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왕 - 정보라 소설집
정보라 지음 / 아작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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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은 정보라 소설에 빠져 있다. 환상소설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소설 속에서 통렬하게 복수해주고 있어서 읽으면서 통쾌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귀신이 나오더라도 권선징악이고, 억울한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대한 보복이 따르는 인과응보가 있어서 권력이 현실에서 처벌받지 않는 유권무죄, 무권유죄 또는 무전유죄, 유전무죄인 사회에서 소설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읽으면서 가끔 이거 약자의 대리 만족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지만, 아니 그러한 대리 만족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도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는 말이고, 그러한 관점은 결국 현실을 변화시키는 쪽으로 한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는 생각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보라 소설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찾아내는 재미를 느끼기도 하고.


이번 소설집 제목은 [여자들의 왕]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지 않은가. 이제 모든 주인공은 여자다. 여자들을 등장시켜 그동안 우리들이 읽어왔던 작품들을 뒤집게 한다. 여성성을 평화와 사랑이라고만 생각하는 관점을 뒤집어 놓은 소설들이 있는데, 어떤 특정한 성향이 여성이나 남성에게만 속한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소설집의 앞에 실린 세 편 '높은 탑에 공주와, 달빛 아래 기사와, 사랑하는 그대와'는 '잠자는 숲 속의 미녀'라든지 용에게 납치된 공주를 구하는 기사 이야기 또는 서양의 좀비들 이야기를 바꾸었다고 보면 된다.


기사가 주인공이 아니라 공주가 주인공이고, 용은 나쁘지 않고 오히려 유모와 같이 (이 소설에서 유모가 깨어 있으면 용은 잠들어 있고, 용이 깨어 있으면 유모가 잠든다고 하니, 둘은 같은 존재다.) 공주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가 어떻게 비틀리는지, 여기서 여성이 사랑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되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는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사막의 빛' 또한 마찬가지다. 이슬람을 악마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니다. 이슬람 역시 포용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그들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소녀의 입장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다양한 문화가 만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자들의 왕,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어두운 입맞춤'은 모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지만, 여기서는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전쟁와 암투를 그리고 있다. 여성이 장군으로 나오는 경우 우리는 이미 '뮬란'에서 경험했다. 또한 우리나라 고전 소설인 '박씨부인전'에서도 뛰어난 여성을 만나왔다. 그럼에도 박씨는 여성으로서 무시와 고난을 겪고, 그것을 이겨냈다고 표현되고 있는데, 정보라 소설에서는 우선 뛰어난 능력으로, 그 자체로 자신을 드러내는 쪽으로 표현되고 있다.


여성들이 왕이 되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내용도 있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함에도 세상에서 잊혀지는 경우도 있으며, 흡혈귀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일 수도 있다는 설정으로 새로운 여성상을 만나게 된다.


굳이 여성과 남성으로 가를 필요는 없다. 그것이 앞 세 편의 소설에 나타나는 모습이다. 공주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만, 기사나 왕자를 불필요한 존재 또는 사악한 존재로만 그리지 않는다. 왕비 역시 마녀라고 나오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마녀가 아니라 사랑을 찾는 사람으로 볼 수 있도록 표현하고 있다. 즉 누구나 자신만의 사연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 사연을 자신의 잣대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이번 소설은 복수보다는 행복한 결말을 보여주는 작품이 많다. 특히 '사막의 빛'은 팔려간 소녀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 그 과정에서 소녀를 사간 상인들이(아랍 상인으로 추측할 수 있다) 소녀를 학대하지 않고 함께하는 모습, 소녀가 다른 존재를 아끼는 모습, 술탄이 무지막지한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고뇌를 지닌 인물이라는 점, 소녀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던 고향이 물 부족 없이 지내게 되었다는 결말.


동생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팔아야 했던 인신공양(인신공희)의 모습이 그 자체로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결말로 나아가는 것 (아마 '심청전'도 그렇지만 심청전에서 상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심청이를 바다에 빠지게 했지만 이 소설에서 아랍 상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다만 술탄에게 바친다는 행위는 심청이를 바다에 빠뜨리는 행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죽음을 알고 그곳으로 보내지는 않으니)이 좋다.


각박한 세상에서도 한 줄기 빛을 볼 수 있다면, 그 빛에 의해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 계속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런 역할을 문학이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복수의 소설이든 행복의 소설이든 모두, 그러한 한 줄기 빛을 보여주는 것.


