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맞은 가을

처음 피운 잎손

꼬옥

 잡고는





땅에 떨어져 비로소

호수 하나 품으니 

하늘이 내려와 앉는다 





가을의 묵시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월호참사 2기 특조위 설립!

사회적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입법 촉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추사 글씨를 모른다고 할 한국인은 삼척동자 빼면 아마 없을 것이다. 심지어 글씨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귀동냥으로나마 추사체가 명필임을 말한다. 나 또한 10대 때 교육을 통해 그런 사실을 주입(!) 받은 이후 추호의 의심 없이 반세기 가까이 살았다. 최근 불현듯 전혀 다른 깨달음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1학년, 봉은사로 봄 소풍 와서 판전 현액을 처음 보았다. 미술 선생님께서 곡절을 말씀해주셨다. 마냥 신기하게 생각하고 감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새롭다. 지난 일요일 오전 판전 현액을 다시 보기까지 아마 수 십 차례 보았을 것이다. 그날따라 글씨에는 병중무심이라는 평평한 내러티브 이상의 진실이 숨어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천천히 걸으며 느슨히 생각을 펼쳐 놓기 시작했다.


내 상상의 풍경에는 기억 속에 있던 추사의 글씨들이 몇 단계를 거쳐 늘어서고 있었다. 붓을 처음 잡았을 때, 그러니까 배우기 전 어린 추사의 neoteny 가득한 글씨. 선배 명필들의 글씨를 본떠 열심히 배워 틀 갖춘 추사의 글씨. 학습 명필에 만족하지 못한 추사의 새로운 시도로서 어린 시절 neoteny를 녹여낸 글씨, 이른바 추사체. 추사체마저 던질 수밖에 없었던 아픈 추사의 <판전> 글씨. 전경을 본 뒤 나는 생각했다. 원효 일생 같구나.


추사는 타고난 악필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명필을 섭렵한다. 아무리 꿰뚫어도 성에 차지 않는다. 2% 모자란다. 타고난 음치가 아무리 교정해도 끝내 완벽하게 되지 않는 것처럼 타고난 악필은 아무리 흉내 내도 학습 명필이 될 수 없다. 흉내 내도 안 된다는 사실이 반전의 근거가 된다. 추사는 흉내를 포기, 아니 거절하기로 한다. 자신만의 손길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그 손길은 바로 neoteny 가득한 어린 손길이었다. 단순히 복귀한 것이 아니다. 인고의 닦음이 neoteny에 배어들었다고 할까. neoteny가 인고의 닦음을 뚫고 배어나왔다고 할까. 부정의 극단에서 맺은 열매가 이른바 추사체다.


추사가 금석문에 정통했다는 사실은 반증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금석문은 neoteny 가득한 글씨다. 그것을 추사가 neoteny로 인식했다고 할 수는 없다. 거꾸로 그 무구함의 도저한 예술성을 간파한 자신의 neoteny에 이끌려 자신의 글씨에 녹여냈다고 해야 한다. 추사 이외의 사람은 끝내 자신의 neoteny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어른 글씨, 그러니까 흉내 명필로 생을 마감했다. 추사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neoteny를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 글씨에 근원성radicality을 부여했다. 이것이 추사의 위대함이다.


물론 여기가 끝이 아니다. <판전>이 남아 있으니까. 천재는 남이 만든 유類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는 자다. 자기 유를 만드는 자다. 그러나 자기가 만든 유를 타고 앉는 자는 진정한 천재가 아니다. 자기 유도 스스로 놓아버리는 자가 진정한 천재다. <판전>은 바로 그 놓아버림이다. <판전>은 추사체가 아니다. <판전>은 추사체가 아닌 것도 아니다. 원효의 마지막 같구나.


사실 이런 추사 가설은 자주 드나드는 인사동 한 음식점에 걸린 어떤 글씨를 보면서 든 생각이 단초가 되었다. 내가 한눈에 그가 누군지 알아볼 정도로 그 글씨를 쓴 사람은 우리 시대의 뜨르르한 이른바 대가다. 본 글씨 옆에 서명한 작은 글씨가 있다. 본 글씨와는 전혀 다른 서체다. 심지어 재빨리 휘갈겨 쓴 글씨가 분명하다. 나는 서예를 배운 일이 없어서 본디 그렇게 하는 것이 관행인지 아닌지 잘 모른다. 어쨌든 그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본 글씨만 예술이고 서명은 아닌가? 그림 작품이라면 모르되 같은 글씨 아닌가?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서명 글씨가 악필이라는 데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내 의문은 단되직입이 된다. 갈고 닦아, 그러니까 열심히 흉내를 낸 뒤 나름의 멋을 부가해 학습 명필의 반열에 올랐지만, 본디 저 사람은 악필이다. 악필을 감춘 채 일생을 명필로 추앙받으며 살았다. 저 사람이 참 명필이려면 자신만의 악필을 인정하고 머금은 자태가 글씨에 드러나야 하지 않나? 이 때 홀연히 추사가 떠오른 것이다.


누구도 타고난 악필이 아닌 사람은 없다. 저마다 다 다른 악필이다. 아니 악필이랄 것도 없다. 흉내 내지 않은, 훈련되지 않은 자연 글씨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배워서 고쳐진 글씨는 남의 글씨다. 진정한 내 글씨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내 운명과 인연 속의 neoteny를 받아들여 무애자재로 나아가는 것이 도道다. 어디 글씨뿐이랴. 삶이 모두 그렇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을이 잎으로만 오는 것은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시간 속에서나

살 수 있는데, 문득

시간 앞에 선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