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한민국에서 정치적 야심이 있는 자라면 어떤 분야 누구라도 여의도행을 노린다. 사업을 하다가도, 대학 총장을 하다가도, 영화 배우를 하다가도, 바둑을 두다가도, 소설을 쓰다가도···성공했다는 마지막 표지로 국회의원이 되려 한다.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국회의원이 상징하는 특권과 명예에 뜻을 두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특권을 누린다. 그들이 헌법기관으로서 국가와 국민에게 필요한 법을 제정하는 일 자체가 그런 특권을 누려야 할 논리적 근거일 수는 없다. 처음 헌법에서부터 박정희 유신헌법에 이르기까지 국회의원 특권적 지위를 창안하고 유지·강화한 주체가 특권층 부역 집단이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회의원은 그 뿌리를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한 입법계 부역자에 두고 있다.

 

수작(습작) [138]

 

고영희 고중덕 고흥겸 고희경 권중현 권태환 김교신 김덕한 김병익 김사철 김석기 김성근 김세현 김영수 김영철 김정록 김종한 김춘희 김학진 김호규 남장희 남정철 민건식 민규현 민병삼 민병석 민상호 민영규 민영기 민영린 민영소 민영욱 민영휘 민종묵 민철훈 민충식 민태곤 민형식 민형식 민홍기 박경원 박기양 박부양 박서양 박승원 박영효 박용대 박정서 박제빈 박제순 박찬범 성기운 성일용 성주경 송병준 송종헌 윤강로 윤덕영 윤웅렬 윤의섭 윤택영 이강식 이건하 이경우 이규원 이규환 이근명 이근상 이근택 이근호 이기용 이기원 이능세 이달용 이덕용 이동훈 이범팔 이병길 이병무 이병옥 이봉의 이영주 이완용 이완용 이완종 이용원 이용태 이원호 이윤용 이인용 이장훈 이재각 이재곤 이재극 이재완 이정로 이종승 이주영 이중환 이지용 이창수 이창훈 이충세 이택주 이풍한 이하영 이항구 이해국 이해승 이해창 이홍묵 이홍재 임낙호 임선재 임선준 장석주 장인원 정낙용 정두화 정주영 정천모 정한조 조대호 조동윤 조동희 조민희 조용호 조원흥 조중구 조중수 조중응 조중헌 조희연 최석민 최정원 한상기 한상억 한창수

 

중추원 [335]

 

강경희 강동희 강번 강병옥 강이황 강필성 고영희 고원식 고원훈 고일청 고희경 구연수 구희서 권봉수 권중식 권중현 권태환 김갑순 김경진 김관현 김교성 김기수 김기태 김기홍 김낙헌 김돈희 김동준 김동훈 김두찬 김명규 김명수 김명준 김병규 김병욱 김병원 김부원 김사연 김상설 김상섭 김상형 김상회 김서규 김성규 김신석 김연상 김연수 김영무 김영배 김영진 김영택 김영한 김우영 김원근 김윤복 김윤정 김재환 김정석 김정태 김정호 김제하 김종흡 김준용 김진수 김창수 김창한 김춘희 김태석 김태집 김필희 김하섭 김한규 김한목 김한승 김현수 김화준 김희작 나수연 남궁영 남규희 남백우 노영환 노준영 노창안 문명기 문종구 민건식 민규식 민병덕 민병석 민상호 민영기 민영은 민영찬 민원식 민재기 민형식 박경석 박경양 박기동 박기석 박기순 박기양 박두영 박보양 박봉주 박봉진 박상준 박승봉 박영철 박영효 박용구 박의병 박이양 박제빈 박제환 박종렬 박중양 박지근 박철희 박필병 박해령 박흥규 박희양 박희옥 방의석 방인혁 방태영 백인기 상호 서병조 서병주 서상훈 서회보 석명선 선우순 성원경 성하국 손재하 손조봉 손창식 송문화 송병준 송종헌 송지헌 송헌빈 신석린 신석우 신우선 신응희 신창휴 신태유 신현구 신희련 심선택 심환진 안병길 안종철 양재창 양재홍 어담 어윤적 엄준원 엄태영 염중모 오세호 오재풍 오제영 오태환 원덕상 원병희 원응상 위기철 위정학 유기호 유만겸 유맹 유빈겸 유성준 유승흠 유익환 유정수 유진순 유태설 유혁로 유흥세 윤갑병 윤덕영 윤정현 윤치소 윤치오 윤치호 이갑용 이강원 이건춘 이겸제 이경식 이계한 이교식 이근상 이근수 이근우 이근택 이기승 이기찬 이도익 이동우 이만규 이명구 이범익 이병길 이병렬 이병학 이봉로 이선호 이승구 이승우 이영찬 이완용 이원보 이윤용 이은우 이익화 이장우 이재곤 이재정 이종덕 이종섭 이준상 이지용 이진호 이충건 이택규 이택현 이하영 이항직 이흥재 이희덕 이희적 인창환 임선준 임창수 임창하 장대익 장상철 장석원 장석주 장용관 장윤식 장응상 장인원 장준영 장직상 장헌근 장헌식 전덕룡 전석영 전승수 정건유 정관조 정교원 정난교 정대현 정동식 정병조 정석모 정석용 정순현 정연기 정인흥 정재학 정진홍 정태균 정해붕 정호봉 조경하 조민희 조병건 조병상 조상옥 조성근 조영희 조원성 조재영 조중응 조진태 조희문 주영환 지희열 진학문 진희규 차남진 천장욱 최남선 최린 최상돈 최석하 최승렬 최양호 최연국 최윤 최윤주 최재엽 최정묵 최준집 최지환 최창조 최창호 최형직 피성호 하준석 한규복 한상룡 한상봉 한영원 한익교 한정석 한진창 한창동 한창수 허명훈 허진 현기봉 현은 현준호 현헌 홍성연 홍승목 홍우석 홍운표 홍재하 홍종국 홍종억 홍종철 홍치업 황종국