정보라의 이번 소설에서는 그러한 빛을 보아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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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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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고통으로 사람을 치유한다는 사이비 종교가 등장한다. 얼핏 들으면 불교와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불교도 고통을 말하고 있지 않나. 그 고통을 넘어서 해탈로 가는 길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해도 되나 싶기도 하지만) 불교 아니던가.


그런데 불교는 고통을 일부러 주지는 않는다. 이미 삶에 고통이 들어있기에 그 고통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이겨내려고 해야 한다고 한다면, 사이비 종교는 고통을 통해서만 사람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기에 외부에서 고통을 가한다. 신체적인 고통을 포함해서.


반대로 이런 신체적 고통을 없애기 위한 의학적 노력이 있다. 약을 통해 고통을 없앤다는 것도 인간을 기계로 보는 관점일 수 있지만, 현대 의학은 약물을 통해 신체를 조절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부작용도 없고 중독도 되지 않는 약이 나온다면...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는 약이 있다면 어떤 세상이 될까?


그런데 부작용이 없고 중독도 안 되는 약을 개발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실험 대상으로 이용한다면? 그 결과 나온 약으로 고통을 없앨 수 있다면 그것이 과연 고통을 없앴다고 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내 고통을 없앤다? 이것도 문제다. 동물 실험을 금지하고 있는 요즘,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하고, 그 사람을 고통에 빠뜨림으로써 개발된 약이라니... 그런 약이 과연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해 봐야 한다. 희생당한 사람들이 있는데...


소설은 강력한 두 부류를 설정하고 있다. 약을 통해 고통을 없애는 제약회사. 고통을 통해 고통을 넘어서야 한다는 사이비 종교. 그렇다면 제약회사가 약 개발에 성공하면 사이비 종교 집단은 그것을 용납할 수 있을까? 없다. 제약회사를 없애야 한다. 그러한 약을 개발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자신들이 약의 제조법을 빼돌려 복제한 약을 이용해 고통을 극복했다고 선전한다.


이렇게 두 집단은 대립하면서도 고통을 이용한다는 면에서는 같은 길을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위해 고통받는 사람들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수단에 불과하다. 인간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회, 있어서는 안 되는 사회다.


사이비 종교는 제약회사에 폭파해 최고 경영자들이 죽고 (소설 속 주인공 경의 엄마와 아빠다), , 약 제조법을 훔쳐 약을 제조하고(제약회사에 폭탄을 던진 태의 엄마가 위장 취업해 제조법을 빼내온다) 결국 사람이 죽는다.(검증이 안된 약을 제조해 신도들에게 먹게 하고, 그 부작용으로 사람들이 죽는다.) 형사들이 수사에 나선다. 과거 사건 관련자인 경과 태, 그리고 경을 사랑하는 현이 형사 륜과 순과 함께 등장한다. 여기에 의사... 이 의사의 존재가 환상문학으로 이 소설을 판단하게 한다. 


어쩌면 이 의사의 존재는 인간이 고통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몸을 몰랐던 외계의 존재가 인간의 몸으로 고통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를 경험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존재들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려 할까? 아마, 아닐 것이다. 내 고통을 이겨낸다는 것은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통을 아예 없애는 것도 문제지만 고통을 가함으로써 그것을 넘어서라고 강요하는 것도 문제다. 고통이 인위적으로 주어졌을 때는 폭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느끼는 고통, 자신에게 찾아온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 단계 성장한 자신을 발견하겠지만, 성장을 위해 일부러 고통을 가하는 것이 성장을 도울지는 의문이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사람의 삶은 모두 다르고 고통의 경험도, 고통에 대한 대응도 각각 달랐다. 자신의 고통은 자신만의 것이었다. 비일상적인 삶의 경험과 강렬한 고통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타인과 즉각적인 유대감을 맺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통과 고통의 탐색은 오히려 경을 타인으로부터 고립시켰다.

고통의 탐색에 매몰되면 결국 과거의 고통을 끊임없이 되돌아보아야 했다. 그러다 보면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던 그 고통으로 돌아가 결국 다시 그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과거에 발목을 잡히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던져야 할 질문들을 모두 던지고 나면 같은 질문에 더 이상 머무르지 말아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경은 그 사실 또한 확실히 깨달았다.' (301-302쪽)'  


