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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115

오늘의정진: 鏡裏看形見不難 (경리간형견불난) 거울 속 형상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 100일 정진, 21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스무 번째 구절은

<淨五眼得五力, 唯證乃知難可測 /정오안득오력, 유증내지난가측

오안을 맑혀 오력을 얻음은 , 오직 깨우쳐 증명할 뿐 헤아리기는 어려워라> 였다.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육안으로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오안(五眼)으로 봐야 한다.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 이라는 오안의 근본 바탕은 마음()이다.

육안을 넘어서 심안(心眼)으로 관()해야 한다.


오늘은 스물 한 번째 구절

鏡裏看形見不難(거울 경, 속 리, 볼 간, 형상 형, 볼 견, 아닐 불, 어려울 난)

경리간형견불난 / 거울 속 형상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水中捉月爭拈得(물 수, 가운데 중, 잡을 착, 달 월, 다툴 쟁, 집을 념, 얻을 득

수중착월쟁념득/ 물 속의 달을 잡아 보려하나 어찌 집을 수 있을 것인가


불교에서 '보는 것(')은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깨닫기 위해 필수적인 수행의 단계가 바로 보는 것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 가 싶다.

먼저 팔정도(八正道)의 첫 번째가 '정견(正見), 바르게 보기' 이다.

<증도가>에서 첫 구절도 '군불견() 으로 그대 보이지 않는가' 로 시작했다.

<반야심경>에서도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고' 에서도 보는 것이 핵심 구절이었다.

지난번에도 언급했지만 증도가에서 본다()는 것은 보려는 의지를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냥 눈에 들어와 보여지는  상태라고 했다.

또 다른 본다는 뜻의 간()은 견()과는 달리 '보려는 의지'가 포함 되어 있다.

하지만 간은 피상적으로 보는 것에 불과하다. ()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는 것이 아닌 그 속을 보다 깊게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보여져야 볼 수 있다.


불투명한 창문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을 내가 창문 밖에서 아무리 보려 해도 그 사람이 누군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불투명한 창문에 가려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창문을 열어 버리면 그 창문 뒤의 사람이 확연히 드러나 그 사람이 누군지를 바로 알게 된다.

이처럼 진리를 본다는 것은 창문이 열려서 보여 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보여져야 하는 경지'는 그냥 보는 행위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다.

이번 구절은 이런 맥락을 가지고 이해해야 한다.

거울 앞에 내가 서면 거울은 나를 비춘다. 거울을 보는 간()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나를 볼 뿐이다. 하지만 거울의 입장에서는 나를 드러내어 보여준다.

즉 견() 이 된다. 나는 거울을 보는데 거울은 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무슨 말 장난 같아 보이지만 우리는 '본다'는 하나의 뜻이 서로 다른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 속엔 달이 없다. 달은 밤 하늘에 떠있다

그런데 우리는 강물에 비춘 달이 달 속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지 않으면 우리는 물 속에 달이 있다고만 생각하고 살 것이다.

'달을 가르키면 달을 봐야 하는데 손가락을 보고 있다' 는 말 처럼 우리는 본질을 보지 않고 엉뚱한 것을 본다.

우리는 본질(本質) 보다 현상(現像)에 사로 잡혀있다.


거울에 내 모습이 보인다고 해서,  물 속에 달이 보인다고 해서  

거울이 내가 아니고, 물 속의 달이 달이 아니다.


제대로 잘 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 수행에서 ''은 정말로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피상적인 ''이 아니라 근원과 실체를 볼 수 있는 ''이 되야 하는 것이다.

땅 속에 가려진 나무 뿌리를 눈으로 보지 못해도 나무의 근원이 뿌리임을 알 듯이 내 마음도 그렇다

나의 근원이 마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근원이 바로 나의 불성이고, 참나,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볼려고 해서 보는 게 아니라 저절로 드러나져야 한다.

저절로 보여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견(見) 이다.


