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의 누더기 소녀 - 완역본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7
L. 프랭크 바움 지음, 최인자 옮김, 존 R. 닐 그림 / 문학세계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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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현실 세계의 사람들은 오즈를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어린 독자들은 오즈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어한다. 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오즈. 작가는 무전을 생각해낸다. 무전을 통해서 도로시로부터 오즈의 이야기를 듣는 것.


이제 독자들은 계속 오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비록 현실에서는 볼 수 없고, 갈 수도 없지만, 오즈는 계속 존재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오즈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할까? 도로시로부터 시작해도 좋겠지만, 작가는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킨다. 오즈와 이름이 비슷한 오조다. 삼촌과 단 둘이 살고 있는 오조가 새로운 세상으로 여행을 하다가 마법사의 집에서 사고를 겪는다.


삼촌과 마법사의 아내가 돌로 변한 것. 이것을 풀 수 있는 마법의 재료를 가져와야 한다. 이 마법사는 2권에서 오즈마 공주 편에 관련된 생명의 가루를 만든 마법사. 그는 생명의 가루로 아내가 만든 헝겊 인형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준다.


오조와 헝겊 인형(이 헝겊 인형이 누더기 소녀다)이 함께 여행을 떠나는데, 그 전에 이미 생명을 부여받는 유리 고양이와 함께다. 이 여행이 독자들에게 친숙해지기 위해 털북숭이 노인을 등장시켜 함께 여행하게 하고, 에메랄드 시에 도착해서는 도로시와 허수아비도 함께 하게 된다.


마법의 재료들을 모으는 것은 실패했지만 오즈마 공주의 도움으로 돌로 된 사람들이 다시 돌아온다. 행복한 결말이다. 결말은 늘 행복이니 여기까지의 과정을 살펴야 한다.


이번 편에서 무엇을 생각할까? 마법은 이제 아니다. 오즈마 공주는 오즈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했다. 마법 말고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 이번 편은 언어다. 말이다.


말로 상처를 주고, 심지어는 말로 인해 전쟁까지 벌어질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언어는 자신을 규정짓기도 한다.


오조를 수식하는 말은 '불행한'이었다. 오조는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자신이 관여를 하면 결과가 좋지 않다고, 삼촌이 돌이 되는 것도 또 오즈마 공주가 금한 일을 해서 죄수로 갇히게 되는 것도 모두 자신이 '불행한 오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자기 암시다. '머피의 법칙'이라고 해야 할까? '불행한'이라는 꾸밈말에 갇히면 어떤 일에도 이것과 연관짓게 된다.


난 역시 안돼. 무엇을 해도 안돼. 나하고 함께하면 불행해져. 이런 사고가 결국 자신의 행동을, 행동의 결과를 그렇게 만들도록 한다.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길을 차단한다.


오조 역시 그랬다. 그런 오조에게 새로운 이름을 준다. 오즈마 공주는 '행복한 오조'라고 부른다. 허수아비 역시 '행복한 오조'라고 부른다. 이때 오조가 자신이 불행하다는 증거로 든 것들의 반례가 나온다.


금요일... 불운한 날. 아니다. 일주일 중의 하루일 뿐이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나기도 하겠지만 좋은 일 역시 일어나는 날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13일... 서양에서는 13일의 금요일을 악마가 강림하는 날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고, 13이란 숫자를 불길한 숫자로 여기는 경우도 있지만, 양철 나무꾼은 이를 간단하게 뒤집는다. 자신에게는 13이 행운의 숫자라고.


그랬더니 오조는 자신이 왼손잡이라고 말한다. 불행한이라는 말을 증명하려 들면 온갖 것들이 다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양철 나무꾼은 '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왼손잡이였단다. 왼손잡이들은 보통 양손을 다 쓸 수 있지. 하지만 오른손잡이들은 한 손밖에 쓰지 못하잖니.'라고 하면서 왼손잡이는 축복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많은 핑계를 찾아낼 수 있다. 오조는 팔에 사마귀가 있다는 것까지 들먹인다. 참, 가지가지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불행을 어떻게든 그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는 경우가.