이렇게 경의 깨달음으로 소설은 행복한 결말로 나아가지만, 그러한 행복을 보여주기 위해 고통을 겪는 사람들, 고통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비윤리적 의약 개발, 살인사건, 사이비 종교, 여기에 음모론까지 다양한 문제들이 등장하고 인물들이 얽히고설켜 소설의 재미를 더해준다. 끝부분까지 의문의 인물인 외계의 존재까지 나오면서 그것이 밝혀지는 과정도 재미 있다. 소설은 그러면서 과연 고통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끝까지 긴장을 하게 하는 사건 전개가 뒷이야기가 궁금하게 만들어 소설을 끝까지 읽게 만든다. 재미와 생각.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소설이었다. 무엇보다 남에게 고통을 주거나 남의 고통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 고통에 발목 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불교를 고통의 종교라고 하지 않고 자비의 종교라 하고, 기독교를 원죄(낙원에서 추방된 고통)의 종교라 하지 않고 사랑의 종교라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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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2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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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늘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잘살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살아 있을 때 죽음은 제쳐두곤 한다. 특히 지금의 생활에 빠져 있을 때 죽음은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그렇게 지금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남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이 얼마나 고통을 받고, 괴로워하는지를 생각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기 감정만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이 만약 죽음이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면 그렇게 행동할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언젠가는 반드시 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사람들은 남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줄이거나 멈출 것이다. 그런데도 제가 제 쾌락을 위해 행동할 때는 그런 점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행위들에 경종을 울리는 소설. 그 소설이 바로 정보라가 쓴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다. 학교 폭력을 떠오르게 하는 소설인데, 가해자들이 떵떵거리며 살아서는 안되지 않나 하는 생각. 그래서 가해자들을 소설 속에서 응징하는데, 이 소설에서 한때의 잘못, 어렸을 적의 실수라고 생각하는 인물이 나온다.


한때 저질렀던 잘못이라고? 용서할 수도 있지 않냐고? 자신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은 개구리에게 그건 실수였어라고 한다면, 개구리가 아, 실수였구나, 그래 내가 용서할게라고 할까? 그것은 가해자의 입장일 뿐이다. 피해자는 귀신에게라도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귀신이라도 자신의 억울함을 대신 풀어주길 바라는 마음, 어쩌면 소설은 그러한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정보라의 이 단편집에 실린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가 섬뜩하지만 그럼에도 위안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에서 반드시 실현된다고 할 수 없는 인과응보. 소설에서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을 소설에서 가능하게 하는 것.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을,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되는 것. 


이 소설집에는 기괴하다고 할 수 있는 소설들이 꽤 있다. 사실 우리가 죽은 사람들과 무엇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림자를 떼는 인물도 나오고('그림자 아래' - 이 소설을 읽으면서 구병모가 쓴 '파과'가 떠오르기도 한다. 나이 든 여성이 등장하고 그 일이 킬러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죽은 사람과 전화 통화를 하는 장면도 있고('전화'- 이 소설은 따스하다. 죽은 자와 통화할 수는 없겠지만, 때로는 감추고 싶은 죽음도 있고, 그 사람을 떠나보내기 위해서 필요한 시간도 있으니), 또 죽어서도 마약을 잊지 못해 찾아오는 존재도 있다.('사흘'- 마약이란 죽어서도 끊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게 사람을 망가뜨린다는 쪽으로 생각해도 좋다 )


이러한 장면들이 나오는 소설과 함께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도 있는데 (감염, 타인의 친절), 이런 소설들 역시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특히 남의 고통에 대해서 과연 우리가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그 고통은 다른 고통에 비하면  별것 아니라고 하거나,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하는 말들을 쉽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고통받는 사람에게 더한 고통을 주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결국 고통받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치는 그 사람이 고통을 것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그러한 시간과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섣부른 위로를 삼가면서. '타인의 친절'이란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고.


'감염'이란 소설은 섬뜩한 마음이 들게 했다. 자신이 아무리 아니라고 생각하고 행동해도 그 행동이 결국에는 자신의 몸에, 마음에 새겨지게 되는 모습. 자기 의지가 아니라 남이 원해서 하는 행동이었지만,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자신이 감염되고 마는 그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행동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중요하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하는 행동과 말들이 결국은 자신을 만들어간다는 것을, 우리가 왜 폭력을 사용하면 안 되는지, 혐오 표현을 하면 안 되는지를 적실하게 보여준 소설이다.