<일일 소견>

천 개의 호수에 잠긴 달은 천 개나 되지만

하늘의 둥근 달 하나만 호수에 잠기지 않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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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114

오늘의정진: 淨五眼得五力 (정오안득오력) 오안을 깨끗히 하여 오력의 힘을 얻는 것은


- 100일 정진, 20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열 아홉 번째 구절은

<六般神用空不空, 一顆圓光色非色 (육반신용공불공, 일과원광색비색)

여섯가지 신통 묘용 공하면서 공하지 않고, 한 덩이 둥글고 빛나는 색이면서 색이 아니다.> 였다.


깨닫기 전에 이미 숙명통(宿命通), 천안통(天眼通,) 타심통(他心通), 천이통(天耳通), 신족통(神足通)등의 오신통(五神通) 얻었다 해도 () 아니다.

거기에 누진통(漏盡通) 해져야 이상이 없는 깨달음, 진정한 무상정각(無上正覺) 이루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스무 번째 구절

淨五眼得五力 (깨끗할 정, 다섯 오, 눈 안, 얻을 득, 다섯 오, 힘력)

정오안득오력/ 오안을 깨끗히 하여 다섯 가지 힘을 얻는 것은

唯證乃知難可測(오직 유, 증명할 증, 이에 내, 알 지, 어려울 난, 옳을 가, 잴 측)

유증내지난가측 / 오직 증득해야 알 뿐 헤아리기는 어려워라.


<금강경(金剛經)> 18()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에서는 오안(五眼)에 대하여 부처님과 수보리의 대화로 언급되어진다.

오안은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눈으로 본다고 하는 것은 육안을 말한다.

우리 인간은 육안을 통해 보이는 대상을 시각 정보화 하여 뇌로 전달되고 뇌에서는 정보를 바탕으로 이미지를 만든다.

우리는 사실 보는 대상의 본질을 보는게 아니라 뇌에서 만들어낸 시각정보의 이미지를 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육안으로 인식할 있는 범위는 대단히 제한적이다.

빛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수가 없다.

인간이 진화의 과정 형성된 생리학적 구조로 인해 우리의 시세포는 가시광선(可視光線) 있기 때문이다.

우리 육안으로 있는 가시광선은 빛의 전체 스펙트럼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적외선, 자외선, X, 감마선 같은 넓은 영역의 빛은 육안으로 결코 수가 없다.

그러나 천안(天眼)부터는 인간의 육안을 초월한 경지의 단계이다.


천안, 혜안, 법안, 불안 이라는 순서로 육안으로 없는 영역을 보는 것이.

그것을 모두 합쳐서 심안(心眼)이라고 한다

그렇다. 마음의 이다.

육안이 현상계의 () 있다면 천안(天眼) 색과 무색(無色) 보며 또한 넘어 인과(因果) 있는 눈이라 한다.

어제 설명했던 천안은 천안통의 신통처럼 천리 밖을 내다 있으며 전모(全貌) 속속들이 있다.

하지만 아직 대상의 본질을 뚫어 있는 경지는 아니다.

혜안(慧眼) 되어야 모든 대상의 실체와 본질은 본래 () 하다는 것을 있다

그러나 아직 만물만생을 비추어 있는 경지는 미친다.

법안(法眼) 만물만생을 두루 비추어 있고 그들을 또한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여 있는 경지가 되었다.


여기까지만 이르렀어도 이미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직 움직임 없는 움직임, 무위(無爲)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다.

마지막 불안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모든 우주적인 영역으로 비추어 봄을 자유자재(自由自在) 있다.

이처럼 육안을 넘어 심안으로 있는 오안의 힘이 바로 오력(五力)이자 오신통(五神通) 가진 힘이다.

이러한 경지는 범부가 아무리 생각으로 헤아려 볼래도 알 수가 없는 경지이다.

오직 몸소 깨우쳐 증득(證得) 해야만 하는 경지인 것이다.


바로 신라의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의 법성게(法性偈) 속의 한 구절 '證智所知非餘境(증지소지비여경)'  처럼 오직 깨친 지혜로 알일 일뿐 다른 경계로 알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淨五眼得五力, 唯證乃知難可測 /정오안득오력, 유증내지난가측

오안을 맑혀 오력을 얻음은 , 오직 깨우쳐 증명할 뿐 헤아리기는 어려워라.


