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유가 나오지 않아 미음으로 연명한 영아가 자라 살아가면서 만성 소화장애와 우울장애에 시달렸다는 내 이야기는 남은 진실 하나를 더 품고 있다. 미음을 위험으로 감지한 아기는 이 세상을 홀로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6개월이 채 안 된 무렵부터 걸었고 한 달 뒤에는 뛰었다. 가족과 이웃은 신동이라 했으되 너무 일찍 걸은 아기 무릎 사이가 벌어져 직립과 보행에 지장을 주고 천추(엉치뼈)가 예각이 되어 허리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는 천장(엉치뼈와 엉덩뼈)관절 증후군으로 발전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지난 일요일(6. 21.), 바로 그 천장관절 통증이 절정에 이르렀다. 실은 그 전날 오전부터 징조가 심상치 않았으나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아끼는 사람들과 술까지 한잔 마시고 늦게 들어가 잠자리에 든 결과 새벽부터 신열이 뜨고 전신이 괴로워 중간에 깨고 말았다. 간신히 수습해 일요일 아침에 할 일을 챙겨나간다. 몸이 점점 더 가라앉는다. 천장관절 통증과 자주 겹치는 장 증상인 후중감(後重感)까지 함께 달려들어 상황은 악화일로다. 마침내, 그분까지 오시니 속수무책이다: 천근만근 우울감. 표정 펴기가 힘들다.

 

펴기 힘든 표정을 가족 앞에서 애써 펴고 걷기 어려운 발걸음으로 갈 곳은 한군데다: 방이 습지. 심신에 나타나는 모든 증상을 그대로 담은 채 나는 천천히 걸어 습지로 들어선다. 물억새가 한층 싱그럽다. 그 사이 새 가족이 생긴 논병아리며 물닭이 달라진 몸짓을 펼쳐낸다. 그들을 사진과 영상에 담으며 순간순간 통증과 우울감을 달랜다. 관찰 덱을 한 바퀴 돌아 초막 있는 곳에 이르니 물까치들이 심상한 풍경 속에 있다. 내가 먼저 말을 건넨다. “~깨깨깨깨깩!” 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받는다. “~깨깨깨깨깩!”

 

그들은 경계도 주목도 하지 않는다. 나는 오는 길에 주운 낙과 살구와 복숭아를 높다란 기둥 위에 올려놓는다. 선물, 아니 예물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그들을 소 닭 보듯 할 며리는 없다. 비 맞아 물크러진 오디를 손에 꼭 쥐고 습지를 떠난다. 심신 괴로움 전반이 조금 가벼워진다. 아껴 걸어서 그런 듯하다. 밖에서 가족과 만나, 전과 다름없는 표정으로 반주 곁들여 김치찜을 먹는다. 딸아이가 심상한 말투로 소주 두 병을 주문하자 옆지기가 14금짜리 축하를 건넨다: 서방님 든든하시겠사옵니다.

 

문제는 다시 그날 밤. 전날처럼 신열이 뜨고 삭신이 쑤신다. 특히 천장관절 피해 경직이나 가해 왜곡을 풀기 위해 풀어준 근육 중심으로 이불만 닿아도 아프다. 심지어 눈알까지 아프다. 그러고 보니 피부, 근육, 뼈마디, , , , 감정 통틀어 안 아픈 데가 없다. 어느 순간 잠에 떨어졌다가 새벽에 깬다. 괴로움은 여전한 듯한데 뭔가 다르다. 특히 천장관절 통증과 후중감이 약해져 전신 통증은 아예 뒷전으로 밀려난다. 결국 신열이 통증을 조절해 주었다. 아직은 얼얼한 상태로 일어나 앉아 사건 해석에 들어간다.


아우라지를 노나지로 받아들이게 한 도봉산 회룡계 가르침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내가 동물인 인간임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채 식물과 관념 합일한 잘못을 다시 푼다: 나는 허울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부역자일 뿐 아니라 인간 생명으로서도 비인간 생명과 비생명 자연 착취에 가담한 부역자라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 부역자 꼴에 주제넘게 나무, , 버섯, 그리고 물과 동지인 측면만 내세웠다. 이 잘못을 깨달으려 방향 바꾸는 데서는 물까치, 내 삶에 박힌 자발 부역을 깨닫는 데서는 천장관절 통증이 스승이었다.

