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를 보세요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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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보니것이야! 읽기가 재미있다. 반전이 있으니, 섣불리 결말을 예상하지 않게 되기도 하고. 이 소설은 어떤 결말로 끝날까 궁금증을 지니고 읽어가면 어느새 놀라운 결말이 다가온다.


그렇다고 가볍지가 않다. 서술은 가벼운데, 들어있는 내용은 무겁다고 해야 한다. 무거운 내용을 가볍게 전달하는 능력, 보니것이 지닌 재주라고 해야겠다.


첫소설 '비밀돌이'를 보면 참... 지금 우리가 인공지능 개발에 몰두하고 있는데, 그러한 인공지능이 개발이 되어 인간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이 소설을 읽다가 경기도교육청인가 어디선가 개발했다는 AI영상이 뉴스에 나온 적이 있다.


교사들이 지닌 속마음을 인공지능이 풀어준다는 발상인데, 그것이 교사를 비하하는 내용으로 흘러서 문제가 되었던... 즉 말에 드러난 속뜻을 해석해주는 영상이었는데ㅡ 그것이 상대에 대한 비하로 나타난다. 이 소설에서 그런 장면이 펼쳐지는데 참, 뉴스에서 봤던 내용을 보니것이 미리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 문제없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렇지 않고 안 좋은 면을 파헤치는 그런 기계. 그 기계로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고,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데...


그런 기계를 만들어 일확천금을 꿈꾸는 인물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사람들을 망가뜨리는지 몸소 체험한 다음에 기계를 묻어버린다. 소설에서는 묻어버릴 수 있다. 또 보니것이 살았던 시대는 인공지능이 나오기 전이니까, 상상 속에서 그러한 위험을 간파한 인간이 위험을 피하는 방식으로 결말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다. 인공지능이 개발되면서 그것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지만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다. 소설에서처럼 묻어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로 보완할 수 있다고 믿고 더욱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 소중하다.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개발한 기계가 오히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망칠 수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소설의 결말은 더욱 섬뜩하다. 땅에 묻어버리는 기계가 마지막으로 했다는 말.


"'다시 보자. 개자식아. 다시 보자고.'" ('비밀돌이'에서. 42쪽)


우린 이러한 비밀돌이를 다시 보고 있다. 인간에게 편리함과 빠름을 선물해준다는 이유로. 하긴, 이 비밀돌이처럼 '이야기할 사람!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사람!'('비밀돌이'에서. 25쪽)이 필요해서 만든 기계가 과연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해준다고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냥 우리 자신의 고민을, 어려움을 피하게만 해주는 것이 아닌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조그마한 어려움도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지... 보이는 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자세를 지니게 하는 것은 아닌지, 또 악용이 되어 안 쫗은 쪽의 말들만 계속 듣게 해서 우리의 인식을 흐리게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봐야 한다. 


과연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고 기계를 만들어 곁에 두는 것이 바람직한지, 지금 우리는 기계와 대화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시간-공간에 대한 고민,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러한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할지 이 소설을 통해 한번 더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


'개미 화석'이라는 소설을 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스탈린 시대의 소련을 비꼬고 있는 소설인데... 독재가 일어나고 있는 나라에서 예술을 하거나 또는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 또는 비판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입을 틀어막히고, 행동에 제약을 받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개미학자를 주인공으로, 개미들의 화석을 통해 어떻게 독재가 성립하게 되는지, 또한 같은 사건(화석에 나타난 모습)을 보고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지, 정권의 구미에 맞게 해석을 할 수 있음을, 그것에 반하는 증거 또는 추론을 하는 사람의 입을 어떻게 막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때는 소련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지금은 미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소련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이 꼭 소련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소설들, 많은 소설들이 실려 있는데, 짧고 경쾌하게 진행되지만 내용은 깊고 무겁다. 하여 소설을 읽으며 현대 우리의 생활을 살필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이 소설들과 더불어 두려움이 인간이 지니는 감정이고, 이 두려움을 통해 성장할 수 있음을, 즉 두렵다고 마냥 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맞서 극복하려는 모습을 지녀야 함을 보여주는 소설도 있다.


