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스페인어였습니다
하현 지음 / 빌리버튼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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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스페인어에 관심 있을 때 제목에 '스페인어'가 있다는 이유로 읽은 책이다. 저자 하현은 <달의 조각>, <이것이 나의 다정입니다> 등을 쓴 작가다. 저자가 스페인어를 배우게 된 이유는 말 그대로 '어쩌다 보니'이다. 우연히 지하철역에서 스페인어 학원 광고를 봤고, 마침 그 학원이 집 근처에 있어서 호기심에 등록했다. 이런 저자와 달리 스페인어 학원을 찾는 사람들 대부분은 유학, 취업, 이민 등등 저마다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며 저자는 '잘못 왔다'고 생각하면서도 7개월이나 꾸역꾸역 스페인어 학원에 다닌다.


이 책을 읽으니 대학 시절 겨울 방학을 이용해 2개월 정도 학교 언어교육원에서 일본어를 배운 기억이 떠올랐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나도 뚜렷한 목표 없이 그저 일본어를 배우고 싶어서 언어교육원에 등록했다. 나를 제외한 다른 학생들은 유학이나 취업 같은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목표가 없었기 때문일까. 나는 방학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언어교육원을 떠났고, 다시는 뚜렷한 목표 없이 외국어를 배우지 않았다.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스페인어를 배우기에 충분한 '목표'가 있었는데 이제는 다 사라졌다. 한두 달 배운 스페인어도 다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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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 이슬아 수필집
이슬아 지음 / 헤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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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구독료 1만 원을 내면 하루 한 편의 수필을 이메일로 보내주는 서비스가 있다. 국내에서 이러한 연재 메일링 서비스를 최초(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합니다 - 2020.8.4 정정)로 시작한 사람이 바로 '일간 이슬아'의 이슬아다. <일간 이슬아 수필집>은 2018년 일간 이슬아에 연재된 글을 엮은 에세이집이다. 책의 두께가 상당해서 다 읽는 데 한참 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금방 다 읽었다. 저자의 글이 생동감 넘치면서도 흡인력이 강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저자의 이력을 알면 책이 훨씬 잘 읽힐 것이다. 이슬아는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가족으로는 부모와 남동생이 있고, 현재 저자는 남동생과 함께 밴드를 하고 있다. 저자는 생계를 위해 대학 시절부터 누드모델, 잡지사 기자, 글쓰기 교사 등으로 일한 경험이 있다. 편하게 돈을 번 적은 없지만, 돈을 더 많이 벌면 편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상금을 준다고 해서 한겨레21 '손바닥문학상'에 응모했다가 덜컥 당선되어 작가가 되었다. 상금은 금방 사라졌고, 작가는 결코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아니었다. 청탁이 들어오지 않아 스스로 연재를 시작했다. 그게 '일간 이슬아'다.


한 달에 1만 원, 하루 500원도 안 되는 돈으로 재미있는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구독자 수가 점점 늘어 어느새 학자금 대출 2500만 원을 다 갚았다. 출간 제안과 강연 요청이 쏟아졌다. 독립출판으로는 밀려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서 '헤엄'이라는 출판사를 차렸다. 현재는 '출판계의 문익점'이라고 불리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저자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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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유산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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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았던 아버지가 병에 걸려 약해지고 죽음 앞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장성한 아들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필립 로스의 에세이집 <아버지의 유산>은 작가 자신의 아버지가 뇌졸중에 걸려 투병하는 모습을 보며 쓴 글을 엮은 책이다.


필립 로스의 아버지 허먼 로스는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인 이민자이다. 식구들을 건사하기 위해 메트로폴리탄 생명에서 보험 판매원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해 지점장의 자리에 오르며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아버지의 관심사는 오로지 돈 벌기였고, 돈을 벌어서 식구들을 먹이고 자신이 속한 유대인 공동체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길 소망했다. 저자는 그런 아버지가 고리타분한 허세 덩어리라고 생각했고, 자신은 결코 그런 어른이 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뇌졸중 판정을 받는다. 당시 저자는 작가로서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아버지 앞에선 여전히 어리고 불안한 아들이었다. 저자는 평생 건강할 줄 알았던 아버지가 스스로 용변을 보지 못할 만큼 급격히 쇠약해진 걸 보고 당황한다. 누구보다 기억력이 좋았던 아버지가 평생 한 동네에 산 이웃들은 물론 가족들의 이름마저 잊어버리는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는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이 이제는 혼자만의 추억이 되어간다는 사실에 큰 슬픔을 느낀다. 좋았던 기억도 싫었던 기억도 아버지는 모두 잊고 나만 영영 기억하리라는 생각에 좌절한다.