깨달음과 신통력은 오직 체험을 해야 알 수 있다.

그러니 올바른 길을 인도(引導)하는 참 된 스승이 필요한 것이다.


<일일 소견>

장님이 앉은뱅이를 업고 길을 가듯 가는 길 헤메도니

언제 내 눈이 떠지고, 언제 내 걸음 내 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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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113

오늘의정진: 六般神用空不空(육반신용공불공) 여섯가지 신통 묘용 공하면서 공하지 않고


- 100일 정진, 19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열 여덟 번째 구절은

<摩尼珠人不識, 如來藏裏親收得(마니주인불식, 여래장리친수득)

마니주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여래장 속에 친히 거둬 들임이라.> 였다.


마니주의 한문번역은 여의주(如意珠)라 한다. 이무기가 용이 되어 여의주를 물어야 하늘로 승천할 수 있다고 한다. 여의주는 자유자재하며 신통방통한 위력을 지닌 보배 구슬이다. 그러한 보배 구슬이 사람마다 누구에게나 감춰져 있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다고 해서 내게 없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열 아홉 번째 구절

六般神用空不空 (여섯 육 돌릴 반, 귀신 신, 쓸 용, 빌 공, 아닐 불, 빌 공)

육반신용공불공/ 여섯가지 신통 묘용 공하면서 공하지 않고

一顆圓光色非色(한 일, 낟알 과, 둥글 원, 빛 광, 빛 색, 아닐 비, 빛 색 )

일과원광색비색 / 한 덩이 둥글고 빛나는 색이면서 색이 아니다.


오늘은 마니주의 신통묘용한 작용을 설명 할 차례이다.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나타나는 현상 중에 오신통(五神通)이 열린다고 한다.

오신통이란 다섯 가지 신통한 능력을 말한다.

숙명통(宿命通), 천안통(天眼通,) 타심통(他心通), 천이통(天耳通), 신족통(神足通) 일컫는데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오신통을 먼저 얻는다고 한다.


숙명통은 자신의 모든 전생을 확연히 알게 된다는 신통한 능력이다. 없이 아득한 과거 생에서 부터 어떠한 인연을 가지고 살았는지를 전부 있다는 신통력이다.

천안통은 천리 밖의 모든 것을 지금 있는 자리에서 모두 있는 능력을 말한다.

또한 육안으로 없는 것도 있는 능력도 포함 한다.

타심통은 타인의 마음을 전부 읽을 있는 능력이다.

천이통은 천리 밖의 소리를 들을 있는 능력이다. 또한 인간이 들을 없는 주파수의 소리 또한 들을 있는 능력도 포함한다.

신족통은 천리 밖을 순간에 이동할 있는 능력이다.

세상을 자유자재하게 오고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러한 오신통은 깨닫기 전에 얻을 있는 신통력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보리수 아래에서 무상정각(無上正覺) 이루기 전에 이미 오신통을 얻으신 상태였다고 한다.

오신통만 얻어도 대단한 신통이라 마치 세상을 마음대로 움직일 있을 것만 같다.


대행 선사(大行禪師1927~2012) 께서는 일찍이 '오신통을 얻었다고  해도 도는 아니다' 라고 말씀 하셨었다

이미 현대 사회는 오신통이 생활화가 되었다고 하셨다.

과학과 통신 기술의 발달로 앉아서 지구 반대편의 상황을 있고, 인간이 우주로 까지 진출하는 시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문제는 오신통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즉 뒤바뀐 꿈과 같은 생각이 되어 버렸

비록 오신통을 사람 마다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과학과 기술의  현대 물질 문명에 종속 되어 버리고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누진통(漏盡通)이란 신통력이다.

누진통은 모든 번뇌가 끊어지는 신통력이라고 한다.