 

깨달음에 감사하며 잠든 월요일 밤이 지나갔다. 몸살기는 남아 있지만 치유 국면이 확실하다. 평소보다 일찍 출근길 숲으로 향한다. 내가 청와대 뒤 백악산에 빗대서 소()악산이라 부르는 숲 들머리에 이르렀을 때 우렁찬 꿩 소리가 울려 퍼진다. 꿩은 금속성 소리를 짧게 두 번 질러서 한 울음을 끝낸다. 다음까지 3~5분을 기다려야 한다. 나는 꿩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그 시차를 염두에 두고 녹음할 장소로 간다. 매일 멈춰 서서 스스로 발견한 호흡법을 가다듬는 내 지성소다. 거기에, 꿩 한 분이 우뚝 서 계신다!

 

순간 전율이 일어난다. 여느 때 같으면 내 발소리를 듣고 벌써 도망갔을 텐데 그는 나와 시선을 90도로 한 채 도도히 서 있었다. 내가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과정에서 전혀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이따금 나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4분 가까이 고요히 거닐다가 멈춰 서서 나를 다시 응시하더니 앞뒤 깃 고르기를 새삼스럽게 한다. 뭔가 결행에 옮길 시점이 다가왔다는 느낌이 드는 찰나, 그는 헌걸찬 소리를 두 번 내지르더니 뒷날개를 힘차게 푸드덕거린다. 나는 머리를 깊이 숙인다: 저를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왕국 경계를 선언하고 왕비가 알현할 시각임을 선포한(時報) 뒤 제왕은 다시 처음 도도한 자세로 돌아가 고요에 깃든다. 나는 바람 흐르듯 숲에서 나온다. 소리만이라도 듣겠다는 소원 넘어 그 자태까지 보여주신 장엄 융해, queer 합일로 제대로 노누면 반드시 아우라진다는 가르침이 일단락된다. 몸살 맘살 남은 기운이 역력해도 나는 바야흐로 새로운 장으로 들어서는 중이다. 현실 삶, 그 구체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아직 잘 모른다. 남은 병기를 잘 다독거리며 더 엄밀·섬밀한 삶으로 나아간다. 다시 니마 고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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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고습지(七顧濕地)랄까. 무슨 기대가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궁금해서 방이 습지로 7번째 향한다. 매번 무작위로 바뀌는 queer 세계를 힘닿는 대로 섬세하게 탐색하여, 멀찌막이나마 참여할 기회에 가 닿으려 해서다. 관찰 덱 바깥으로는 나갈 수 없어 갑갑하긴 하지만 작은 생명들을 보호하려면 불가피한 제한이기도 할 테니 거기서 멈춘다.

 

꽃창포, 개구리밥, 노랑어리연, 수련, 갈대들이 그때그때 변하는 모습을 기억과 감탄에 버무려 담아둔다.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검보라빛 오디를 따거나 주워서 먹는다. 이드거니 서서 논병아리가 한가로이 깃 고르는 풍경에 잠겨 든다. 천천히 한 바퀴 돌아 우거진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 선다. 물까치 가족이 사부작사부작 가지를 넘나든다.


 

영민하고 경계심 많은 물까치가 내 존재를 모를 리 없음에도 사뭇 고요하다. 내 머리 위 나뭇가지에 앉은 물까치가 머리를 까딱까딱하며 자리를 뜨지 않고 있다. 어느 순간 그가 ~깨깨깨깨깩!” 말을 건넨다. 이는 지난번 길게 되풀이했던 경계에 찬 질문 투, “크르르르르~!?”와 다르다. 경계를 푼 음조다. 나도 따라 한다. “~깨깨깨깨깩!”

 

잠시 뒤 이곳저곳에서 여러 물까치가 ~깨깨깨깨깩!”을 마치 돌림노래처럼 불러댄다. 자유로움과 안전감이 전해진다. queer 생명으로 낭자한 이 습지에서 우리는 queer 공명으로 삶을 함께 나누며 더불어 조절한다. 나를 품은 생명 파동이 습지 숲에 물결쳐 간다. 우리는 숲에서 나와 제국의 개들이 왜자기는 올림픽공원역을 가로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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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장애는 다양한 측면에서 이해해야만 진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복잡한 증후군이다. 그 가운데 내가 깊이 유념하며 치료해 온 측면은 자기 경계를 건강하게 세우지 못해 일어난 자기 비하나아가 자기부정이다. 타자를 당당하게, 대등하게 마주하지 못하고 배려·양보·관용이란 이름으로 스스로 먹잇감 되게 하는 모진 경향성이다. 그 끄트머리에 자기 살해가 도사린다.