등장인물이 감염되어 가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다소 기괴한 장면도 나오지만, 그러한 기괴한 장면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속죄하게 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남에게 준 고통을 자신이 똑같이 받아야지만 속죄가 되는 것이 아니지만, 또 그러한 행위로 자신은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지 모르지만 자신에게 그러한 행동을 하게 한 사람은 은연 중에 감염되어 폭력을 내면화하게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감염이다. 하여 감염은 내 의지로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지만(면역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때, 이는 이성이 감정을 제어할 수 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순간 통제를 할 수 없게 된다면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으로 폭력을 제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러한 행동은 결국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온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예전에 발표한 소설들을 엮어서 낸 책인데, 한편 한편이 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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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통당한 몸 - 이라크에서 버마까지, 역사의 방관자이기를 거부한 여성들의 이야기
크리스티나 램 지음, 강경이 옮김 / 한겨레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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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힘들다. 아직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또 소위 강대국이라고 하는 나라,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 한때 평화운동의 상징이었던 사람 등등이 눈 감고 있다는 사실에.


전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시 강간에 대해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설마? 하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다가 아직도? 라는 비탄으로 끝난다. 아직도, 여전히? 이런, 참.


전시 강간은 전쟁 범죄와 같다. 분명 이는 반인도적 범죄 행위이고,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 되는 행위다. 그런데도 지금 전시 강간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한다. 전시 강간을 전쟁 범죄에 포함시키기 시작한 지가 얼마 안 되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전쟁 범죄에 포함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쳐 왔는지를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 힘든 과정을 거쳐 겨우 재판정에 세웠는데, 제대로 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피해자들의 상심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책에서 적은 부분을 일본군 성노예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그 범죄에 대해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진행형이다.


일본이 배상을 한다고 했지만, 그건 정부 차원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행위가 아니라 민간 자본을 끌어들여 생색내는 행위에 불과했기에 피해자들이 거부했던 것. 그 이후 일본은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아니, 뻔뻔하게 그런 일은 없다고 하고 있으니, 이런 일본 주장에 부화뇌동하는 작자들도 있는 현실이니...


우리나라뿐이 아닌 것이다. 전 세계에서 제대로 된 처벌이 없고, 오히려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현실이니...


이 책에서 전시 강간을 다루면서, 범죄자들을 재판정에 세워 정의를 이루려고 했지만, 많은 경우 아직도 제대로 된 처벌이 되지 않고 있는 모습을 알려주고 있는데, 이런 일들이 피해자들에게 정의가 여전히 멀리 있다고 느끼게 만들고 있다.


정말 많은 나라에서 전시 강간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라크와 시리아 사이에 살고 있던 야디지 족, 나이지리아에서 벌어졌던 보코 하람의 만행, 버마에서 일어났던 로힝야 족에 대한 범죄, 여기에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났던 일. 르완다. 보스니아, 2차세계대전 직후의 소련군. 남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일들,  아프리카 콩고,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벌어진 강간 등등. 


이것이 과연 인간인가? 이것이 20세기, 21세기에 이 지구에서 벌어진 일들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바로잡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 어떻게를 실천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증언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사회에 자리잡고 살 수 있도록 함께하려는 사람들, 재판정에서 진실을 밝히고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를 응징하는 분위가가 형성되도록 하는 사람들이 비록 갈 길은 멀지만 정의를 실현하려고 '어떻게'를 채워가는 사람들이다.


세계 곳곳에서 아직도 전시 강간이 벌어지고 있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미신을 위해서 아주 어린 사람들을 강간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이것은 개인의 노력으로 막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또 국가적으로 함께해야 할 문제다. 엄정하게 법 집행을 하고, 그런 행위를 한 사람은 어떻게든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전쟁 범죄를 언제든 처벌하듯이, 전시 강간 또는 강간을 기한을 두지 않고 처벌해야 한다. 또한 처벌을 강도를 높여야 한다.


강간은 반인도적 범죄이고, 인격 살인이기 때문이다. 전시 강간은 전쟁 범죄이기 때문이고, 그러한 행위에 가담한 사람은 전쟁 범죄자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불관용 원칙이 적용되는 모습을 끝까지 보여주어야 한다.


또한 국가가 피해자에 대한 배상과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정책을 펼쳐야 한다. 아직까지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고 있지만, 그래야 한다. 이 책에 나온 여성의 이 말. 이 말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말하기도 힘든 일이지만 사람들이 모르고 있기도 더 힘든 일이에요." (476쪽)


알고 있는데도 해결하지 않으면 그것 역시 범죄를 묵인하는 행위다. 지금 전세계가 권력자들이 이렇게 범죄를 묵인하고 있는 경우, 전시 강간 또는 강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묵인하는 것 역시 범죄에 동조하는 것임을 명심하게 하고, 국가 또 권력자 또 전세계가 이러한 강간이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또한 피해자에게 첵임을 전가하는 행위 역시 금지해야 한다. 그러한 생각을 지니게 해서는 안 된다. 가해자를, 그렇게 유발한 권력자들을 응징해야 한다. 우리가 겨누어야 할 방향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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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를 것이다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1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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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이야기의 효용 자체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세계를 상상 속에서 경험하는 것. 내가 직접 겪은 일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다른 삶의 이야기일 뿐이다.' (423쪽. 작가의 말에서)


다른 삶의 이야기, 그것이 소설이다. 따라서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않은 일들을 간접적으로 겪게 된다. 다양한 경험. 다양한 세계와의 만남. 그리고 거기서 다시 현실의 나로 돌아오는 경험. 그것이 소설이 주는 경험이다. 재미다. 