비록 오신통이 열렸다고 해도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라서 번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주 미세한 번뇌라도 있다면 다시금 육도를 헤메게 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오신통에 지배되지 않고 오신통을 마음대로 자유자재하게 있는 누진통의 경지로 나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진정한 깨달음의 완성은 누진통을 얻는 육신통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이상이 없는 바른 깨달음 , 무상정각(無上正覺) 얻은 후에라야 비로소 오신통은 누진통(漏盡通) 이란 신통력이 더해져 육신통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다.

오색을 비추면 오색 찬란한 빛을 발하고, 푸른 색을 비추면 푸른 색을 발하는 것이 마니주의 특징 이다.

오늘의 구절은 그러한 마니주가 바로 육신통을 자유자재 하게 다를 있는 능력을 지녔으며 또한 빛나는 모습을 표현한 구절이 되겠다.

六般神用空不空, 一顆圓光色非色/육반신용공불공, 일과원광색비색

여섯가지 신통 묘용한 나의 본래 마음은 () 하지만 공하지 않고 ()

덩이(一顆) 둥글고 빛나는 (圓光) 색은 색이면서() 색이 아니다().


<일일 소견>

쏟아지는 비와 몰아치는 바람의 지나감 없이 어찌 무지개를 볼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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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재생-윤회의 가르침 법륜 25
아신 옷따마 지음, 홍윤선 옮김 / 고요한소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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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재생-윤회의 가르침

지은이 아신 옷따마 / 홍윤선 옮김

 :  아비담바의 관점에서 본 업과 윤회의 통찰

 

<티벳트 사자의 서>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8세기 초 파드마삼바바’ 라는 티벳 밀교(密教)의 스님에 의해 저술된 사후세계 안내서로 알려져 있다.

책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49일 동안 바르도’ 라는 이승과 저승 사이 공간에 머무르며 다음 생을 위한 준비를 한다고 한다.

그 기간 동안  망자(亡者)에게 <사자의 서>를 독경을 하면 망자는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解脱)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티벳에만 이런 망자를 위한 의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망자를 위한 의식이 있다바로 49재다

천도재라 부르며 우리나라에서는 사찰에서 의식을 진행한다.

<티벳트 사자의 서처럼 절에서는 망자를 위한 <무상계>를 독송한다

무상계는 망자에게 들려주는 부처님 설법이다

우리가 어떠한 과정으로 사람의 몸을 받아 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고 죽고 나면  육신이 어떻게 사대()로 흩어지는지 자세히 설명해준다.

죽은 망자(亡者), 즉 몸이 없는 영가를 위해 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부처님이 계시는 법의 세계로 인도(引导)하는 목적이 있다

<무상계또한 <티벳트 사자의 서>와 같은 맥락으로 돌아가신 영가들의 차원을 한 단계 높여주는 설법인 셈이다.


사람이 죽고 난 후 49일 동안 이승도 저승도 아닌 곳에서 머무르다 간다는 세계관은 아마도 불교 문화권에서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 진 것 같다.

다시 태어나는 환생을 바라거나 극락 세계로 가라고 명복을 빌어주는 풍토가 자연스럽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윤회나 환생을 언급하면 신비주의로 취급하는 경향이 많다

임종체험 혹은 사후 세계를 다녀 왔다 거나자신의 전생을 기억한다 같은 다소 오컬트적 인식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고 본다.  

물론  요즘은 그러한 소재를 다룬 영화나 웹툰 ,소설드라마 는 흔해 졌지만 단지 흥미나 재미 위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하지만 불교의 세계관에서 죽음과 윤회는 단순한 흥미로운 소재가 아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깨달음과 관련된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익히 알려진 대로 태어나서 살다가 죽고 다시 태어나서 살다가 죽기를 무수히 반복하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영가라고 불리는 망자들은 생전의 의식 차원에 따라 다시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난다.

이것을 환생이라고 하는데사실 윤회(輪廻) 는 인간이 죽어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는 것 만을 의미 하지 않는다윤회의 작용은 사실 방대하다.