 

일본 제국의회 의원(귀족원중의원) [11]

 

김명준 박상준 박영효 박중양 박춘금 송종헌 윤덕영 윤치호 이기용 이진호 한상룡

 

식민 지배 들러리 노릇이나 하면서 특권 위에서 놀던 이 자들 개인적 의식은 물론 제도적 무의식까지 고스란히 승계한 제1대 국회는 어떤 과정을 통해 구성되었고 국회의원은 누구며 무슨 짓을 했는지 살펴보면 그 뒤 역사가 흘러가는 방향을 알 수 있다. 202032일 민플러스(http://www.minplusnews.com) 김장호 기자가 쓴 기사를 발췌 인용한다.

 

“1대 국회 의석수는 200석에 입후보자는 942명이었다. 비례는 없었고 소선거구제를 채택했다.

 

선거 결과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이하 독촉’)55명 당선으로 제1당이 되었고,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29, 무소속이 85석으로 가장 많았다.

 

독촉은 이승만 직계부대였고 235명을 출마시켰다. 한민당은 친일 지주 중심 정당으로 91명을 출마시켰다. 당시 무소속이 많았던 것은 정당 개념이 확립되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한민당이 친일파로 인기가 없어 무소속으로 나온 경우가 많아 실제로는 60~80석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좌익계를 물론이고, 김구 선생계열, 김규식 계열 등 이승만과 한민당을 제외한 대다수 세력이 남한만의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고 선거에 불참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른바 대한민국 제1대 국회, 제헌국회라는 것이 일부 무소속을 제외하고는 친일, 친미, 분단 세력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국회 적폐, 분단 적폐의 시작이었다.

 

해방 당시 우리 민중 누구도 이토록 오랫동안 나라가 분단되어 살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불과 미군정 3년 만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2차 대전 말기 미국의 행보에 대해 우리 민족은 물을 것이 많다.

 

1) 소련의 대일 참전은 미국이 요구했다. 일본은 이미 457월에 항복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미국은 기어이 일본에 86, 89일 원폭을 투하했다.

 

2) 독일은 전범국가로 동서독으로 분단되었다. 아시아에서 전범국가는 일본이었다. 그런데 왜 미국은 811일 한반도를 38선으로 분단했나? (전쟁부작전국 3대 국장이었던 존 헐 중장 녹취록에서 ‘38선은 포츠담((19457)에서 마련됐다’, ‘우리 전략가들은 3개의 주요 항구를 주목했으며, 그 가운데 2개의 항구(인천과 부산)는 우리 지역에 포함해야 하며, 서울 바로 북쪽에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38선을 가장 좋은 위치라고 판단했다라고 회고했다.)

 

3) 미국은 점령군으로 남한에 들어왔다. 반면 소련은 원조자로 들어왔다고 했다. 미국은 조선 민중이 세운 인민위원회와 자주 관리를 철저히 부정하고 민중들을 탄압했으며, 친일파를 대거 등용했다.