 

뇌는 혼자 울지 않는다(송주현, 2026)에 따르면 모유 먹는 아기 장내 점유율 1위 미생물인 비피도박테리움이 필수아미노산 트립토판을 이용해 나와 남/적을 구별하는 면역 교사 인돌-3-젖산을 만들어낸다. 모유를 먹지 못하고 자란 사람이 나와 남/적을 구별하는 일에 실패해 자가면역을 포함한 여러 면역 질환으로 미끄러지는 이치다. 그 대표 질병이 다름 아닌 우울장애다.

 

<고갱이 의학을 아시나요?>에서 내 위장질환 문제를 이야기한 바 있다. 모유가 나오지 않아 미음으로 연명한 영아 시절 아밀라아제 결여가 어떻게 일생을 뒤흔들었으며, 그 진실을 알고 나서 어떻게 변했는지가 그 내용이었다. 그보다 더 육중한 오늘 사연은 내 우울장애 이야기다; 같은 곳에서 발원한 두 질환이 내 인생 전체 방향을 더불어 규정하고 조정했다는 각성 이야기다.

 

내가 40대 중반에 수능 쳐서 한의대 입학해 50대 초반에 한의사 그것도 숙의(熟議)로 정신 치료하는 사람이 된 까닭은 50년 동안 시달려온 우울장애 때문이었다. 아무도 손대지 못한 내 병을 스스로 고치려, 미친 짓이라며 만류하는 주위 뿌리치고 건곤일척 도박을 감행했다. 성취만큼이나 좌절도 심했던 임상이지만 여전히 그 길을 가는 중이다; 우울 골갱이도 남아 있는 채다.


물론 그 골갱이도 인제 고갱이로 변할 테다. 위장질환 경우처럼 그 시원(始原) 곡절을 마침내 알았기 때문이다. 이 두 변화는 치유를 근본 지점에 가 닿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 생명에 배어든 식물성과 여성성이 몸 마음 살갗을 찢어 들어온 상처였음을 통렬히 각성하게 했다. 그 각성은 온정과 신비 경사각을 단박에 쳐 내려, 상처 이전 본성이 지닌 임계점에 다시 세웠다.

 

임계질량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종간 공명과 소통을 꿈꿀 수 없다는 진리 앞에 허리 접도록 깨우치신 도봉 큰 스승께 8배 올린다; 본성 최선으로 흐르게 길을 트도록 가르치신 회룡 큰 스승께 고맙습니다!” 예물 드린다; 동시성을 인과성에 붙들어 매려 했던 아둔함에서 벗어나도록 이끄신 물까치 큰 스승께 “객~깨깨깨깨깩!” 찬가 바친다. 노나지가 참 아우라지 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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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까치는 60년도 썩 넘은 내 기억 역사 속에 암암히 살아 있는 새다. 그 소리도 메나리토리처럼 귀에 각인돼 있다. 이따금 그 날렵한 자태와 파스텔 톤 물색에 눈이 가곤 하지만 보통은 출근길 숲에서나 도봉산 숲에서나 방이 습지 숲에서나 특별한 주의 없이 익숙하게 대하고 지나친다. 오늘 그 오랜 습관이 툭 끊어진다.

 

도봉산 회룡 계곡 아우라지를 나와 자주 가는 보리밥집에서 점심을 먹은 뒤 지하철로 곧장 방이 습지를 향한다. 달력 구분으로는 오늘이 봄 마지막 날이지만 습지는 이미 여름에 이드거니 들어와 있다. 볕이 후더분해서 누리가 누글누글하다. 물에 떠 있는 논병아리도 굼뜨다. 나 또한 땀 아낄 요량으로 소심히 움직인다.

