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단절
링 마 지음, 양미래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1월
평점 :

요즘 나는 애플 TV 드라마 <세브란스 : 단절>을 보고 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마크는 일과 사생활의 기억을 분리하는 시술을 받고 그러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팀에서 일한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직장 생활과 개인 생활이 분리되면 일은 일대로 잘하고 사생활은 사생활대로 관리할 수 있어서 편할 것 같지만, 이 드라마를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오히려 분리된 인격을 이용해 나를 조종하거나 통제하려 드는 사람들 또는 조직이 나타나 더욱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링 마의 소설 <단절>을 읽은 건, 사실 드라마 <세브란스 : 단절>의 원작 소설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확인해 보니 두 작품은 우연히 제목이 겹쳤을 뿐, 소설 <단절>이 드라마 <세브란스 : 단절>의 원작은 아니다. 아니지만, 드라마 <세브란스 : 단절>을 재미있게 보고 있는 만큼이나 소설 <단절>도 재미있게 읽었다. 가상의 상황을 통해 현대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고발하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면도 없지 않다.
소설 <단절>의 주인공은 뉴욕에 사는 중국계 미국인 여성 캔디스 첸이다. 얼마 전 부모님이 돌아가시며 혼자가 된 첸은 동거 중인 남자친구와도 헤어질 위기에 처해 있다. 사진 전공을 살려서 예술 서적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서 출판사에 들어갔지만, 책 만드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아시아의 인쇄 공장에 성경 제작을 발주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와중에 중국 선전 지역에서 발발한 '선 열병' 때문에 아시아의 공장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미국에서도 전염자가 나타나면서 위기감이 커진다.
이 소설은 크게 두 갈래로 진행된다. 하나는 전염병 때문에 점점 마비되어 가는 도시 뉴욕에서 최후까지 살아가는 첸의 일상이고, 다른 하나는 뉴욕을 떠난 첸이 자신처럼 새로운 도시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의 무리에 속해 이동하는 과정이다. 첸은 전염병을 피해 도시를 떠나는 사람들과 전염병에 걸려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직장과 집을 오가는 루틴을 반복하며 일을 한다. 그런 첸을 일 중독자, 사축으로 볼 수도 있지만, 첸이 지켜야 할 가족도 없고 달리 갈 곳도 없어서 끝까지 회사에 남은 것으로 본다면, 최후까지 떠나지 않은 첸의 선택은 오히려 우울의 발로 또는 죽음(을 통한 탈출)에의 희망으로 읽힌다.
마침내 뉴욕을 떠나 새로운 도시로 향하는 과정에서 어느 생존자 무리에 합류하게 된 첸은 중국계 이민자 1세대였던 자신의 부모를 떠올리기도 한다. 자식에게 더 나은 삶을 선사하기 위해 언어도 문화도 낯설고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땅으로 이주한 부모의 삶과, 뱃속의 아기를 지키기 위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생존자 무리에 합류한 자신의 처지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고 쓴웃음을 짓기도 한다. 아시아계 이민자 여성의 서사라는 점에서 <파친코>를 쓴 이민진 작가의 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을 연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