 

4) 19451227일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서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실제로 장기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미국이었다. 동아일보에 그 정보를 줄 수 있는 곳은 미국밖에 없었고, 미국 신문보도보다 먼저 보도되었다. 그리고 친일파들은 이때부터 애국자로 행세하기 시작했고, 민족역량은 두 동강이 났다.

 

5) 미국은 결국 미소공동위원회(146320, 247521)를 무산시키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끌고 갔다(471114).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가는 것은 미소 합의에 어긋나는 불법일 뿐만 아니라 유엔 권한으로 다룰 수 있는 전후 처리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과 조선 민중의 어떠한 요구도 무시하고 결국 거수기 유엔을 도구 삼아 유엔감시 하의 남한 단독선거를 강행한다. 5.10 총선, 단독선거는 미군정 3년이 만들어낸 것이다.

 

분단을 막고 통일 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전 민족적 노력이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중도파들은 46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직후 좌우합작운동으로 조선인의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통일을 이루고자 하였다. 여운형 선생은 좌우합작을 넘어 남북 합작에까지 힘을 기울여 다섯 차례 38선 이북을 방문하여 김일성 당시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직접 만나 임시정부 수립에 대해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운형 선생은 1947719일 암살된다.

 

단독총선이 명확해지자 이번에는 김구 선생, 김규식이 나섰다. 김구 선생은 남북협상을 제안했고, 47419일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가 평양에서 개최되어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공동성명서 4개 항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외국군대는 우리 강토로부터 즉시 동시에 철거하는 것이 조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정당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2) 남북 지도자들은 외국군이 철거한 이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3) 외국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제 정당들의 공동명의로 전조선 정치 회의를 소집하여 조선 인민의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다.

4) 남조선 단독선거의 결과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김구 선생도 단독선거 이후 49626일 암살된다. 민중들은 전평 30만 파업을 포함한 2.7구국투쟁과 4.3제주항쟁으로 단독정부 수립 반대 투쟁에 나선다.

 

그러나 이미 이승만 등은 단독정부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후 194663일 일찌감치 이승만은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발언한다.(정읍발언)

 

1대 총선을 위한 선거법은 1948317일 미군정법률 제175호 국회의원선거법으로 공포된다. 이 법안 작성에는 미군정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만들어 놓은 조선인 과도입법의원들도 참가했다. 그런데 이들은 선거권·피선거권 나이를 25살과 30살로 높이려 했다. 청년들이 좌익이 많다는 이유로 이들을 배제하기 위함이었다. 기표 방식도 도장을 찍는 방식이 아니라 자서 방식(후보 이름을 쓰는 방식)을 택했다.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 상황에서 사실상 하위 계층을 선거에서 배제하기 위한 장치라는 지적이 나온다. 또 친일파와 부일 협력자들의 선거권·피선거권을 박탈하려는 법안은 우익 세력의 반대로 사문화되고 말았다. 차후 단독 선거 실시가 기정사실화된 후 미군정이 개입하여 선거권을 21세로, 피선거권을 25세로 일부 조항을 바꾼다.

 

선거 전후 분위기는 매우 험악했다.(이하 위키백과 주로 참조) 미군정과 우익은 총선거가 완전 독립과 통일을 위한 것이며 선거에 반대하는 것은 비애국적이라며 강압적 분위기를 강화했다. 1948329일부터 49일까지가 유권자 등록 기간이었다. 4월 말, 당시 신문들은 500명을 인터뷰한 결과 91%가 선거 등록을 강요당했다라고 보도했다. 경찰과 우익 세력은 쌀 배급과 선거인등록을 연계시키는 방법으로 강압적인 유권자등록에 나섰다.

 

428, 유엔 임시위원단은 투표자 등록 부정행위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적했다고 한다: (1) 미곡 배급통장을 발급하는 지방 행정 사무실에서 등록을 실시한 사실 (2) 통장을 몰수하겠다고 위협해서 강제 등록 (3) 경찰과 청년단체가 등록을 권유한 건 일종의 강제로 간주됨. 유엔 임시위원단 위원장 야심 머기(시리아 대표)‘(남한은) 경찰국가일 뿐만 아니라 선거 지지파들이 경찰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또 지방 당국을 조정하여 완벽하게 선거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남한에서 자유선거를 치르기 위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지 않다라고 했다.

 

김구 선생도 국민은 경찰과 향토 보위단의 억압적인 태도 하에 등록하고 투표를 강요당했다라고 밝혔다.