이번에 읽게 된 <-재생-윤회의 가르침>은 지금까지 내가 막연히 알고 있었던  윤회를 <아비담마라는 초기 불교의 경전의 통찰을 통해 좀 더 깊이 있게 배울 수 있었다.

저자 아신 옷따마’ 스님은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으로 미얀마에서 비구계를 받아 현재는 자신의 고국 체코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펴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을 통하여 알게 된 <아비담마>라는 경전은 그동안 구전되던  붓다의 가르침을 빠알리어로 기록한 경전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경전은 크게 산스크리트어와 빠알리어 라는 두 가지 언어로 전승되어 져 왔다.

빠알리어는 본래 부처님 당시 평민들이 사용했던 언어였고 산스크리트어는 귀족계층이 쓰는 언어 였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왕족 출신이라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평민들에게는 빠알리어로 법을 전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빠알리어 경전은 부처님의 원음(原音)에 가장 가깝다고 전해진다

원래 부처님 초기 가르침은 전부 암송으로 구전되었다.

부처님 열반 후 제자들은 생전 부처님의 말씀을 전부 외워서 후대로 전승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붓다의 가르침은 인도에서 동아시아로 전파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스리랑카에서 처음으로  빠알리어로 경전을 쓰기 시작하여 빠알리어는  주로 동남아시아 같은 남방 불교 경전에서 사용 되어졌다

반면에 우리 나라중국일본 같은 동북아시아는 산스크리트 언어를 기본 베이스로 한 경전이 북방불교에서 사용되어 졌다.  

한때 남방불교라 하면 소승불교라 하여 북방불교를 믿는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폄하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분별이었다본래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

나 또한 지리문화적인 영향으로 인해 선불교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면이 강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선불교이든 교학 불교이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본래 하나 였음을 알아 가고 있는 중이다.


이 책<-재생윤회의 가르침>은 <아비담바>의 경전에서 통찰한  업의 작동 방식과보 그리고 윤회의 실상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은 쉽게 전부 이해를 할 만한 내용은 아니다.

의미가 깊어 곁에 두고 앞으로도 자주 들쳐 보게 될 내용들이 무척 많다.

하지만 기본적인 맥락인 우리의 생과 사를 거듭케 하는 윤회의  원인은 바로 업 때문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 전체적 이해는 충분하다.

업이란 우리의 일상 생활 중에 종종 오르내리는 업보라는 단어로 자주 쓰이는 말이다

모든 행위에는 반드시 어떤 결과가 따른다는 것으로 팥 심은데 팥 나고콩 심은데 콩 난다는 식의 단순한 원인과 결과를 비유로 들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업의 작동 원리는 앞의 비유처럼 단순하지 않다.


<아비담바에 따르면 업은  조건에 따라 24가지 종류로 나눠진다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인연’(因缘이라고 부르는 것도 업과 과보의 한 종류라고 한다.

업과 과보를 합쳐서 우리는 업보’ 라고 부르는데 업이 원인이라면 과보는 결과이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인생 살이는 과거의 업의 작용이 무척 크게 영향을 받는다.

업의 작용에 대해서는24가지 조건에 따라 업은 작동하므로 인식할 수 있는 부분은 대단히 작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업이 작동 되는 조건은 보통 사람은 이해 할 수 없을 만큼 무척 복잡하다.


단순하게 예를 들어 어느 누군가는 착하지만 늘 불행하고어느 누군가는 무척  나쁜 사람이지만 항상 잘  사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착한 사람은 착한 과보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선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는 한 생의 업보만으로 놓고 둘을 비교하면 이해가 안되는 점이 생긴다.

그런데 사람의 인생을 한 생()만을 놓고 헤아려 보는 것이 아닌 과거의 무수히 많은 생들의 인과(因果)로 따진다면 현생의 불합리성에 대한 설명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짓는 업은 분명 이 생에 과보를 받기도 하겠지만  그 중에 극히 일부만 이번 생에 반영 되며 대부분의 과보는 내생에서 받게 된다고 한다.