오른팔에 있는 사마귀가 불행을 야기할 수 있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반대로 '네 코끝에 사마귀가 있다면 그건 불행한 징조야. 하지만 팔 밑에 있는 사마귀는 행운의 표시란다'(228쪽)라고 같은 사실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언어다. 언어가 자신의 삶을 규정할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해준다. 모험 중에 만나게 되는 호퍼 나라와 호너 나라의 전쟁이 일어날 뻔한 것도 결국 말 아니던가.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말들로 인해 일어나는 갈등. 이것은 허심탄회하게 또는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지니고 듣는다면 더이상의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처럼 말은 서로의 관계를 좋게 할 수도, 나쁘게 할 수도 있으며, 자신을 좋은 방향으로 또는 나쁜 방향으로 규정할 수 있음을 이번 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작가는 어떤 것에서 '불행한' 이유를 찾기보다는 그것이 '행복한' 이유가 되는 쪽으로 관점을 돌리기를 오조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제 다음에는 어떤 사건이, 무엇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을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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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으나 있는 존재. 귀신. 


  제목이 눈길을 끈다. 귀신의 왕. 세상에 귀신에게도 왕이 있나? 귀신의 세계는 평등하지 않나. 이미 죽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없는데 이들에게도 왕이 있다고 하면 참...


  그런데 어디에도 이런 위계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귀신의 왕이란 말을 진짜 왕이고, 권력의 정점에 있는 존재로 보면 안 된다. 그래서 시집의 제목이 된 시 '귀신의 왕'을 읽어봤더니, 맞다. 왕 이야기는 없다.


  귀신의 왕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지만 시는 골목을 이야기한다. 골목, 현대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존재. 도시만이 아니라 시골에서도 골목은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한때 골목에서는 모든 일이 일어났다. 모두가 만났다. 그래서 삶이 있는 곳이었는데, 현대인에게 골목은 죽은 곳. 귀신과 같은 곳이다. 만날 수 없는 곳. 만나기는 하지만 그것은 과거에 속한 곳. 그런 곳이 바로 골목이다.


이 시집은 귀신 이야기가 전체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시와 마지막 시 제목이 '미메시스'다. 미메시스, 쉽게 말하면 모방이다. 모방이란 실제가 아니다. 실제인 것처럼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쓰기다. 여기서는 '시'다. 


'시'는 실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시'는 귀신이다. 골목과 같이 우리 삶을 품고 있었던 존재... 그런데 '시는 귀신이다'라고 해놓고 보니, 시가 실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는 실재한다. 그런데 실재하는 시가 무엇이지? 시가 도대체 어떻게 실재한다는 거지? 시라는 형식을 빌려 언어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그것은 결국 모방에 불과한 것 아닌가. 사라진 것,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거나 들려주는 것. 그래서 '미메시스'라는 시로 시집의 앞뒤를 장식했고, 결국 귀신 이야기와 같이 시 역시 실재 세계의 뒷편에 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모방이 실재와 같으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귀신이 존재하냐 존재하지 않느냐도 중요하지 않다. 이미 언어로 표현이 되었으니 우리에게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 잃어버렸던 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


귀신 이야기 역시 실재의 삶에 무언가를 환기시키기 위해서 말해지지 않던가. 그러니 시 역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우리 눈 앞에 불러내려 한다. 언어로... 그 언어가 모방의 세계든 아니든 상관없다.


시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 자체가 실재가 되고, 그것이 우리 삶을 이루는 요소가 된다. 귀신 역시 마찬가지다. 실재든 아니든 귀신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니, 이 시집에는 잃어버린 것들, 지나간 것들에 대한 시들을 많이 찾아낼 수 있게 된다. 그것들을 귀신으로, 다시 언어로 불러내는 미메시스로 만나게 된다. 과거는 현재가 불러내는 귀신이라고 하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하는데...


귀신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막 살 수가 없다. 과거를 불러내어 환기한다는 것 자체가 현재의 삶을 돌아본다는 뜻일 테니까.


