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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평점 :

<여수의 사랑>은 1995년에 출간된 한강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이다. 1970년생인 작가가 1993년 10월부터 1994년 10월까지 약 1년 간 쓴 여섯 편의 단편을 엮었다. 이 시절에는 어떤 소설, 어떤 책이 유행했는지 궁금해져서 베스트셀러 순위를 찾아봤다. 1993년에는 <서편제>, <나의 문화유사답사기>, <7막 7장>, 1994년에는 <일본은 없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1995년에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고등어>, <신화는 없다> 등이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올랐다.
이런 책들이 잘 팔리는 시절이었다고 하니 한강 작가의 소설을 두고 당시 평론가, 독자들이 슬프다, 우울하다는 평을 쏟아낸 것이 이해가 된다. 성공하기보다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고, 서른 이전에도 이후에도 삶에 잔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요즘 독자들은 당시 독자들이 음울하다고 여겼던 이 책의 정서를 보다 친숙하게 여길 것 같다. 소설 속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나 그들이 느끼는 감정도 (당시 독자들보다는) 요즘 독자들이 쉽게 공감할 만하다.
표제작 <여수의 사랑>은 결벽증 때문에 룸메이트를 구하기 힘든 정선이 자흔과 같은 집에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정선은 생활 습관이 전혀 다른 자흔 때문에 골치가 아프지만 월세 부담 때문에 나가라는 말을 못한다. <어둠의 사육제>의 영진은 같이 살던 인숙 언니가 보증금을 가지고 도망가는 바람에 이모 가족이 사는 아파트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된다. 방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영진은 베란다에서 지내게 되는데, 밤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저 많은 아파트 중에 자신의 집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비참함을 느낀다.
<야간열차>의 영현과 동걸도 그렇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한 영현은 동기 중에 가장 먼저 취직한 동걸을 부러워 한다. 그러면서 동걸이 예전에 술자리에서 이야기했던, 청량리에서 동해로 떠나는 야간열차를 종종 탄다. 정작 동걸은 그 야간열차를 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알게 된 후로는 그를 부러워 했던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질주>의 인규는 어릴 때 동네 아이들의 폭력에 의해 동생 진규를 잃었다. 이후 인규는 동생을 죽인 아이들에게 복수를 감행했으나 동생의 죽음을 방관한 어머니와 의붓아버지에게는 복수하지 못하고, 그런 상태로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한다.
<진달래 능선>의 정환은 월세가 저렴하다는 이유로 황씨의 집에 세들어 사는데, 황씨는 아침마다 나무를 태우고 밤마다 우는 기이한 행태를 보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정환은 어릴 때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집에서 도망쳐 나온 기억을 떠올리고, 그때 헤어진 여동생의 안부를 걱정한다. <붉은 닻>의 동식은 폭력적인 성향을 지닌 동생 동영이 제대 후 집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거의 다 불우하고 불행하다. 그런 그들이 좀 더 살아볼 용기를 내게 되는 계기는 대체로 자기 자신보다 더 불우하고 불행한 사람을 만나서이다. 가령 <여수의 사랑>의 정선은 고아라서 고향이 어딘지도 모르는 자흔과 만나면서 자신의 삶을 조금은 긍정적으로 보게 된다. <어둠의 사육제>의 영진은 사고로 가족 모두를 잃은 명환과의 만남을 통해 이모의 집을 떠날 용기를 내게 된다. <야간열차>의 영현은 동걸의 집안 사정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현실 부정을 그만두고 취직을 한다. <진달래 능선>의 정환은 죽은 딸을 그리워 하는 황씨를 보면서 자신만 가족에게 상처를 받은 게 아니라 자신도 가족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산다는 건 괴롭고 힘든 일이지만 나에게만 삶이 힘든 것은 아니다. 나보다 훨씬 더 나쁜 조건에서 사는 사람도 많고, 좋은 조건을 갖췄지만 예기치 않은 사건이나 사고로 인해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사람도 많다. 그러니까 나 자신의 고통만 들여다 보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도 들여다 보라고, 그것만이 내 삶의 '여수'나 '동해'로 나아가는 방법이라고 이 책은 말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