'신문 배달 소년의 명예''우주의 왕과 여왕'이라는 소설이 그런데, 두려움에 갇힌 사람은 결국 자신을 망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두렵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명예와 또 한 단계 성장하는 자신을 선물한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이 두 소설의 결정판이 바로 '에드 루비 키 클럽'이란 소설이 아닐까 하는데, 두려움을 이겨내고 진실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결국 승리하는 내용의 소설. 아무리 권력을 지니고 있어도, 사람들을 매수해도 결국 진실은 가릴 수 없음을 이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집 좋다. 재미있다. 그냥 읽어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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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기록
존 버거.장 모르 지음, 민지현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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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로 떠나는 과거로의 여행, 그곳에서 우리는 사람과 자연, 그리고 역사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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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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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3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지구에 감염병이 급속도로 퍼져 사람들이 좀비가 되고, 이 좀비들이 사람들을 죽이는(감염시키는) 상황. 힘 있는 자들은 우주선을 타고 제2의 지구로 탈출을 하지만... 지구에 남은 사람들은 좀비가 되거나 또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


감염되어 좀비가 된 사람들에게는 기억이 없다. 그래서 좀비는 무섭다. 자신도 자신과 함께했던 사람도 모두 알지 못한다. 좀비도 먹어야 산다고 하면, 먹기 위한 본능만 남아 있는 존재다. 이래서 좀비는 무섭다. 무섭기도 하지만 슬프다.


자신의 기억을 잃은 존재는 더이상 자신일 수 없다.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좀비는 슬프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그것을 삶이라고 할 수 있다면)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선란의 이 좀비 연작에서 좀비는 다르다. 사랑을 잃지 않는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좀비가 되어서 비록 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잊지 않는다. 보호하려 한다. 그래서 더욱 슬프고 아름답다.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려는 모습. 그러한 좀비를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 이들의 관계에서 좀비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상대의 상태가 변했어도 그냥 사랑하는 사람일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함께하고 싶을 뿐이고, 그렇기에 서로를 해치지 못하게 다른 좀비나 인간들로부터 보호하려 한다. 그런 과정이 세 편의 연작소설에 실려 있는데.... 세 소설에서 공통점을 찾으라고 하면 이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소수자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첫 번째 소설인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에서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옥주와 묵호가 등장하고, 두 번째 소설인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에서는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둔 딸과 자폐인을 딸로 둔 엄마가, 세 번째 소설인 '우리를 아십니까'에서는 동성 부부가 나온다.


소수자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래서 더욱 서로에게 애틋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이들은 세상이 재난에 빠진 상태에서도 서로를 챙긴다. 인간일 때도 그렇고,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좀비가 되었을 때고 그렇고. 이렇게 세 편의 소설은 좀비가 되기 전에 그들이 살아온 모습을 보여주고, 둘 중 하나 또는 둘 다 좀비가 되었을 때의 모습을 보여준다.


분명 상황이나 상태는 달라졌음에도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 서로를 챙겨주는 모습은 변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장면을 두 번째 소설인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에서 식물인간이 된 엄마와 행방불명이 된, 그래서 결국은 좀비가 된 아빠가 만나는 장면은 마음이 찡해진다. 이들은 서로를 잊지 않고 있음을 소설을 읽으면 그렇게 짐작할 수밖에 없게 한다.


(은미는 그것이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본다. 어둠 속의 두 실루엣은 마치 서로를 끌어안는 것만 같다.-221쪽)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 어려운 환경을 함께 헤쳐나왔던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겪는 재난 상황은 이미 자신들이 겪었던 일에 불과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존재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좀비든 아니든, 그냥 사랑하는 사람일 뿐이다. 자신이 곁에 있어 주어야 하는, 또는 자신의 곁에 있어주어야만 하는 그런 사람.


