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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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 화제작 중 하나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을 드디어 다 읽었다(그래서 제목도 하루키 옹의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를 패러디해 '적어도 끝까지 안 읽진 않았다'로 해보았다 ^^). 다 읽고난 소감은 엄청 좋은 것도 아니지만 하루키 팬이 읽기에 아쉽지도 않다는 것. 일곱 편의 이야기 하나하나 개성있고, 그러면서도 하루키 고유의 스타일과 메시지를 간직하고 있어 나쁘지 않았다. 


인상적이었던 작품 세 편을 꼽아보자면, 첫째는 <독립기관>. 직업은 성형외과 의사, 오십이 넘어서도 숱한 여성들과 교제하며 화려한 생활을 하던 '도카이'라는 인물이 화자에게 털어놓은 이야기 중 한 대목이 특히 좋았다. "만일 내가 어떤 이유로든 -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지금의 생활에서 어느 날 갑자기 끌어내려져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고 그저 번호뿐인 존재로 전락한다면, 나는 대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pp.141-2) 나 역시 대학교 1,2학년 무렵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고 말까지 통하지 않는 곳에서 오로지 재주를 부리거나 기술을 이용해 생활해야 한다면 난 뭘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무렵이 내가 생애 처음으로 나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한낱 인간'으로 인식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만약 도카이처럼 오십이 넘어서 처음으로 그런 인식이 든다면 얼마나 당황스럽고 막막할까. 그렇게 보면 이십대 초에 뒤늦게 사춘기를 맞은 게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둘째는 <기노>. 주인공 '기노'는 아내가 회사 동료와 바람이 난 장면을 목격하고도 화를 내거나 슬퍼하지 않은 채 한참을 지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의 진짜 아픔을 맞닥뜨린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 고 기노는 인정했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p.265) 감정의 절제, 무미건조함은 하루키 소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기노의 입으로 '감각을 억눌러' 버린다든가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 한다든가 하는 마음의 상태 혹은 태도를 비판한 것이 신선했다. 어쩌면 이제껏 작가는 감정을 절제함으로써 역으로 독자로 하여금 더 많이 느끼고 생각하게끔 해온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셋째는 <사랑하는 잠자>.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하는데 나는 <사랑하는 잠자>가 더 좋았다. 하루키의 예전 단편을 보는 듯한, 기담풍의 분위기도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사랑에 빠진 잠자의 마음을 서술한 대목. "그녀를 생각하고 그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속이 아련히 따스해졌다. 그리고 자신이 물고기나 해바라기가 아니란 사실이 점점 기쁘게 다가왔다. 두 다리로 걷고 옷을 입고 나이프나 포크로 식사하는 것은 분명 몹시 성가신 일이다. 이 세계에는 배워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만일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물고기나 해바라기가 되었다면 이렇듯 신기한 마음속 온기를 느끼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p.311) 사랑에 막 빠졌을 때의 기분을 이토록 적확하고도 사랑스럽게 표현하다니. 리뷰를 쓰며 다시 읽어보아도 좋다. 장편으로 재탄생하길 기대하는 건 무리일런지. 만약 장편이 된다면 (하루키 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1Q84>를 뛰어넘는 작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님 말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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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4-12-26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하루키의 소설을 잘 읽어보지도 않고, 좋아하는 편은 아니에요. 그래도 제목이 끌려서, 그리고 카프카의 소설에 모티프를 얻은 작품이 읽고 싶어서 처음으로 하루키의 소설을 사서 읽어봤어요. 저도 ‘사랑하는 잠자’가 좋았어요.

보물선 2014-12-27 10:32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저도 재밌게 읽었어요. 하루키의 과거 주인공들이 중년이 된 느낌이랄까...

