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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도약 - 평범함을 뛰어넘는 초효율 사고법
도야마 시게히코 지음, 전경아 옮김 / 페이지2(page2) / 2025년 1월
평점 :
독후감: 8월 18일
책 제목: 생각의 도약/저자: 도야마 시게히코 지음. 전경아 옮김
글 제목: 잊음의
세렌디피티
무극(無極)에서 태극(太極) 이 형성된다.
불의 기운이 아래로 돌고, 물의 기운은 위로 돌아간다. (水昇火降수승화강)
장삼봉이 풀어내는 태극권은 천천히, 유유히 흐르는 물과 같다.
지켜보고 있는 장무기에게 묻는다.
“지금은 어떠하냐?”
“已忘记了一小半(조금 잊었습니다).”
“难为你了(수고했구나).”
도야마 시게히코(1923~2020)의 <생각의
도약>을 덮는 순간, 나는 김용의 <의천도룡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바로 장삼봉이 장무기에게 태극권을 전수하는 장면이다.
형(形)이 비워지자 의(意)의 윤곽이 떠오른다.
외움의 그릇을 비우는 순간, 배움은 비로소 시작된다.
이 책 <생각의 도약>은 잊음에 관한 책이다.
학습의 기본 구조는 외우기다. 우리는 외우지 못하면 학습 능력이 없는 것으로 평가해왔다. 하지만 저자는 외우는 능력만이 인간이 가진 최고의 능력이 아니라고 말한다.
잊어버림의 능력, 즉 망각이라고 일컫는 능력 또한 중요한 능력이란 것이다.
마치 장자의 무용의 용(無用之用)을 말 하는 것과 같다.
저자는 생각의 숙성을 말 한다. ‘재운다’는 표현을
썼는데 머리 속에 나오는 생각은 발효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뜻을 의미한다. 이때 잊음이 발동되는데
이건 단순히 망각이 아니다.
장무기처럼 잊을수록 더 배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형식을 사다리 삼아 오르고, 꼭대기에 이르면 사다리를 걷어 차는 일이다.
지식은 뗏목과 같아,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버려야 한다.
장삼봉의 태극권이 끊어지지 않고 다시 한번 이어져 펼쳐진다.
“已忘记了一大半(많이 잊었습니다).”
“不坏不坏(나쁘지
않다).”
장자는 “뜻을 얻으면 말을 잊는다(得意忘言)”고 했고, 선사는 “모른다”로만 말할 수 있었다. 가득 찬 잔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담지 못한다. 창의성은 빈 잔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생각이란 눈에 보이는 꽃이 아니다. 땅 속 깊이 박혀 있는 뿌리와 같다.
시게히코는 뿌리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생각을 오래 동안 품고 있어야 마침내 진정으로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있다는 생각에서는 절대로 그 뿌리를 내리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모른다”에서 철학을 시작했다. 무지(無知)의 자각이야 말로 앎의 출발이다. 아는 체를 멈출 때 비로소 가정이 드러나고, 질문이 생기고, 검증이 가능해진다. 공자는 “알면
안다 하고, 모르면 모른다 하라(知之為知之)”고 논어에서 말했다.
이는 겸손의 미덕이 아니라 사유를 움직이게 하는 엔진이기 때문이다.
장삼봉은 다시 물었다.
“이제는 얼마나 잊었느냐?”
“还有三招没忘记(세 초식은 아직 못 잊었습니다).”
장무기처럼 우리는 아직 앎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이름의 권위, 결론의 교조, 변하지 않으려는 확신, 이 셋이 마지막 족쇄다.
베이컨은 우리 머릿속의 우상(Idola), 즉 종족·동굴·시장·극장의 우상을 버리지 않으면 어떤 실험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급진성은 “지식은 힘이다”라는 선언에만 있지
않다.
지식이 우상이 되지 않게, 주기적으로 틀을 부숴야 함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잊음은 파괴가 아니라 점검이다.
과학은 비움 → 관찰 → 검증 → 임시 채택 → 다시 비움의 루프다.
데카르트는 문제를 쪼개고 좌표를 놓아 사유를 기하학화했다.
스피노자는 감각의 신뢰도를 낮게 두고 이성의 기하학적 전개로 세계의 일관성을 밀어붙였다. 이들은 “형식의 위력”을 극대화했다. 그러나
형식은 목적이 아니라 의도를 통과시키는 관문일 뿐이다.
장무기의 잊음이 형식을 버리고 뜻으로 가듯, 서양 합리주의의 형식 또한 끊임없이 검증·반증·업데이트의 과정을 거쳐왔다.
베이즈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불확실성의 바다임을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예측은 결코 확정이 아니라, 사전(先) 믿음에 증거를 더해 사후(後) 믿음을
갱신하는 행위다. 법칙은 가능하지만, 예측은 확률이다.
오늘의 데이터가 내일의 나를 고친다. 확신은 느리게 올리고, 반증에는 빠르게 낮춘다.
베이컨에서 시작한 과학적 사고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그리고 베이즈를 거치며 오늘날 인공지능의 DNA로 진화했다.
우리는 늘 예측하기를 진화 본능으로 삼아왔다. 날씨, 주식, 부동산, 경기, 심지어
우주의 심연까지. 그러나 양자역학은 우리에게 마지막 주의를 주었다. 가능성의
파동만을 허락하고, 개별 사건은 확률의 주사위로 다가온다.
과학을 통해 예측 가능한 법칙을 알고자 했지만 결국 우리는 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모름 → 앎 → 다시 모름은 사유의 기본 루프인
셈이다.
모름은 무지의 구렁텅이가 아니라 시작을 허락하는 출발선이다.
앎은 끝이 아니라 모름으로 향하는 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모름으로 돌아가는 건 패배가 아니라
자유다. 비움은 공허가 아니라 여지(余地), 여지는 창의성의 보고와 같다.
마지막 태극권의 초식이 끝난 후, 노사(老师)는 다시 묻는다.
“지금은 어떠냐?”
장무기가 미소 짓는다.
“这我可全忘了,忘得干干净净的了(이제 전부 잊었습니다. 아주 말끔히).”
이제 장삼봉은 아주 크게 기뻐하며 웃었다.
잊음은 생각의 폐쇄가 아니라 생각의 열쇠이다.
어쩌면 우리 사고의 세렌디피티(Seredipity)는 잊음 속에서만 경험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의 도약>을 읽으며 무협지와 철학 그리고 인공지능까지 이어지는 통찰이 가능 했다면 나의 생각은 다시 한 계단 도약한 셈이 아닐까?
🖋 by Dharma & Maheal

우리는 꽃을 보지만 잎은 보지 않는다. 잎을 보더라도 줄기는 보지 않는다. 하물며 뿌리에 대해서는 생각하려 하지도 않는다. - P19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지 않으면 구체적 모습을 갖추지 못한다. - P46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렇게 군불에 밥을 짓는 것처럼 운 좋게 생겨나는 발견이나 발명을 ‘세렌디피티‘라고 부른다. - P75
어느 시대나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현대‘다. - P136
‘지식의 양‘과 ‘사고의 힘‘은 반비례 하는 것이다. 많은 것을 알게 되면 자유로운 생각을 하기 어렵고 창의적 사고와 거리가 멀어진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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