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오전 느지막이 출발해 도봉산으로 향했다. 서울 5대 산 두 번씩 드나들기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회룡천이 흐르는 계곡으로 올라가 도봉천이 흐르는 계곡으로 내려올 생각이었다. 올라가는 쪽은 눈이 있어도 괜찮고 내려가는 쪽은 눈이 있으면 위험하므로 북한산국립공원 도봉분소에 전화해 남쪽 사면 눈이 다 녹았는지 문의했다. 직원 입에서 아이젠이라는 단어가 나오긴 했으나 그리 심각하지 않게 들려 회룡천을 따라 눈 덮인 골짜기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回회龍룡천이 갈라지면서 생긴 두 계곡 분기점을 확인하고 지도로 살펴본 코스로 접어든다. 그런데 스마트폰 위치 표시가 본디 가려고 했던 길과 다른 길 위에 내가 서 있다고 가리킨다. 마침 지나가는 주민에게 물어보니 내가 본디 가려던 길은 등산로가 아니란다. 그가 알려준 곳에 가보니 과연 입구가 폐쇄돼 있다. 잠시 망설이는 동안 내 발은 이미 막아 놓은 밧줄 너머에 가 닿는다. 애당초 그 길로 가려던 이유가 다른 지류보다 길게 계곡을 이루기 때문이니 당연하다 여긴다. 눈이 녹지 않아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순간, 한 사람이 낸 발자국 행렬이 눈에 들어온다. 예상보다 평소보다 더 어려움을 감지면서도 홀린 듯 그 발자국을 따라간다. 이제 내려갈 수는 없다 싶은 산등성이에 이르렀을 때 홀연 발자국이 사라진다. 순간 날카로운 당혹감이 들이닥친다. 잠시 숨을 고른 뒤, 그제야 스마트폰을 꺼내 지도를 살핀다. 아, 이런! 발자국 따라오느라 방향을 확인하지 못한 사이 예정된 방향과 한참 틀어져, 계곡 좌측 능선 지점에 얹혀 있다. 본디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고 바위가 가로막으며 시시각각 시선을 가차 없이 꺾어댄다. 바위 모서리, 관목 줄기, 교목 뿌리를 의지해 오르고 오르는데 온몸이 후들거린다. 아침 대충 때우고, 점심 굶고 온 터라 저혈당 상태가 된 탓이다. 가슴 터질 듯한 거친 호흡 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더 문제는 해가 이미 기울고 있다는 사실이다. 계획을 수정하지 않으면 어둠 속에서 오도 가도 하지 못하고 구조를 요청하거나 헤매다가 다치든 죽든 하는 불상사가 벌어질 판이다. 회룡천 쪽으로 되돌아 내려가는 일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 그 찰나 아득함이 밀려오고 뒤이어 절망감이 휘감겨오지만 머뭇거릴 틈이 없다. 무조건 아래를 향해 미끄러지고 구르며 가기 시작한다. 눈 덮인 얼음 밑으로 물 흐르는 소리가 실낱 같이 들려오는 계곡까지 내려온다. 군대처럼 달려드는 크고 작은 바위 때문에 물길을 행로로 잡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다시 능선으로 향한다. 절벽에 가까우나 가장 짧은 코스를 택해 필사적으로 기어오른다. 굴러떨어질 위기를 서너 번 겪으며 겨우겨우 능선에 올라선다. 한숨 돌리며 살펴보니 이미 장갑은 너덜거리고, 운동화 속은 눈이 들어가 녹은 물로 질벅거리며, 손과 팔다리는 상처투성이다. 상처를 살피다 문득 저만치 보니, 아, 또 한 사람 발자국이 눈에 총탄처럼 날아든다. 올라올 때 겪은 일은 까마득히 잊고 또 홀린 듯 발자국을 따라간다. 점점 얇아지는 햇빛을 의식하며 정신없이 걸어 이젠 안심해도 괜찮겠구나 싶은 지점에 이르러 주위를 둘러본다. 아뿔싸! 다시 발자국이 사라지고 없다. 그 찰나 소름이 돋는다. 감전 상태로 꼼짝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못 박힌다. 으스스 전신을 휘감는 추위에 문득 놀라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이리저리 더듬어 길을 찾는다. 몇 차례 가던 길 되돌아오기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평평한 물가 길을 발견한다. 얼마 뒤 낯설지 않은 작은 둔덕을 보고 올라가니 바로 거기가 그 처음 자리, 폐쇄된 입구다. 그래서 여기 이름은 '용龍이 돌아오다回'.
돌아오는 길 회룡폭포를 막 지날 무렵 어떤 풍경 하나가 벼락같이 떠오른다. 황석공이 한 번은 한 짝, 또 한 번은 두 짝, 신발을 벗어 던지고 그것을 주워 신기도록 해서 장량으로 하여금 병법 깊은 뜻을 깨닫게 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나는 숲을 떠나면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하루가 지나자 온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지금은 더욱 아프다. 얼굴을 뺀 모든 근육이 두들겨 맞은 듯하다. 깨달음은 그렇게 숲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나왔던 내 몸에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