키치 2014-12-27 10:53   좋아요 0 | URL
cyrus 님 )) 저도 `사랑하는 잠자`가 좋았습니다. 하루키와의 첫 만남, 어떠셨는지 궁금하네요 ^^

cyrus 2014-12-27 12:51   좋아요 0 | URL
키치님. 제가 맨 처음 읽은 하루키의 소설이 <상실의 시대>였어요. 군 복무하고 있을 때 읽었는데 이상하게 소설 속 야한 묘사가 있는 페이지만 찢겨져 있었어요. ^^;;

키치 2014-12-27 13:42   좋아요 0 | URL
아..처음으로 `사서` 읽으신 하루키 책이 이 책이셨군요^^ 제가 잘못 읽었습니다.
상실의 시대 에피소드 너무 웃겨요. 따로 검열하는 분이 계신 건지, 아님 누가 읽다가 찢은 건지 궁금하네요 ㅎㅎ
 
여덟 단어 -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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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박웅현의 책을 읽으면 적어도 하나는 건진다.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를 읽고 졸업 후에도 토익 시험 성적이 있으면 필요할 때 쓸 수 있다는 문장에 혹해(?) 올해 토익 시험을 보았고, (아직 다 읽은 건 아니지만) <책은 도끼다>를 읽고 저자가 알랭 드 보통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어 덩달아 그의 책을 여러 권 읽었다. 이번에 <여덟 단어>를 읽으며 메모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이 중에는 무엇이 남을까. 강력한 후보 세 개를 소개해 본다.


첫째는 '개처럼 살자'는 것. 저자는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온 '개들은 원형의 시간을 살고 있다. 행복은 원형의 시간 속에 있다.' 라는 문장을 인용하며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라고 조언한다. 매끼를 처음 먹는 것처럼 맛있게 먹고, 매순간 더할 나위 없이 집중하며 행복하게 사는 개처럼 말이다. 멀티 태스킹도 좋지만 집중하고 몰입할 때만큼 즐기기는 어렵다. 일상에서 보이지 않던 것을 보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고 싶다면 개처럼 현재에 집중해서 살자.

 
둘째는 저자가 미국 유학 시절에 배운 '7 words rule'. 하고 싶은 말을 한 줄로 요약하고, 이를 세 개의 패러그래프로 확장하고, 다시 챕터별로 확장하는 식의 글쓰기 요령이다. 중요한 건 처음에 강력하고 매력적인 한 줄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글도 한 줄로 요약했을 때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면 무의미하다. 앞으로 서평을 쓸 때는 생각나는 대로 난삽하게 쓰지 말고, 먼저 책을 읽고 느낀 점이나 배운 점 또는 책에 대한 설명을 한 줄로 요약하고 이를 확장하는 식으로 써야겠다.


