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판전. 추사가 와병 중 무심의 경지에서 쓴 고졸한 현액이 세월 따라 낡아간다. 그 아래 구복 의식 집전하는 승려의 명품 운동화와 기이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예술은 무엇인가. 종교는 또 무엇인가. 가을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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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달리 막 김치 대하기가 힘들었다. 막 김치란 정성 없이 막 담았다는 뜻이 아니다. 누가 차마 김치 담는 마음을 평가하랴. 내가 막 김치라 하는 것은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배추의 본디 자태-나는 강원도 평창의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라 오달진 배추의 자태를 잘 안다-에서 소외된 빈곤과 슬픔의 김치가 막 김치다. 빈곤과 슬픔을 담은 그 막 김치는 바로 우거지김치다.


도시 빈민으로 흘러들어 보낸 10대의 혼돈 한복판에서 어미 없는 나를 지켜주신 할머니의 빈곤은 늘 시장의 변두리 채소가게 언저리를 맴돌곤 했다. 거긴 우거지가 있었다. 돈 없어도 새끼 굶겨죽이지 않을 한 움큼 희망이 있었다. 할머니는 ㄱ자 허리를 이끌고 우거지를 주우셨다. 어린 나는 그 할머니 마음 한 자락을 부여잡고 주춤주춤 따라 나섰다. 가고 싶지 않았다. 굶어죽을지언정 우거질랑은 먹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할머니 억장 무너질까 헤아려 매번 따라나서던 착한(?) 손자 녀석이 어느 날 발작을 일으켰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던 거다. 괴성을 지르며 할머니 손을 뿌리치고 도망쳐버렸다. 한 식경 떠돌다 집으로 들어갔다. 밀가루 풀죽 같은 수제비국 옆에 우거지김치가 할머니처럼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훌쩍거리며 그 우거지김치를 다 먹었다. 애먼 수제비국은 식어만 가고.


우거지김치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채 할머니는 세상을 버리셨다. 할머니가 짊어지셨던 빈곤의 근본을 여적 보듬고 사는 나는 막 김치를 볼 때마다 할머니 우거지김치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우거지김치는 몸서리쳐지는 빈곤을 찰나에 복원한다. 우거지김치는 할머니의 청초한 설움을 단박에 소환한다. 빈곤과 할머니를 끌어안고서야 어찌 무심코 막 김치를 먹을 수 있으랴. 집에서는 아예 막 김치 또는 막 김치 상태인 김치를 식탁에 올리지 않는다. 밖에서 먹을 때, 막 김치가 나오면 애써 피한다. 반백 년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다.


엊저녁 우연히 나는 막 김치 앞에 앉게 되었다. 그 막 김치 앞에서 벼락처럼 나는 할머니 우거지김치를 직면한다. 유심히 젓가락을 댄다. 순간, 아침 햇살 비취면 물안개 사라지듯 막 김치 앞의 응어리가 홀연히 사라진다. 엉엉 울면서 그 막 김치를 다 먹는다. 이제는 무심히 막 김치를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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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11-02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응....이 글 너무 좋아요

bari_che 2017-11-02 13:2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글 쓸 때도 엉엉 울었더니만...^^
 




그 날 그 때 소미신은 알았다, 촛불이 무엇을 이뤄낼 줄.


그 날 그 때 소미신은 알았다, 오늘 또 다시, 촛불 들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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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는 우주 진리를 몸 사건으로 일으킨다. 두 발은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며 움직인다.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미는 동작을 교차 반복한다. 찰나적으로 땅에서 연속되고 나머지 모든 시간 동안은 땅에서 단절된다. 연속될 때는 단정하게, 단절될 때는 기우뚱하게 균형을 이룬다. 걷기는 정확하고 절묘하게 우주 운동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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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왜 달고 다니는지 모리겠네. 나라 위해 목심 바친 것도 아이고, 즈그끼리 놀러가다 죽은 긴데·······.”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내 목에 걸린 노란 리본을 보고 높은 톤의 경상도 말씨로 주위 사람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나는 사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사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지그시 노려보았다. 나지막이 날카롭게 딱 한마디 던졌다.


“미친놈!”


사내는 의외로 비굴한 자다. 눈길을 돌려버린다. 나는 구름에 달 가듯 열차에서 내린다. 세월호사건 일으킨 적폐본진도, 저런 잡것도, 나와 같은 하늘을 이고 있다 새삼 깨닫는 무거운 아침이다. 징글징글한 생이나마 탱글탱글하게 살아가자 싶어 휘파람을 불어본다.


“눈물을 흘리면서 밤을 새운 사람아. 과거를 털어 놓고 털어 놓고 새로운 아침 길을 걸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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