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년2월20일
오늘의정진: 不求眞不斷妄 불구진부단망 /참됨도 구하지 않고 망령됨도 끊지 않으니
- 100일 정진, 57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쉰 여섯번 째 구절은
<不是標形虛事持 불시표형허사지 /이는 모양을 내려 허투루 지님이 아니요
如來寶杖親踪迹 여래보장친종적/ 여래의 보배 지팡이를
몸소 본받음이로다> 였다.
나의 내면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다.
의식이 있든, 의식이 없는 무의식이든 항상 끊임없이 무언가에 집착한다.
집착은 분별을 낳고, 분별은 업(業)을 형성한다.
용과 호랑이의 싸움은 내 내면의 소란함이다.
나는 본래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 이지만 이것을 완전하게 증득 하기에는 너무나 요원(遙遠)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수행의 길에서 자신의 지팡이를 짚고 한걸음 한걸음 내딛어야 하는
것이다.
여래의 보배 지팡이가 친히 나를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오늘은 쉰 일곱번 째 구절
不求眞不斷妄 (아닐 불,구할 구, 참
진, 아닐 불, 끊을 단,
망령 망 )
불구진부단망 /참됨도 구하지 않고 망령됨도 끊지 않으니
了知二法空無相 (마칠 료, 알 지, 둘
이, 법 법, 빌 공, 없을
무, 서로 상)
요지이법공무상/ 두 법이 공하여 모양 없음을 분명히 알았다.
이 구절은 증도가의 첫 구절 ‘絶學無爲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절학무위휴도인
불제망상불구진) 배움이 끊어져 할일 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을 없애지도 않고, 참됨을 구하지 않는다’ 라는 구절과 다르지 않다.
‘참됨을 구하지 않고 망령됨도 구하지 않는다’ 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구한다’는 표현이다.
도를 얻기 위해 하는 모든 행동을 ‘구도(求道)’ 라고 한다.
무언가를 구한다는 것은 그 무엇을 얻기 위한 강렬한 욕망이 깃들어 있다.
그렇게 볼 때 세속적인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애 쓰는 것과 도를 얻기 위한 구도는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과 구도는 차이가 있다.
도는 얻으려고 하면 오히려 얻을 수가 없다.
도는 인위적으로 구해서는 안된다. 구 할수록 더욱 더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이 선지식들은 누누히 말씀하셨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도를 구하려는 그 마음마저도 놓아야 한다.”
구도는 사실 비움의 과정이다.
놓아야 한다. 인위가 아닌 무위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무위가 되는 것 또한 억지로 해서는 안된다.
내가 한다는 상, 즉 아상(我相) 이 사라져야 한다.
사실 아상을 없애기가 가장 어렵다. 나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이다.
나의 몸, 나의 마음, 내 가족, 내 친구, 내
재산, 나의 무엇 등등, 내가 살아 있는 한 나는 나를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행을 한다는 나 라는 상 또한 놓는 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렇다고 수행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 도리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 참됨을 구하지도 않고, 망념도 버리지 않는다고
했다.
양변을 다 떠난다는 것은 양변에 대한 집착을 놓는다는 뜻이다.
중도(中道) 가
바로 이런 것이다.
어설프게 가운데로 가라는 뜻이 아님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하지만 행하기 가장 어려운 길이 중도이다.
중도이기 때문에 고정된 상이 없다.
고정된 상이 없어지니 이때 비로소 무상(無相) 이 되는 것이다.
<일일 소견>
억지로 구하지도, 또 억지로 버리려고 하지 말아야 함에도 늘 한쪽으로 치우친다.
아직도 나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