마지막 셋째는 메모하는 습관. 이 책은 챕터 맨앞장마다 저자가 친필로 수첩에 적은 메모를 찍은 사진이 실려 있는데, 자세히 보면 해당 챕터의 전체 내용이 요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저자가 책에 쓸 내용을 메모한 것을 스캔한 것 같다. 사진을 보니 저자가 평소 어떤 식으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생각을 확장하고 정리하는지, 어떻게 기록하는지 등을 알 수 있어 유용했다. 나도 내년에는 저자처럼 메모하는 습관을 길러 글을 쓸 때나 일할 때 요긴하게 활용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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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건 아니겠지? 2 - 어느 만화가의 시코쿠 헨로 순례기
시마 타케히토 지음, 김부장 옮김 / 애니북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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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북스에서 나온 시마 타케히토의 <설마,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건 아니겠지>를 한 줄로 요약하면 '오타쿠 남자와 백수 여자가 시코쿠 헨로를 걷는 이야기' 정도 될까. 시코쿠 헨로는 도쿠시마, 에히메, 고치, 가가와 4개 현으로 이루어진 일본 혼슈 아래에 위치한 섬 시코쿠에 있는 88개의 찰소를 순서대로 순례하는 길을 일컫는다. 정년퇴직자부터 학생, 노숙자, 병자, 도망자 등 수많은 사람들이 장장 1,200km를 걷는 고행을 자처하는 이유는 단 하나,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믿음 때문이다. 여기에 안 팔리는 중년의 에로 만화가와 직장을 때려치우고 일 년을 집에만 쳐박혀 있던 백수 여자가 가세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두 사람 모두 처음엔 이 길을 걸어도 인생이 달라질 것이라고 백 퍼센트 믿지는 않았고 걷는 동안에도 수없이 의심했지만, 다 걷고 난 뒤의 표정은 무척 밝고 행복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 나의 표정도 그랬을까? 이 책을 읽는 내내 계속 웃고 울었으니 아마도 그랬으리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순례자들의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걷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을 떠올렸다. 비록 나는 국토 대장정은커녕 제주 올레길 걷기도 해본 적 없지만, 매주 몇 번은 집 근처 공원을 걷는 '자칭' 걷기 예찬론자로서 걷기의 매력을 아주 조금은 알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걷기의 매력은, 걷기 전엔 귀찮고 걸을 때는 힘든데 걷고 나면 행복하다는 것.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귀찮고 힘들지만 막상 끝내놓고 보면 비로소 의미가 보이고 가치가 느껴지는 일이 살다 보면 제법 많다. 그러니 해보기도 전에 의미를 따지지 말고, 하면서 가치가 있느니 없느니 궁시렁대지 말고 일단 한 번 해볼 것. 그런 의미에서 올해가 가기 전에, 아니 넉넉 잡아 내년 안에 시코쿠 헨로는 못 가도 제주 올레길 한 번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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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심청을 만나다 - 마음속 상처를 치유하는 고전 속 심리여행
신동흔.고전과출판연구모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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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아는 고전을 다른 관점, 다른 방식으로 읽어보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길잡이가 되어줄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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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심청을 만나다 - 마음속 상처를 치유하는 고전 속 심리여행
신동흔.고전과출판연구모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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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개봉한 정우성, 이솜 주연 영화 <마담 뺑덕>은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심청전>을 심청이 아닌 뺑덕어미의 시각에서 재해석했다는 설정만큼은 좋았다. 옛 이야기 속에서 뺑덕은 효녀 심청이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간 사이 아버지 심봉사의 옆자리를 꿰차고 들어앉은 악녀이지만 영화에선 다르다. 뺑덕은 심봉사 때문에 어머니와 뱃속의 아이를 잃은 피해자. 심청은 그런 과거를 모른 채 뺑덕을 무너뜨리는, 마냥 효녀로만은 볼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건국대 신동흔 교수와 고전과출판연구모임이 공저한 <프로이트, 심청을 만나다>도 비슷한 관점을 취한다. 책에 따르면 심청은 눈에 안 보이는 아버지에 대해 과도한 책임감을 지닌 '강박적 배려'의 희생양으로,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아버지 곁을 떠남으로써 오히려 독립된 인간으로 거듭났고 새 삶을 살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심청전의 '진짜' 주제는 '효(孝)'가 아니라, 부모를 위해 나의 욕망을 포기하면서 사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책에는 <심청전> 외에도 <장화홍련전>, <옹고집전>, <변강쇠가>, <심청가>, <흥보가> 같은 민담과 판소리, <홍길동전>, <사씨남정기>, <한중록>, <만복사저포기> 같은 고전문학 작품 속 인물들의 내면을 심리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결과가 담겨 있다. 잘 알려진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홍계월전>, <적성의전>, <상사뱀설화> 등 덜 유명한 작품들도 소개되어 있어 그동안 몰랐던 옛 이야기를 알게 되는 재미도 쏠쏠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서사, 즉 이야기를 통해 독자가 가진 내면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시도다. 서사문학의 구조와 줄거리, 인물 심리를 분석하여 정신적인 문제를 치유하는 시도는 이미 문학과 심리학을 결합한 문학치료라는 학문 분야로 정립되어 있다고 한다. 문학과 심리학 모두 관심 있고 좋아하니 한 번 공부해볼까? 익히 아는 고전을 다른 관점, 다른 방식으로 읽어보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길잡이가 되어줄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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