어 서그러워진다. 비 젖은 영이 보송보송한 김을 피워올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몸살이 한 달을 넘기고 있다. 체중은 50kg 아래로 내려간다. 은근히 기분 갉아먹는 신열, 시난고난한 호흡기 증상, 무엇보다 기이한 폭발 기침이 신묘하게 기습 종료된 이후부터 대상포진처럼 바람만 스쳐도 아픈 근육통으로 영일 없다. 몇 날 며칠씩이나 잠에서 깨어 병이 건네는 이야기 듣다가 날 밤을 새우곤 한다. 허리가 아리고 다리는 파근하며 활동 감각이 휘주근하다. ‘은화처럼 맑은영 줄 하나 겨우 부여잡고 진실을 뒤좇는다.

 

모른 채 알아차리고 알아도 모른 채 한 달이 흐르고 보니, 이 시간 전체가 신병 속에서 씻김굿과 내림굿이 갈마든 커다란 굿판이었다. 내게 결핍과 상실 틈새로 때 이르게 주입된 식물성·여성성·성숙성을 씻어 내보내고(씻김굿), 늦게나마 건강한 그러나 낯선 동물성·남성성·유아성을 맞아들이는(내림굿) 의례·몸짓 또는 자세·언어가 재현되고 변주되는 시간이었다. 아프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의학이 개입해서는 안 될 시간이었다.

 

급격하게 살이 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주위 사람들이 알아보고 놀란다. 아무리 백세시대라지만 일흔 살 먹은 남자 사람이 50kg 미만 체중이라면, 게다가 술까지 주야장천 마셔댔다면, 더럭 암 걱정을 들먹여도 호들갑은 아닐 테다. 뾰족한 설명 방법이 없으니 그냥 빙그레 웃고 만다. 웃고 말 일이 아니다. 오늘은 오만 년 만에 숲 걷기 중단이다! 문이란 문은 죄다 열고 하루 종일 바람 길목에 오도카니 앉아 멍때림으로 휴식을 취한다.

 

생색 없는 평온이 잠시 내려앉는다. 이 간이역에서 내릴 여행이 아니니 다음 행로에 유념한다. 어디인지 모르는 솟을굿역을 향해 다시 일어선다. 거기 또한 아플 만큼 아프고 나서야 닿을 곳인지 나는 모른다. 천명 받는 일이 무슨 상 받는 일은 아니니 전보다 더 깊은 신음 속으로 나를 던져야 하는 일은 아닐까, 오히려 두렵다. 통증이 깊이 가라앉는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나는 사부자기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한다. 밥을 먹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