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보호하려 하고 함께하려 하는데,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다. 순탄치 않지만 이들은 헤쳐나간다. 이겨나간다. 이미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니까. 서로의 사랑으로 그 어려움들을 견뎌내고 이겨내 왔으니까.


하여 좀비 3부작이라고 하지만 사랑 3부작이라고 해도 좋겠다. 이 소설집은 사랑을 다루고 있으니까. 어떤 어려움에도 서로를 간직하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래서 슬프고도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이토록 아픈 사랑이, 아름다운 사랑이 마음에 콕콕 박히는 소설. 천선란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따스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던 소설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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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향하여
안톤 허 지음, 정보라 옮김 / 반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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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멸의 존재이기에 불멸을 꿈꾸는 인간. 그러나 불멸의 존재가 되면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과 같은 생물학적 몸을 지니고 있으면 불멸할 수가 없다. 세포는 죽음으로 향해 가니까. 불멸하기 위해서는 세포를 바꾸어야 한다. 무엇으로? 죽지 않는 존재로... 그런 존재가 있을까? 


지금까지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이 기껏 할 수 있는 일이 노화를 늦추거나 또는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 냉동해서 다음 시기로 치료를 넘기는 방법 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불가능했다고 앞으로도 불가능하다는 법은 없다. 인간이 추구하는 과학기술이 어디까지 발달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뇌만 남기고 또는 뇌에 기억되어 있는 기억들만 다른 저장장치로 옮기고, 육체는 언제든 개조하거나 바꿀 수 있게 한다면, 또 기억도 이 장치에서 저 장치로 계속 옮겨 저장해서 영원이 보존되도록 한다면, 그때는 인간이 불멸의 존재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인간을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안톤 허가 쓴 이 소설을 읽으며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불멸이 영원이라면, 이 소설 제목이 '영원을 향하여'니까 인간이 불멸의 존재를 꿈꾸는 내용일까 추측을 했지만, 아니다. 소설에서 인간들은 불멸을 꿈꾸지 않는다. 그들은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인간이니까. 


그렇다면 '영원을 향하여'는 무엇일까? 죽음을 향하여 간다는 말일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죽음에 이르니까. 하지만 죽음이라고 하면, 그 이후 세계를 알 수 없기에 영원이라는 말을 쓰기엔 뭔가 좀 미진하다.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영원이 무엇일까? 소설에서는 나노봇으로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연장한다. 또한 나노봇으로 자신들의 기억도 보존된다. 그런데 그렇게 다시 나노봇으로 돌아온 인간이 과연 그 전에 몸을 지닌 인간과 같을까?


기억이 같더라도 전의 존재와 후의 존재가 같은 존재일 수는 없다. 분명 다르다. 소설 속 인물도 그 점을 느낀다. 따라서 그들은 불멸을 추구하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이려 한다. 다만 이들은 무언가를 계속 남기려 한다. 


이 남는 것이 바로 기록이다. 이들은 돌아가면서 기록을 한다.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무엇을 느꼈는지를 기록하고 그것을 다른 존재에게 넘겨 계속 기록하게 한다.


기록, 언어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언어로 이루어진 것 중에 인간다움의 한 요소로 시를 꼽는다면, 이 소설에 시가 그토록 많이 인용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의식적이든 의식적이지 않든 인물에게 문득 시 구절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시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생각한다. 시 못지 않게 음악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록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 첼로연주자인 것이 이를 대변한다.


뭉뚱그려 이야기하면 예술이다. 예술이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해주고 있음을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예술 역시 기록되지 않으면 전승이 되지 않는다. 하여 기록함, 기록됨이 소설에서 이어지게 되는데, 이는 몇 백 년이 흘러도 지속된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삶은 영원히 기억이 되는데, 인간이 지구에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 우리는 기록으로 우리들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지 않나 하니, 이런 기록을 담당한 언어는 인간의 과거-현재-미래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언어'는 인간이 영원을 향해 갈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이 왜 기록을 하면서 기억하려 할까 하면 바로 그것이 사랑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 행동이 기록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런 절실한 마음이 기록이 멈추지 않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록은 영원을 향해 가는 길이다.