그렇게 이 시집을 현재를 구성하는 과거를 보여주는 시들이라는 관점에서 읽었다. 그러면서 내 과거, 내가 잃어버린 또 잊어버린 것들이 무엇일까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 시집이 마음에 드는 것은 시집 뒤에 실린 글들이다. '시인 노트, 시인 에세이, 발문, 김언에 대하여'가 실려 있는데, 시인에 대해서 좀더 알 수 있어서 좋았다고나 할까.


시인의 말을 하나 인용하면서 끝낸다. 이 시집에 있는 시들은 산문시도 많고 또 산문시가 아닌 시들도 대체로 길어서 인용하기는 좀 힘드니... 시집을 찾아 읽으면 좋을 것이고...


'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향하는 문을 연다. 그것들이 들어와 웅성거리는 것을 듣는다. ... 한 발짝 그들 속으로 발을 옮긴다. 거기에서 펼쳐지는 것들은, 실상 내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내게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의식이 지워버린 것들을 끄집어내는 행위가 곧 쓰기이기 때문이다.'   ('시인 노트에서'. 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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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공화국 - 주권자 국민이 만든다
박승옥 지음 / 기적의마을책방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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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또한 기회를 주기도 했다. 위기가 기회라고 했던가, 쿠테타 세력을 뿌리뽑지 않으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었으니.


이제 우리나라에는 비상계엄은 없을 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 터진 것.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주고 그것을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2024년 12월 3일을 통해 우리나라의 앞날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헌법으로 충분한가? 지금 헌법으로 부족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꽤 오래 전부터 개헌 논의가 있었지만, 개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논의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논의가 제대로 되지 않고 개헌이라는 말만 나오다 사라졌다는 것은 정치권에서는 의지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된다.


즉, 정치권에 개헌을 맡길 수 없다는 말이다. 최근 이 대통령이 개헌 논의를 국회로 넘겼다고 하는데, 국회가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개헌은 여야가 자신들의 이익을 중심으로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중심에 놓고, 이 나라가 어떻게 해야 국민을 잘살게 할지를 논의해야 하는데... 지금도 서로 비난(분명 비판이 아니다)만 하고 있는 상태니.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다. 그러니 국회에 개헌 논의를 맡겨서는 아마도 논의만 되다가 끝나거나 또는 대통령 선출이라는 점만 손대고 끝날 수도 있다. 이것이 국민이 바라는 점인가.


광장에 나갔던 사람들이 원했던 개헌이 대통령 선출 방식을 바꾸는 데만 있는가? 아니다. 지금까지 40년 넘게 유지되어 왔던 헌법이 시대를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에 맞게 개헌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중에 대통령 선출에 관한 것도 포함되겠지만.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지만, 국민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날은 투표하는 날밖에 없다. 투표가 끝나면 다시 권력은 대리인들에게로 넘어간다. 그들은 자신들이 국민들을 대의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들이 권력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국회의원이든 지방자치단체장이든 선출직들이 그러한 모습을 지니는 것은 한번 선출되면 그 자리에서 쫓겨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이라는 최고 권력자를(사실 최고 권력자는 국민이다. 헌법에도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되어 있으니) 두 번이나 탄핵시켰으니, 권력을 견제할 수 있다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건 워낙 예외적인 사안이다.


지방자치단체장이나 국회의원을 소환할 방법이 없다. 주민투표? 법에 없다고 한다. 그냥 참조 사항일 뿐이다. 이마저도 몇 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러니 헌법 개정으로 7공화국을 수립하자는 말이 나오는 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사실 탄핵 이후 헌법 개정 논의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면 좋았겠지만, 이 책에서 우려한 대로 대통령 선거로 모든 관심이 쏠려 버렸으니, 때를 놓치기는 했지만, 개헌에 대한 필요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새로운 정부 출범에 맞춰 개헌에 대한 논의를 하면 된다. 그래서 지금 시대에 맞는, 국민들의 염원에 맞는 헌법을 갖추면 된다.


