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달리 막 김치 대하기가 힘들었다. 막 김치란 정성 없이 막 담았다는 뜻이 아니다. 누가 차마 김치 담는 마음을 평가하랴. 내가 막 김치라 하는 것은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배추의 본디 자태-나는 강원도 평창의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라 오달진 배추의 자태를 잘 안다-에서 소외된 빈곤과 슬픔의 김치가 막 김치다. 빈곤과 슬픔을 담은 그 막 김치는 바로 우거지김치다.


도시 빈민으로 흘러들어 보낸 10대의 혼돈 한복판에서 어미 없는 나를 지켜주신 할머니의 빈곤은 늘 시장의 변두리 채소가게 언저리를 맴돌곤 했다. 거긴 우거지가 있었다. 돈 없어도 새끼 굶겨죽이지 않을 한 움큼 희망이 있었다. 할머니는 ㄱ자 허리를 이끌고 우거지를 주우셨다. 어린 나는 그 할머니 마음 한 자락을 부여잡고 주춤주춤 따라 나섰다. 가고 싶지 않았다. 굶어죽을지언정 우거질랑은 먹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할머니 억장 무너질까 헤아려 매번 따라나서던 착한(?) 손자 녀석이 어느 날 발작을 일으켰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던 거다. 괴성을 지르며 할머니 손을 뿌리치고 도망쳐버렸다. 한 식경 떠돌다 집으로 들어갔다. 밀가루 풀죽 같은 수제비국 옆에 우거지김치가 할머니처럼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훌쩍거리며 그 우거지김치를 다 먹었다. 애먼 수제비국은 식어만 가고.


우거지김치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채 할머니는 세상을 버리셨다. 할머니가 짊어지셨던 빈곤의 근본을 여적 보듬고 사는 나는 막 김치를 볼 때마다 할머니 우거지김치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우거지김치는 몸서리쳐지는 빈곤을 찰나에 복원한다. 우거지김치는 할머니의 청초한 설움을 단박에 소환한다. 빈곤과 할머니를 끌어안고서야 어찌 무심코 막 김치를 먹을 수 있으랴. 집에서는 아예 막 김치 또는 막 김치 상태인 김치를 식탁에 올리지 않는다. 밖에서 먹을 때, 막 김치가 나오면 애써 피한다. 반백 년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다.


엊저녁 우연히 나는 막 김치 앞에 앉게 되었다. 그 막 김치 앞에서 벼락처럼 나는 할머니 우거지김치를 직면한다. 유심히 젓가락을 댄다. 순간, 아침 햇살 비취면 물안개 사라지듯 막 김치 앞의 응어리가 홀연히 사라진다. 엉엉 울면서 그 막 김치를 다 먹는다. 이제는 무심히 막 김치를 먹을 수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얄라알라북사랑 2017-11-02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응....이 글 너무 좋아요

bari_che 2017-11-02 13:2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글 쓸 때도 엉엉 울었더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