영원을 향해 가기 위해서 작동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에 이르게 하는 것이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언어와 사랑이 함께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수 백 년에 걸친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각 인물을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되고 있는데, 이들을 목차에 따라 정리하면 '말리 -> 용훈 -> 엘렌 -> 파닛 -> 로아 -> 델타 -> 크리스티나' 


여기까지가 지구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사람(? 사람의 형체를 지닌 나노봇? 이들을 엄밀히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인간의 몸이 아닌 나노봇으로 바뀌었기 때문)들이라면 그 이후의 기록은 지구를 떠나 우주에서 이어지게 된다. 아피나라는 존재가 그 책임을 지게 될 텐데... 그 이후는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하여 지구에서 기록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말리에게는 자신의 엄마에 대한 사랑, 한용훈은 남편인 쁘라섯에 대한 사랑, 엘렌은 음악에 대한 사랑, 그리고 파닛은 한용훈과 또 시에 대한 사랑, 로아는 그의 두 엄마에 대한 사랑이 있고, 델타와 크리스티나는 파닛의 나노봇으로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사랑을 이어주고 기억되게 하는 것이 언어로 기록된 공책이기에, 이 공책에 쓰인 내용들이 이어지면서 영원을 향하여 가게 된다.


지구에서 마지막 기록자라 할 수 있는 크리스티나에게 아피아가 하는 행동은 지구가 사라지더라도, 아니 지구 상에서 인간이 사라지더라도 이들이 남긴 기록은 계속 살아남아 영원히 기억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아피아)가 방주에 돌아가야만 한다고 설득했다. 그녀는 동의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델타가 남긴 공책에 내(크리스티나) 생각을 써 넣으면 아피아가 나의 일부를 방주로 가지고 돌아가 방주가 언젠가 지구의 궤도를 떠나 여러 세대에 걸친 피할 수 없는 여행을 떠날 때 나의 일부가 별들 사이에서 살아가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거절하려 애썼지만 아피아를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고 명백히 이것이 공책에 들어가야 할 이야기의 다음 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하얀 밤 내내 잠들지 않고 내 이야기를 썼다.' (227-328쪽)


이렇게 기록은 영원히 남게 되고, 이들이 살아오면서 지녔던 사랑도 영원히 남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사랑으로 영원을 향해 가게 된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말리가 엄마를 만나는 장면, 그리고 한용훈이 누군가를(분명 쁘라섯이다) 보고 달려가는, 영혼이라도, 그 장면으로 소설은 끝난다. 바로 이들은 이렇게 영원을 향하여 간다. 그건 바로 사랑이다.


'그는 이제 달린다. 빛을 향하여. 그리고 곧 그는 자기 자신의 서사에서 달려나가, 시의 손길에서 달려나간다. 영원을 향하여.'(352쪽)


서술자의 변주가 소설에서 엘렌이 말하는 '모차르트의 주사위 게임' 같은 느낌을 주지만, 그 전개가 짜임새 있게 진행되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기에 '모차르트의 주사위 게임'과는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왜 그가 기록자가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그것이 어울리기도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변주를 통한 조화. 재이 있게 읽은 소설이다.  특이하다고 생각한 점은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 영어로 소설을 썼고, 이를 소설가인 정보라가 번역했다는 점. 읽기 전에는 작가인 안톤 허가 미국에 살고 있을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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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그리다 - 무너진 자들을 위한 미술의 변명
박종성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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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시대를 그림으로 표현한 화가들이 있다. 저자는 그들을 '표현주의'라는 이름으로 묶고 있다.


예술이 마음을 표현하는 일인데, 이때 마음을 표현하는 일이 철저히 주관적이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떠날 수는 없다. 현실 속에서 마음이 표현되기 때문인데, 이는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표현주의'를 해석할 수 있다.