이 책은 그렇게 6공화국을 극복하고 7공화국을 이루자는 주장을 담고 있는데, 많은 논의가 담겨 있지만 핵심은 두 가지다. 권력을 실질적으로 국민에게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두 가지, 국민 발의제와 국민 소환제를 헌법에 명시해야 한다고.


정책이나 법률을 당연히 국민이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 발의는 꼭 필요하다. 자신의 의견도 내지 못하는 권력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권력자는 자신이 위임한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사람을 소환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헌법에 명시되도록 개헌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이면 실질적인 지역자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하고.


이렇게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것의 핵심은 국민 발의와 국민 소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되어야 제대로 된 7공화국으로 갈 수 있다고...


간혹 인정하기 힘든 주장도 있기는 하지만, 이 두 가지 주장에 대해서는 동감할 수 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으면, 실질적으로 국민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지. 투표날 한 표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차분히 헌법 개정에 대해서 논의를 해야 할 때다. 이 책도 그런 논의에 보탬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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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 지음, 윤진 옮김 / 엘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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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대한 욕망. 기록은 문자로 이루어지는 활동인데, 문자는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기록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남기고 싶다는 욕망을 실현하는 행위인데, 자신을 남기고 싶다는 욕망은 유한한 생명을 지닌 인간이 무한을 추구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사실인가? 역사서, 예를 들면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당시에 있었던 사실(史實)이 적혀 있다. 그것이 사실(事實)인지는 알 수 없다. 기록에 남아 있을 뿐이다. 문자로. 


이렇게 기록은 문자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문자를 통해 다가오기 때문에 한 단계 이상을 거쳐야 한다. 사실이 이 단계를 최소화 했다면, 허구는 이 단계를 더 많이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단계들이 더 늘어났을 뿐이지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는 점에서는 같은 행위가 된다.


문학이 그렇다. 문학은 문자로 이루어진 행위 중에서 사실(事實)에서 멀리 떨어진, 여러 단계를 거친 기록이 아닌가. 그런 문학이 우리들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는 다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란 책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작가와 작품을 완전히 분리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작가와 작품을 일치시킬 수도 없다. 이미 문자(언어) 자체가 분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와 작품에는 여러 단계들이 걸쳐 있는데, 어떤 작품은 그 단계가 하나 또는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고, 어떤 작품은 많은 단계들이 중간에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소설 한 권을 읽으면서. 우선 제목이 '기록'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볼라뇨 소설에서 빌려온 구절이라고 하는데, 문학이 바로 그것 아니겠는가.


즉 문학은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을 문자로 표현한 것. 그래서 우리는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미로를 헤맬 수밖에 없다. 기록 자체도 이렇게 헤매게 하는데, 은밀한 기억을 기록했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소설에 나오는 엘리만의 소설 제목이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라고 나오는데, 이때 비인간적인 것을 다르게 볼 필요가 없다. 그것을 문학이라고 보면 된다. 문학의 미로... 문학은 미로다. 이 미로 속을 헤매다 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떻게든 나온다. 그렇지만 자신이 나온 길을 알지는 못한다. 다시 미로 속에서 헤매게 된다.


사라진 작가 엘리만을 찾아가는 여정. 그 과정은 문학을 찾아가는 여정인데, 이때 문학은 최고의 작품, 최후의 작품을 의미할 수도 있다. 작가는 누구나 단 한 작품을 쓰길 원하는데, 그것은 최고이자 최후의 작품이 되어야 한다.


불가능한 꿈. 미로 속을 헤매는 것은 독자만이 아니다. 작가 역시 미로 속을 헤맨다. 그가 미로에서 나왔을지라도 미로를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다시 미로 속으로 들어간다. 또 헤맨다. 이것이 작품을 쓰는 작가들이 겪는 일이다.


이런 미로를 부정하고, 자신은 신의 위치에서 미로를 내려다보면서 길을 훤히 안다고 생각하는 작가. 그런 작가가 있을까? 자신의 작품이 완벽하다고 여기는 작가가 있을까? 그런 작가는 없다. 왜냐하면 작가는 자신이 미로 속에 들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소설을 읽으면서 다른 미로를 헤매보자. 굳이 문학이라는 미로를 또다시 헤맬 필요가 있을까?


