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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자격 - 내가 제대로 키우고 있는 건가
최효찬.이미미 지음 / 와이즈베리 / 2014년 2월
평점 :
주역에 '직방대直方大'라는 말이 있다. 자연히, 스스로, 본능적으로 아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삶은 기본적으로 누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면서 누구나 삶을 위한 준비가 저절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따로 익히지 않아도 특별히 불리할 것이 없다고 강조한다. 우리 동네 김밥집 아주머니의 말은 주역의 이 말과 통하는 것 같다. 그는 힘든 세월을 통해 엄마가 욕심을 버리고 아이의 마음을 잘 다독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자녀로 인해 마음고생 하는 엄마들에게도 이런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한다. "아이마다 자기 몫의 인생이 있답니다." 자식농사는 부모가 필사적으로 달려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네 인생처럼 말이다. (p.147)
아버지는 나한테 한번도 공부하라든가 어떤 대학에 가야한다든가 하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전교에서 1등을 하고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역시 잘했다든가 축하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 그저 묵묵히 지켜봐주셨을 뿐이다. 어머니는 달랐다. 성적이 잘 나오면 잘 나오는 대로 좋아하셨지만, 그만큼 성적이 조금만 떨어져도 불같이 화를 내셨다. 좋다는 학원이 있으면 보내려고 안달이셨고(그러나 나는 가지 않았다), 명문대를 고집하셨다.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축하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서울대, 적어도 연세대나 고려대를 갈 줄 알았던 딸이 그 아래 대학에 간 걸 서운해 하셨다. 대학교에서 성적우수 장학금을 받고, 학교 생활을 열심히 하는 나를 보면서도 반수나 재수를 해서 서울대에 가라고 하셨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지만, 가끔씩 손주는 하버드에 보내겠다는 말씀을 하실 때마다 아물어가던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듯 하다.
자녀경영연구소 소장 최효찬, 이미미 부부가 함께 쓴 <부모의 자격>을 읽으면서 이 책을 우리 부모님이 나를 키울 때 읽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현재 한국의 교육은 모든 사회 문제의 원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쟁과 승자독식을 당연시 하는 교육계의 풍토는 오로지 물질적인 성공만을 중시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로 그대로 이어졌으며, 학교는 학생들의 인성을 발달시키고 적성을 개발하는 곳이 아니라 인적 '자원'을 키우는 양성소로 전락하여 머리만 있고 영혼은 없는 사회인을 배출하고 있다. 진짜 문제는 학생들을 보호할 위치에 있는 학부모들이 이런 환경으로부터 자신의 자녀를 지키고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는 데 있다. 좋아서 어릴 때부터 영어유치원에 다니고, 비싼 사교육 받아 특목고, 명문대에 들어가 끝없는 스펙 경쟁을 하는 사람은 없다.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그런 생활을 강요받고 그것 외의 다른 가치관은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에 인형처럼, 기계처럼 사회의 요구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 사회학자는 요즘 학생들이 이전 세대에 비해 유난히 힘들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너무 착해서'라고 했는데, 내 생각에도 그렇다. 부모의 말을 너무 잘 들어서, 부모가 시키는 대로 너무 잘 해서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부모의 입김이 너무 세서, 부모가 시키는 것이 너무 많아서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나에게 공부나 대학에 관해 일절 말하지 않으셨던 이유는 당신 자신이 부모의 뜻 때문에 원하던 공부를 하지 못하고 원치 않은 일을 하며 평생을 사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나를 닦달했던 것은 집안 사정 때문에 취업을 하느라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는 콤플렉스 때문이다. 즉, 두 분 모두 당신들 부모의 바람과 기대에 부응하느라 자신의 뜻대로 살지 못한 한을 나를 통해 풀고 싶으셨던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교육 문제는 부모들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자녀를 통해 대신 해결하려는 어긋난 욕망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또 다른 피해자를 낳는 꼴이 반복되는 셈인데,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냥 두라고 말한다. Let it go.
그래서일까. 어머니가 요즘 조금씩 변하고 계시다. 계기는 방송통신대학교 진학. 작년 이맘 때쯤 친구분의 권유로 입학하셨는데, 공부가 어렵다, 못하겠다는 말을 시시때때로 하시면서도 1학기를 무사히 마치셨고 2학기에는 장학금까지 받으셨다. 공부를 하시면서 어머니는 나와 동생이 그동안 공부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게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돌아보면 당신은 학창시절에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으며, 그래서 공부가 얼마나 어려운 지도 모르고 나와 동생을 닦달하고, 성적이 잘 나와도 충분히 칭찬해주지 못했다며 미안해하신다. 엄연한 대학교 2학년인 지금은 고졸 콤플렉스도 없으시고, 오히려 대학 나온 친구분들에게 옛날에 한 공부는 공부가 아니라며 다시 시작하라고 조언가지 하신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 나에게는 최고의 공부이고, 어머니로부터 받은 최고의 교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