자신이 보아야 할 것을 보고 그리는 일, 이러한 표현주의가 한때 독일에서 자리를 잡았다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독일에서 표현주의가 활발히 활동하던 때를 저자는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 사이인 바이마르 공화국(헌법) 시대라고 하고 있다.


1차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의 비참한 상황. 그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그림을 통해 표현한 화가들. 그들이 그렇게 당시의 상황을 표현한 것은 정치적이라고, 미술은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는데.


하긴 우리 삶이 정치와 어떻게 떨어질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다 정치적이지 않은가. 그것이 집단으로 모여 정치적 힘을 발휘하느냐 하지 않느냐와는 별개로 정치와 삶은 떨어질 수 없다.


그런데 왜 표현주의는 바이마르 공화국 이후에 사그러들었는가? 아마도 예술가의 자유로운 표현을 용납하지 않았던 히틀러 시대였기 때문 아니었을까? '퇴폐미술전' 운운하면서 자신들을 반대하는, 또는 반대한다고 여겨지는 예술을 탄압했던 시대. 그러한 시대에 예술이 온전히 존재할 수 있을까?


이 책의 3장에 실린 그림들에 대한 설명을 보면 왜 나치 시대에 이 그림들이, 또 이러한 그림을 그린 화가들이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장에 실린 작은 제목들은 다음과 같다. 


'매춘(賣春)과 매춘(買春), 자살과 색정 살인, 카바레와 살롱, 전쟁과 패배'


이런 내용을 지닌 그림들이 탄압을 받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이때는 권력에 영합하는 예술을 하거나 또는 정치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여겨지는 예술을 할 수밖에 없다. (정치와 전혀 관계가 없는 예술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흔히 순수예술이라고 해서 정치적으로 해석되거나 이용되는 것을 거부하는 예술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 그랬듯이 이러한 순수예술 또한 정치적이다. 예술가의 자율적 표현을 억압하는 사회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표현일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의 끝부분에 우리나라에서 왜 표현주의가 제대로 활약을 하지 못했는가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논의를 펼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답은 이미 독일의 표현주의를 이야기하면서 했다고 본다.


독일에서 표현주의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라고 했다. 이는 사회는 혼란스럽고 국민들의 생활은 궁핍했지만,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막는 사회는 아니었다는 것. 즉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시대였기에 예술가들이 자신이 표현하고 싶었던 것들을, 또 자신이 보고 있는 것들을 보여줄 수 있었다.


반면 나치가 집권하고부터는 자유로운 표현이 불가능해졌다. 자연스레 표현주의는 사그러들 수밖에 없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서 표현주의 미술이 힘들었던 이유는 정치적으로 자유가 없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으로 인해 고통받는 조선의 현실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그때 받을 탄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또한 해방이 되고 나서 독재정권이 계속 이어졌으니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표현 역시 억제될 수밖에 없었다.


개인이 어찌어찌 표현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이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를 잡기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녹록치 않았다. 이런 현실의 차이가 독일에서는 표현주의 화가들의 활동이 활발했고, 우리나라에서는 힘들게 했을 것이다.


많은 화가들이 나온다. 그들이 그린 처연한 현실이 작품으로 표현되고, 그 작품과 작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요점은 이것이다.


미술은 정치다. 이 한 마디면 된다. 왜 정치적인가? 그것은 작가들이 자신들이 현실에서 보고자 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보여주고자 작품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절망의 시대, 절망의 현실을 표현함으로써 절망을 이겨내려고 하는, 문제를 인식하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작품 활동을 했기에 표현주의는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술은 정치와 떨어져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더불어, 아니 정치를 작품 속으로 끌어와 그 속에 표현해내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으니...


집단이 아니라도 좋다. 개인의 이러한 노력들이 사람들에게 다가간다면 인식의 전환을 이뤄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만들고, 그 새로운 시각으로 행동을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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