세네갈, 프랑스 식민지. 여기서 태어나 자란 세 명의 인물. 이 인물들이 미로 속에서 길을 알려주는 열쇠 역할을 한다고 하자. 우선 엘리만 마다그 디우프. 다음은 시가 D. 그리고 이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디에간 라티르 파이.


엘리만은 식민지 세네갈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식민모국의 문화를 습득한 사람. 식민모국의 언어로, 문화로 그들과 융화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 그가 쓴 소설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는 표절로 밝혀지고, 그는 프랑스 문학계에서 매장당한다. 


그 작품이 그동안 유럽 문화에서 이루어졌던 성과들을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냈다는 것.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고, 문학은 과거의 작품을 딛고 이루어지는 활동이라지만 식민지 출신의 작가가 자신들의 문화를 그렇게 녹여냈다는 사실에 감탄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흉내 아니면 따라잡기. 따라잡기 위한 몸부림.


엘리만에게 최대의 칭송으로 붙은 말인 '흑인 랭보'라는 말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훌륭한 작품을 써도 식민모국 작가의 아류로 머무는 것이다. 엘리만은 이를 넘어설 작품을 쓰려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이 과연 그런 성취를 거뒀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식민지 시절의 사람이고, 아마도 유럽 문화를 익히고 그들과 동화되려 한 첫세대가 되기 때문이다. 첫세대가 겪는 어려움은 그들과 같아지려고 하지만 같아질 수 없다는 것. 


다음 세대는 시가 D다. 엘리만의 다음 세대. 이제 그들은 식민지에서 벗어난 시대를 살아간다. 그렇지만 완전히 식민모국의 문화와 단절되지는 못한다. 자신들의 문화를 찾지 못한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이 세대를 대표하는 시가 D는 세네갈과 완전히 단절한다. 문학으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세계와 결별한다.


과거와의 단절을 실천하는 세대. 시가 D. 하지만 이 단절이 자신의 고향에서 자신을 분리시킴으로써 이루어지기에 이 문학과 저 문학의 단절이 생긴다. 


시가 D보다 다음 세대인 디에간은 문학의 보편성에 대해서 고민한다. 이제 식민지는 역사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완전히 사라졌을까? 이 점에 대해서 고민을 해봐야 한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문학의 특수성일 수 있다. 문학의 보편성은 이러한 특수성을 넘어서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친구 무심브와는 아프리카 문학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자신의 문학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식민모국의 문학을 흉내내고 따라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얼마나 가깝게 다가갔느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엘리만의 경우를 보고 이해할 수 있지 않느냐는 무심브와의 말. 


이 말에 따르면 시가 D의 문학은 아프리카 문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냥 식민모국의 문학일 뿐이다. 하지만 다음 세대는 이제 개별성-특수성-보편성을 고민할 정도의 시간이 흐른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만의 문학이 무엇일지 고민하고 그것을 찾아야 한다. 그러한 문학을 해야 하는데, 방향에 정답이 있지는 않다. 특수성 속에서 보편성을 추구할 수도 있고, 인간이 지니는 성향은 어디서나 통한다는 보편성을 중심에 놓고 문학 활동을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식민지를 겪은 나라에서 자란 세 세대가 문학을 대하는 태도를 중심으로, 이 소설의 미로 속에 들어가도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역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 상황을 경험했고, 그 당시 문학(예술)을 하는 사람들도 비슷한 고민을 했을 테니.


이렇게 이 소설을 식민지를 겪은 나라의 작가가 겪는 고민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생각하면서 읽는다. 물론 추리소설적 요소도 있고, 문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경구 같은 것도 있지만, 그냥 세대 별로 식민지와 식민모국의 문화를 대하는 태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의 차이 등을 생각하며 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에 나오듯이 '문학은 시커멓게 반짝이는,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관과 같'(526쪽) 은 존재이니 말이다.