 

꾀꼬리, 되지빠귀, 박새, 쇠박새, 멧비둘기들 목소리에 귀를 열고 무심히 걷던 어느 순간, 내 주위를 따라 돌고 있는 새 기척이 다가온다. 물까치다. 걸음을 멈춘다. 그가 같은 음성으로 내 존재를 탐색한다: 크르르르~!? 곧이어, 숲 전체에 흩어져 있던 물까치들이 집결한다. 내 주위를 도는 그가 더욱 가까이 다가든다.


 

마치 공격하듯이 근접 비행해도 내가 움직이지 않자, 이동을 멈추고 한곳에 더 오래 머물며 다시 말한다: 크르르르르~!? 다음 순간 내 입에서 같고 또 다른 소리가 흘러나온다: 크르르르르~?! 열댓 번 주고받더니 풀어놓는다. 내가 서서히 움직이자 집결했던 무리도, 말을 걸었던 그도 일상으로 돌아간다. 나도, 떠난다.

 

다음 일이 궁금하다. 그들이, 아니면 그만이라도 나를 기억할까? 다른 궁금증이 하나 더 있다. 매일 지나는 출근길에서 내가 크르르르르~?!” 말하면 거기 물까치들도 대답할까? 아무래도 이거까진 무리지 싶다.^^ , 괜찮다. 새가 이리 말을 걸어왔으니, 길이 보인다. 여간해서는 생략할 수 없는 동물 나를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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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6-06-04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는 아파트 주위에도 물까치가 아주 많아요. 이 아파트에 처음 이사와서는 한 종류의 새가 눈에 띄게 많은데 무슨 새인지 몰라서 도감 보고 찾아봤더니 물까치더라고요.
아기 물까치도 혹시 보셨나요? 쬐그만 것이 아주 귀여워요.^^
 

 

일기 예보는 분명히 많은 비가 온다고 했다. 내가 사는 곳은 그렇지 않았다. 도봉산은 어쨌으려나 궁금하다. 지난주보다 더 일찍 집을 나서 골짜기 들머리에 도착했다. 회룡천 물부터 살핀다. 역시나 오히려 지난주보다 수량이 줄었다. 아우라지 상황도 마찬가지다. 복류 지점이 조금 더 위쪽으로 이동해 있다. 지난번 복류 웅덩이는 아예 말라버렸다.

 

접지하며 앉아서 찬찬히 살핀다. 돌 사이로 낙엽이 쌓여 길을 막아 물이 빙빙 돌며 기포를 만들어내고 있다. 열어주자 후련하게 물이 흐르더니 금세 말간 줄기를 되찾는다. 돌돌 여돌차게 들리는 물소리가 한결 더 경쾌하다. 정신을 명징하게 만드는 소리다. 커다란 폭포 소리도 감동을 주지만 작디작은 쏠 소리가 이럴 땐 훨씬 더 찰지게 배어든다.


 

숲에 빙의되어 숨 쉬는 사실조차 잊고 있다가 천천히 일어나 주위를 돌아본다. 산초나무가 손짓한다. 건너편 비탈 활엽수 뒤에 몸을 숨겼던 소나무도 슬며시 나선다. 돌 틈과 나무 사이 좁은 땅에 깜냥 맞춰 이고들빼기, 좀깨잎나무, 졸방제비꽃, 주름조개풀들이 해를 향해 까치발하고 있다. 빛살과 마주하는 온갖 방식으로 조그만 숲은 queer 자체다.

 

헬리콥터가 온 산을 뒤흔들며 다가와 사패산 보루 쪽에 머문다. 사고가 난 듯 한참이나 지나고야 떠난다. 어떤 상황에서는 어머니 같은 산이 또 다른 상황에서는 맹수 같기도 한 법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아우라지도 ‘노나. 아우라지라고 거슬러 찾아온 내게 여기는 그런 나누라지다: 섣부른 신비주의 합일보다 엄연한 경계 앞에서 투명하라.

 

바위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긴다. 내가 이제 마주한 현실이 마지막 승부수를 요구한다면 어찌할까. 무엇이 승부가 될까. 수는 있을까. “나로서는아직 알 수 없다. 내 황석공(黃石公)이신 도봉산 회룡계께서 일묵만뢰(一黙萬雷) 가르치실 테다. 다시 길 없는 길을 떠날 때 엄숙과 질탕이 갈마들며 심사가 묘연해진다. 오라시면 오고 가라시면 갈 따름이다.

 

* '노나지'는 분리를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 '노누다'에서 끌어와 새로 만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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