 

선거 당일에는 서울에서 수천 명의 경찰과 특임된 민간인이 미군 지원 아래 중요 도로와 교차로에 바리케이드를 쳤으며 각 골목 입구에는 경비대가 배치됐다. 민간 경비대원은 도끼 자루, 야구 배트, 곤봉을 휴대했다. 경찰은 카빈 소총으로 무장했다. 외신 기자들은 이 광경을 계엄 하 도시 같다고 했다. 부인들은 투표장으로 가면서 가만가만히 주위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야심 머기는 투표소 주위나 안에서 향보 단원을 발견했다. 어떤 투표소엔 경찰이 투표소 안에 있었다. 어떤 투표소는 (투표의) 비밀이 보장되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1대 국회는 531일 최연장자 이승만을 임시 의장으로 추대하고 이승만을 의장으로 신익희와 김동원을 부의장으로 선출한다. 또한 유진오 등이 주도하여 712일 헌법을 제정하고 20일 이승만과 이시영을 제1공화국의 정·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1945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1대 국회 흑역사는 단연 반민특위 해체다.

 

19489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함에 따라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설치되어 활동에 들어갔다. 악질 친일 기업가 박흥식, 조국의 젊은이들을 일제 전쟁터로 내몰았던 최남선·이광수, 친일 경찰 노덕술 등이 특위 조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당시 국회 부의장이던 김약수 등을 외국군 철수, 남북 정치 회의 등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남로당과 접촉하고 공산당에 협조한 혐의를 씌워 19495, 6월 국회프락치사건을 일으켜 구속한다. 이들은 반민특위 핵심 의원들이었다. 이후 194966일 반민특위가 친일 경찰 최운하를 체포한 것에 반발하여 내무차관 장경근 등이 주도하여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고 반민특위 특경대를 무장 해제함으로써 사실상 반민특위가 와해된다. 결국 반민특위는 194910월 법 개정으로 해체되고 만다. 친일 매국노 청산은 여기서 무너지고 친일 기득권 세력이 장장 70여 년의 세월 대한민국을 지배하게 된다.”

 

여기서 대한민국 국회와 국회의원 기본 틀이 형성되었다. 미군정이 왜곡한 대의민주주의는 처음부터 이승만과 김성수를 아이콘으로 하는 두 부역 집단을 축 삼아 겉으로는 대립하고 속으로는 야합하는 가짜 구도를 세워 민주정치에 서투른 대중을 기만했다. 이승만 패거리는 보수를 전유하고 김성수 패거리는 진보를 전유해 참된 보수도 참된 진보도 설 수 없는 정치 지형을 만들어 놓았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자주 성향을 지닌 무리가 김성수 패거리 일부 계열을 이루기는 했지만, 그 자체가 잘못이었다. 자주 계열이 단일 대오를 형성해 특권층 부역 집단과 맞서는 정상적인 큰 구도를 세울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중첩 식민지 상태에 있는 대한민국에서 근원적 대립 구도는 보수: 진보, 독재: 민주 따위가 아니라 부역: 자주여야 하는데 이를 비틀어버린 것이다. 기왕 그렇게 된 바에야 김성수 패거리, 곧 오늘날로 말하면 민주당은 trickster로서 철저히 기능해야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국면마다 특권층 부역 집단으로서 진면모를 드러내며 ‘2중대노릇을 해 정치를 퇴행시켰다. 어찌 보면 이승만 패거리가 저들 본능대로 처 저지른 포악보다 민주당 패거리가 자주·민주·통일이란 탈을 쓴 채 벌여 온 분열, 무능, 비겁이 더 유독했을 수도 있다. 총선 사상 유례없이 180명 국회의원을 내고도 정권을 팔아먹은 뒤 아무 짓도 하지 못하는, 아니 않는 작금 상황을 보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전망은 물론 아주 어둡다. 민주당 내부에 이런 각성을 한 자가 설혹 있다 하더라도 힘을 얻을 리 만무기 때문이다. 없거나 흩어져 숨어 있는 자주 기상을 어떻게 사회정치적 큰 힘으로 일으킬 수 있을까. 까마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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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3-08-02 14: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겉대속야 (겉으로는 대립하고 속으로는 야합하는) , 대한민국의 정치 구조를 이보다 더 명확하게 표현한 말은 없는 것 같네요.

bari_che 2023-08-08 15:27   좋아요 0 | URL
예, 아주 절망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