지금 내가 짓는 업의 과보가 다음 생에 라도 반드시 받게 되리라는 점과 현실에 처한 상황은 대부분 과거에서 왔다는 가르침은 새겨둬야 했다

나는 이점이 무척 흥미로 왔다


지금 내가 처한 환경예를 들어 나의 부모나의 자녀나의 처나 친척지인들은 모두 과거생의 인연과 업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업력(业力)즉 업의 힘은 매우 강력하며 전생에서 이어져 다음 생의 조건이 되는 의식으로 재생(再生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윤회는 돌고 도는 재생이라고 라며 끊임없이 우리는 늘 육도를 헤메고 도는 것이다. (육도는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계를 일컫는다. )

이처럼 업의 작동 원리는 윤회하는 모든 존재가 따를 수 밖에 없는 우주의 실제 보편 법칙이란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붓다는 수행을 한 것이다.

붓다의 깨달음을 얻는 수행도 단지 한 생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무수히 많은 전생을 통해 닦아 왔다는 것은 많은 불교 경전에서 언급 되어져 있다.

붓다 역시도 수 많은 생(속에 수행을 하였고 마침내 윤회를 벗어나고 해탈에 이른 것이다.


<아비담마에서 우리에게 한 생이란 정신과 물질이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며 형성해 가는 흐름일 뿐이라고 한다

이것은  심찰나라고 하는 마음의 연속 작용이다.

지금 우리가 어떤 사실을 알아 차리게 되는 것 조차도 과거 업의 과보라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이 이성을 지배한다는 이론은 사실은 업이 우리의 이성을 지배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닌가 싶다.

즉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은 불교에서의 업력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고 보여진다


불교에선  무아’ 를 깨닫는 것을 불법의 요체로 삼는다

본래 내가 없는데 윤회하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이 선문답 (禪問答) 의 화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철저한 무아의 깨달음이 없다면 업은 우리의 모든 생을 철저히 지배한다

지금 쌓고 있는 업과 과거에 쌓아왔던 모든 업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나고 죽고다시 또 재생하는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 윗빠사나 같은 수행은 나의 모든 의식과 행동을 관찰한다.

윗빠사나 수행의 핵심은 나에게 일어나는 생각과 의식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이다.

즉 ’ 수행이다선불교에서 자신의 본래 성품을 비춰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망상에 가리워진 나의 본성품을 관하는 것이 바로 위빠사나이고 선불교의 참선이다.

과거로 부터 전해진 업과 현재 짓고 있는 내가 알게 모르게 짓는  업이 다시 또 재생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라는 것이 실체가 아닌 그저 원인과 결과가 이어지는 업의 덩어리라는 것을 통찰하게 되는 것 만으로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빛나는 지성으로 한껏 고양된 존재, 가장 높고도 숭고한 존재계까지도

한낱 침 뱉는 타구(唾具)로 여기게 될 때, 그때 그대는 열반을 향할 준비가 된 것이다.>

  p. 126 <미얀마 큰스님 시 중에서>


모든 사물을 왜곡하지 않고 바르게 보려면 반드시 먼저 대상과 거리두기를 해야만 한다. - P43

마음 챙김만이 우리가 자유의지를 행사 하는데 핵심이다. - P56

궁극적 실재 차원에서는 물질은 물질적 성질을 띈 무리가 모인 집합체에 불과할 뿐이라고 깨닫게 된다. - P104

우리의 감각기관은 실재 세계의 전체 스펙트럼 가운데 살아남기 위해서 꼭 알아야 하는 아주 좁은 범위만을 감지 할 수 있다. 그렇게 좁은 범위 너머에는 우리 감각기관으로는 결코 감지할 수 없는 실재의 차원들이 있다. - P92

마음을 정화하고 청정하게 하려는 것이 윗빠사나 수행 체계의 핵심이 아니다.... 중략.....
망상을 꿰뚫어 보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은 깊은 고요와 정신적 몰입이 아니라 온갖 경험을 할 때 철저히 초연해 지는 것이다. 그리하면 갈애가 모두 뿌리째 뽑힌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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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년 112

오늘의정진: 摩尼珠人不識 (마니주인불식) 마니주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 100일 정진, 18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열일곱 번째 구절은 

<直截根源佛所印, 摘葉尋枝我不能(직절근원불소인적엽심지아불능)

근원을 바로 끊음이 부처의 도장을 받는 것이요.