긴 소설인데, 읽기에 만만치 않다. 다만 중간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읽는 속도가 붙는다. 역시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기에 그것을 찾는다는 느낌으로, 또는 미로 바깥으로 나갈 길이 조금씩 보인다는 기분으로 읽게 되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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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에메랄드 시 - 완역본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6
L. 프랭크 바움 지음, 최인자 옮김, 존 R. 닐 그림 / 문학세계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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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의 궁핍. 노동자라 할 수 있는 도로시의 보호자인 헨리 아저씨와 엠 아주머니는 열심히 일했지만 결국 파산을 하게 된다. 노동자들이 처한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파산에 직면해서 도로시가 선택한 것은 오즈로 가는 것.


현실 도피인가? 아니 현실에서 바라는 것들을 우리는 환상 속에서 실현하려고 하지 않나. 그런 꿈을 꾸는 것은 어려운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아나가도록 하지 않나.


도로시 가족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어려움 속에 빠져들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 오즈다. 물론 현실세계에서 이러한 돌파구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어린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에서 파멸되어 가는 모습을 그리기보다는 그것을 이겨내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이렇게 도로시 가족은 오즈마 공주의 도움으로 오즈로 가게 된다. 이번에는 도로시도 아주 오즈에 정착할 작정으로.


오즈에 도착해서 신기한 존재들을 만나는 헨리 아저씨와 엠 아주머니. 도로시는 오즈를 여행하면서 신기한 존재들을 더 만나게 되는데, 이런 장면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신기한 존재들은 빵과 쿠키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종이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퍼즐 나라, 주방 기구들의 나라, 토끼들의 나라도 가고, 또 횡설수설과 호들갑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도로시는 횡설수설 사람들을 만나면서 말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여러 부류의 존재들을 만나면서 그들 특성에 맞게 관계를 맺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 행동이 다른 존재들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사람의 재채기에도 날라가 버리는 종이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여기에 아무리 행복한 오즈라고 하지만 위협이 없을 수는 없다. 놈 왕이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함께 오즈를 정복하러 오게 되는데...


이때 오즈마 공주의 선택은 싸움이 아니다. 사람들이 다치는 것이 싫다는 것. 결국 마법의 샘물로 그들을 물리치지만, 평화를 유지하는데 전쟁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오즈마 공주의 선택이 좀 다르긴 하지만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이 생각난다. 바보 이반 역시 왕이 되어서도 전쟁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 전쟁은 필요 없는 행위다. 오즈마 공주 역시 마찬가지다. 망각의 샘물로 처들어온 적들의 기억을 지운다. 사악한 기운을 지우는 것. 


자신들의 쾌락만 생각하고 남의 불행을 오히려 자신의 행복으로 삼는 존재들에게 그러한 기억을 지우는 것. 남에게 군림하려는 기억, 남을 약탈하려는 기억, 그러한 기억을 지움으로써 오즈는 다시 행복하게 지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오즈에 다시 이러한 일이 생기지 말란 법이 있나? 또 오즈의 외부, 즉 오즈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현실 세계의 사람들이 오즈로 온다면? 하여 착한 마녀 글린다의 도움으로 오즈는 외부에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진다.


이것은 과학기술로 인해 어디든지 갈 수 있게 된 현대인의 기술에 대한 비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스스로 잘 살고 있던 공동체를 과학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이 파괴했는지를 생각하면, 오즈를 외부의 눈길로부터 차단한 것이 이해가 된다.


이렇게 오즈는 이제 차단이 된다. 어린 독자들은 오즈가 다른 세계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환상의 세계는 계속 환상 속에 남아 있어야 한다.


즉 모든 것이 보이는, 보여지는 삶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있어야 한다. 남이 알지 못하는. 그러면서 그 세계 속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우리는 어쩌면 과학기술로 그러한 세계를 파괴했는지도 모른다.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중에 이번 편을 읽으면서 현대 과학기술 문명이 스스로 살아가는 공동체를 파괴할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또한 현대 문명을 접한 공동체는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왕이 된 토끼가 자신의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모습에서 찾을 수 있으니...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문명을 거부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문명이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작가는 [오즈의 마법사]를 통해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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