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에서 치과 하는 지인이 있어 치료받고 인덕원역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갈현천을 거슬러 올라가 관악산 문원 계곡으로 갈 생각이었다. 갈현천 주위는 얼마 전까지 대부분 숲 또는 녹지였다. 따라가면서 보니 엄청난 규모 토건 탓에 폐허로 변해 있었다. 육중하게 가라앉는 가슴에 통증이 실려 빗속을 걷는 발걸음을 더욱 질척이게 했다. 지구생태계에서 인간은 악성종양이 맞다. 결코 은유가 아니다.

 

설상가상 구글 지도에 있는 군부대 시설을 잘못 판독해 통과가 가능한 전원마을쯤으로 알고 접근하면서 행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길 없는 풍경을 더듬으며 길을 탐색하며 얼마를 헤맸을까, 느닷없는 기억이 튀어나왔다. 관악산 둘레길이었다. 점점 더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이내 강풍을 동반한 폭우로 바뀌어 세차게 퍼붓기 시작했다. 온몸이 물에 빠진 생쥐처럼 변했고 폭우는 언제 그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되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큰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기도 하고 나처럼 비를 쫄딱 맞고 있는 버섯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개기는 동안 어느덧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과천 야생화 자연 학습장으로 들어가 엉망이 된 행장을 수습하고 문원 계곡 아닌 과천 시내로 갔다. 이 상태로 산을 오르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일단 늦게나마 점심부터 먹어야 했다. 메밀국수를 먹고 밖으로 나오니 간간이 햇살이 비치는 날씨로 바뀌어 있었다. 방향을 거꾸로 잡았다. 구세군사관학교 뒤 작은 계곡에서 들어가 문원 계곡으로 나올 생각이었다.

 

구세군사관학교 교정은 추억이 있는 곳이다. 조용하고 분위기가 좋아서 어린 딸아이와 함께 쉬러 자주 찾았었다. 옛 모습이 기본적으로는 남아 있었으나 전경이 달라져 잠시 헷갈렸다. 이내 방향을 잡고 계곡을 찾아 들어갔다. 물과 바위 경관이 정말 아름다웠다고 간직했던 기억은 그대로였다.

 

그때 보았던 숲 더 깊숙이 들어가자 좋은 풍경 이상으로 길이 좋지 않았다. 비는 바위만 미끄럽게 만들지 않고 작은 길에 그나마 남아 있는 인적을 흐트러뜨려 길을 어렵게 만들었다. 급기야는 크게 길을 잃어 전혀 길이 아닌 곳을 헤치며 나아가고 말았다. 물소리를 따라왔다고 생각한 바와 달리 나는 거의 반대 방향 능선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길을 잃을 때는 언제나 그렇듯 지도 볼 생각을 까맣게 잊는다. 되돌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야 비로소 스마트폰 지도를 열지만 때는 이미 늦다. 수직에 가까운 경사를 헉헉대며 벌벌 떨며 오르는 동안 아름다운 기억은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비 탓으로 인적이 끊긴 깊은 산속을 홀로 헤맬 때 느끼는 외로움, 아뜩함, 무서움은 더없이 예리했다. 와중에 경이로운 버섯을 발견하면 그런 감정들은 찰나적으로 동강 났다. 고맙습니다, 인사하며 길을 열어갔다. 문득 하늘 선이 나지막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암석군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 너머에 능선길이 있음을 직감하고 안심했다. 능선길에 올라서 저 멀리 누워 있는 과천 시내를 내려다보는데 홀연히 한 생각이 돌이켜졌다.

 

숲에서 길을 잃는 까닭은 숲에 빙의되기 때문이다.”



숲에 빙의되었을 때 눈에 들어온 버섯

 

여느 만신들은 인신에 빙의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스스로 인간을 사랑해 인간이 된 나무라 여기며 살고 있다. 숲에 빙의되는 일이 내 이치에 맞다. 길 잃는 순간과 길 잃은 뒤 일어나는 일들을 돌이켜보니 그제야 깨달아진다. 길을 잃는 순간 나는 개별자 인간 정신을 놓는다. 숲으로 배어들어 영적 상태가 된다. 길을 잃는 순간 나는 인간 흔적을 놓는다. 숲으로 배어들어 나무 본성이 된다. 그 삼매경이 내가 길을 잃었다는 각성을 살포시 붙잡아둔다. 바로 이 짧은 시간이 숲 제의 절정이다.


 

길 없는 골짜기 숲을 헤치고 올라와 능선에서 내려다본 과천


숨이 고르게 잡히고 땀이 잦아들자 나는 위로 향한 능선길을 크게 돌아 문원 계곡으로 향했다. 계곡 바닥에 닿으려면 아직 먼데 벌써 시원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물소리 따라 계곡 아래로 깊숙이 들어서니 장마철 숲에서 풍기는 발효 향이 은은하다. 아까 내 귀를 두드리던 물에 손과 얼굴을 씻고, 발을 담그고 가만히 앉았다. 그제야 숲을 떠나서 도시로 돌아간다는 알아차림이 들어왔다.

 

문원 계곡에서 나와 과천 시내로 향하지 않고 관악산 둘레길로 접어들었다. 아침에 멈추었던 바로 그곳에서 시작해 정부 청사 뒤로 난 소로를 따라 걸어 과천 시청으로 나왔다. 온몸이 흠뻑 젖어 있다. 몸살 나지 않겠냐며 걱정하는 아내 전화 목소리를 웃음으로 감싼 채 나는 과천 정부청사역으로 들어섰다. 인덕원역을 나선 지 7시간 만이었다. 걸은 거리는 20km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23-07-10 1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섯번째 대멸종은 그 악성종양에서 출발하고 있죠.

bari_che 2023-07-11 08:05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의학에서는 악성종양 세포를 본디 세포로 되돌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데, 인간은 과연 어떨는지 궁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