잎을 따고 가지를 찾음은 내 할 바가 아니요.> 였다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는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그 현상이 나타난 본질은 눈에 띄질 않는다

그러니 항상 현상의 본질이 되는 근원을 찾아내야 한다.

아니 근원이 보여져야 한다오직 근원만을 관할 뿐이다.

 

오늘은 열여덟 번째 구절

摩尼珠人不識 (갈 마중 니구슬 주사람 인아닐 불알 식  )

마니주인불식마니주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如來藏裏親收得(같을 여올 래숨길 장속 리친할 친거둘 수얻을 득)

여래장리친수득 / 여래장 속에 친히 거둬 들임이라.

 

마니주는 신비한 빛을 발하는 구슬이다본래 마니주는 맑고 텅 빈 구슬이라고 한다

하지만 비추는 대상에 따라 색깔이 달리 나타난다고 한다

오색을 비추면 오색 빛을 발하고 푸른 색을 비추면 푸르게 발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물 같은 구슬마니주의 속성이 우리의 참마음과 닮았다.

그러한 마니주를 사람들 마다 각자 다 가지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자신의 본성이 바로 부처임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중생들이 본래 부처가 될 수 있다’ 는 사상이 바로 여래장사상 (如來藏思想) 사상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지녔다.

깨달음의 가능성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그러한 본성이 바로 마니주와 같아서 내 안에 있음에도 사람들은 모른다

왜냐면 어제의 구절에서도 언급 되었는데 나무의 뿌리는 분명히 땅속에 묻혀 있다

그런데 흙에 가려 보이지 않듯이 우리 마음의 마니주 또한 그러한 것이다

우리의 참된 성품은 욕심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늘 가려져 있다.

이러한 무명으로 가리워진 나의 참 성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감추어진 여래장을 발견하게 된다면 언제든지 꺼낼 수도 있고 다시 또 감춰둘 수 있게 된다

바로 내 마니주를 내가 마음대로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보배 구슬그 마니주를 이제는 꺼내야 할 때다.

 

<일일 소견>

찬란한 오색 빛이 바로 내 본성품이 아니다

오히려 빛 깔 없음이 본래 나의 색 이어라.

오묘하지만 오묘함이 없음 이여.

나의 본 마음은 그렇게 빛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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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1-12 2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니‘가 ‘옴마니반메훔‘의 마니인가요?
예전 네팔 여행할때 만난 불교인이 알려주길 ‘마니‘는 여의주를 의미하며 ‘반메‘는 원래 어원이 ‘파드메‘ 인데 연꽃을 의미한다고 하더군요. 진흙 속에서 피는 연꽃이며 어둠에서도 빛나는 여의주라 탐진치를 정화한다는 의미라고 하더군요.

마힐 2025-01-12 22:56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마니는 구슬 같이 빛나는이란 뜻 이에요.
이무기가 용이 되려면 여의주를 물어야 하늘로 승천한다는 전설도 있잖아요.
여의주는 뜻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보배 구슬이라는 거죠.
손오공의 여의봉이 크고 작고를 자유자재 하잖아요.
불교에서 여의주는 잉크냄새는 말씀 처럼 탐친치를 정화 하는게 맞지요.
그런데 사람들 누구에게나 마니주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마니주가 바로 우리의 참 성품, 주인공, 불성, 참나 라고도 부른답니다.
내 안에 자비와 지혜를 가지고 있단 거지요.
옴마니반메훔도 결국 지혜와 반야가 온 우주에 충만하라는 뜻이 있어요.
내 안의 여의주를 자유자재하고 쓸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 모든 깨달으신 선지식들 께서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지요.
잉크냄새님도 자신에게 있는 마니주를 꺼내서 자유자재 하게 쓸 수 있으시길 기원 드리겠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