이 책은 필립 로스가 자신의 아버지에 관해 쓴 책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는 자식의 심정에 관해 쓴 책이다. 자식은 부모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비로소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했던가. 이 책을 쓴 필립 로스는 2018년 5월 22일 한국 나이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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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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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문학자 황현산 선생이 <밤이 선생이다>를 출간한 후 5년 만에 낸 산문집이다. 이 책을 발표하고 두 달 후에 영면에 들었으니 유고작이다. 이 책은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약 5년 동안 저자가 쓴 글 중에 일부를 추렸다. <밤이 선생이다>에는 저자의 어린 시절이나 젊은 시절에 관한 글이 많은 반면, 이 책에는 당시 정치 상황에 대한 개탄 섞인 글이 대부분이다. 세월호 참사, 대통령 탄핵, 여성 혐오, 헬조선 등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슈들에 관한 저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책의 1부와 2부, 3부에는 사회에 대한 평론이 실려 있고, 4부와 5부에는 저자가 인상 깊게 본 책이나 영화에 대한 평론이 실려 있다. 영화 <곡성>, <컨택트>, 조선희 장편소설 <세 여자> 등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 보여서 반가웠으나, 대부분은 내가 잘 모르는 시집이나 평론집에 관한 글이라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저자가 평생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그것들의 의미를 해석하고 글로 쓰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 부럽다. 나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지만 이것이 과연 '일'이 될 수 있을지,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말과 글이 자기 자신을 가장(假裝)하고 남에게 상처 주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는 세상에서 말과 글의 진정한 효용을 고민한 흔적도 보인다. 저자가 가르치는 대학에서조차 학생들은 정의와 평등을 교과서에나 나오는 허울 좋은 개념으로 받아들일 뿐, 자신들의 학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 문제나 그 밖의 사회 문제에 적용하지 않는다. '먹고사니즘'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더군다나 신자유주의로 점철된 교육을 받으며 경쟁은 당연하고 차별은 불가피하다고 배운 까닭이다. 좋은 말을 듣고 좋은 글을 읽었으면 좋은 삶을 살아야 할 텐데. 저자의 일갈이 나를 향한 듯해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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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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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황현산 선생의 책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를 선물 받았다. 2014년 11월부터 2018년 6월까지, 그러니까 저자가 영면에 든 2018년 8월이 되기 두 달 전까지 트위터에 쓴 글들을 모아서 엮은 책이다. 책장을 천천히 넘기다가 문득 이 짧은 문장들을 길고 깊은 사유로 발전시켜 책으로 쓰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문학자인 저자는 평생 다수의 불문학 서적을 집필 또는 번역한 반면, 일반 대중을 위한 책으로는 <밤이 선생이다>, <사소한 부탁> 등을 비롯한 몇 권의 책만 냈다. 저자의 책을 모두 읽자니 나의 불문학 지식이 일천하고, 저자가 나 같은 일반 대중을 위해 쓴 책만 읽자니 그 수가 너무 적어 아쉬운 마음이다.


<밤이 선생이다>는 저자가 1980년대부터 2013년에 이르는 삼십여 년의 세월 동안 여러 매체에 발표한 글을 추려 엮은 책이다. 서슬 퍼런 군부 독재 치하에서 학자로 살아가는 어려움에 관해 쓴 글도 있고, 보수 정권을 보면서 역사가 후퇴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쓴 글도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글은 박정희 정권 시절 외국에서 책 한 권을 들여오려면 서대문 국제 우체국에 가서 '미스 아무개'의 통관 허가를 받아야 했다는 글이다. 지금은 국내에서 외국 책 구하기도 쉽고, 외국 서점에 책을 주문하면 짧으면 하루, 길어야 일주일 안에 받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선편으로 오기 때문에 주문 후 몇 달은 지나야 한국에 도착하고, 도착하더라도 행여 '불온한' 내용이 있는 건 아닌지 검열을 거친 후에야 받아볼 수 있었다.


어떤 책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으며 여간해선 책을 내주지 않는 미스 아무개에게 "내가 공부를 하는데 국가가 왜 방해를 하느냐"라고 항변했다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웃플' 수 있는 지금은 행복한 시절일까. 지금은 국가가 나서서 내가 무엇을 읽든 어떤 생각을 하든 방해하는 일이 없으니 다행이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읽고 당장 돈이 되지 않는 공부를 한다는 이유로 바보 취급 당하고 위험 분자로 여겨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유학 경험 없이 오로지 한국에서만 공부해 교수가 되고, 평생 다른 길에 한 눈 팔지 않고 교육과 학문에만 전념한 저자와 같은 선생을 앞으로 한국에서 또 볼 수 있을까. 저자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립고 또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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