소설이 재미 없으면 읽으려 하지 않는다. 문학 연구자가 아니면 누가 재미 없는 소설을 읽으려 하겠는가. 하여 읽히는 소설은 재미 있는 소설이다. 이 재미를 통해서 다른 세계,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물론 이때 재미도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자신이 알던 세계와 다른 세계를 만나는 재미, 그리고 자신이 알던 세계를 좀더 구체적으로 만나는 재미가 소설이 주는 재미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소설집은 환상 문학 단편선이라는 제목으로 묶여 있다. 제목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인데, 이런 제목을 가진 소설은 없다. 요즘 나오는 소설집이나 시집들을 보면 제목이 된 소설이나 시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이때 읽으면서 도대체 이 제목은 어디에서 왔는지 찾는 재미도 있다. 


이 소설집은 'Nessun sapra'라는 소설에서 제목을 따왔다. 영어 제목도 아니고, 어떤 말인지 알 수 없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소설인데, 읽다가 끝에 가서야 이 뜻을 알게 된다. 이 문장이 '이무도 모를 것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많은 소설이 실려 있는데, '완전한 행복'이라는 소설에서 용서의 의미를 생각하는 구절을 만났다.


'잘못이 있음에도 자각하지 못하여 용서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용서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선이나 자비가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정의였다.' ('완전한 행복'에서. 416쪽)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회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 그것이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나기도 했다. 과연 그것이 혁명일까?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라고 했다는 아나키스트도 있다고 하는데, 내가 행복한 사회, 우리가 행복한 사회여야 한다.


한데 혁명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핍박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면서 자신은 혁명을 위해, 즉 대의를 위해 행동했을 뿐이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의를 위해서 희생당하는 사람은 있어야만 한다는 사고. 그러면서 자신은 당당하다고 외치는 사람. 혁명에서도 그러한데, 혁명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짓눌렀음에도 당당하게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 과연 용서란 무엇일까?


이 소설은 그런 점을 생각하게 한다. 작가의 말이 조금은 섬뜩하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이것이 바로 소설이 주는 경험, 재미 아니겠는가. 나 대신 누군가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주는 일. 그런 사람, 환경, 사회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 바로 소설가.


'어쩌다 보니까 나는 본의 아니게 복수 전문 작가가 된 것 같은데 많은 경우 화가 나서 글을 쓰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작가의 말에서. 421쪽)

'전쟁이 빨리 끝나고 나쁜 놈들이 얼른 몽땅 죽어서 전부 늑대에게 뜯어 먹히기를 소망한다.'(작가의 말에서. 425쪽. 참고로 늑대에게 뜯어먹히는 인간이 등장하는 소설은 '완전한 행복'이다. )


하하, 복수라? 소설 속에서 복수를 하는 인물들이 제법 나온다. 이 소설집에 실린 첫번째 소설 '나무'가 그렇다. 장난이 죽음으로, 복수로 치닫는 과정을 쓴 소설. 그렇다. 작은 일이 죽음으로까지 가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용서'를 생각한다. 용서를 빌 여지도 주지 않고 처벌을 한 경우가 이 소설이라면, 아예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니 용서를 빌 마음도 없는 소설이 '완전한 행복'이다. 


용서할 수 있을 때 용서하지 않는 것도 비극을 초래하지만, 잘못했다는 생각도 없는 존재를 용서했을 때도 비극이 일어나니, '용서'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을 했던 인물, 그러나 용서받았다고, 적어도 법적으로는 사면을 받았으니, 그런 인물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 있다. 바로 '산'이다. 이제 채 20년도 안 된 과거지만, 현재형이기도 한, 산을 깎고, 강을 막고 파헤쳐 자연을 훼손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정부.


그런 일이 어떤 일을 초래하는지, 그것은 전쟁과도 같은 역할을 함을 '산'이라는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이 소설집 [아무도 모를 것이다]는 그간 발표된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우리가 읽는 재미를 느끼며,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고 있다. 좋다. 단편선2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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