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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 지음, 윤진 옮김 / 엘리 / 2022년 11월
평점 :
기록에 대한 욕망. 기록은 문자로 이루어지는 활동인데, 문자는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기록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남기고 싶다는 욕망을 실현하는 행위인데, 자신을 남기고 싶다는 욕망은 유한한 생명을 지닌 인간이 무한을 추구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사실인가? 역사서, 예를 들면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당시에 있었던 사실(史實)이 적혀 있다. 그것이 사실(事實)인지는 알 수 없다. 기록에 남아 있을 뿐이다. 문자로.
이렇게 기록은 문자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문자를 통해 다가오기 때문에 한 단계 이상을 거쳐야 한다. 사실이 이 단계를 최소화 했다면, 허구는 이 단계를 더 많이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단계들이 더 늘어났을 뿐이지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는 점에서는 같은 행위가 된다.
문학이 그렇다. 문학은 문자로 이루어진 행위 중에서 사실(事實)에서 멀리 떨어진, 여러 단계를 거친 기록이 아닌가. 그런 문학이 우리들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는 다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란 책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작가와 작품을 완전히 분리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작가와 작품을 일치시킬 수도 없다. 이미 문자(언어) 자체가 분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와 작품에는 여러 단계들이 걸쳐 있는데, 어떤 작품은 그 단계가 하나 또는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고, 어떤 작품은 많은 단계들이 중간에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소설 한 권을 읽으면서. 우선 제목이 '기록'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볼라뇨 소설에서 빌려온 구절이라고 하는데, 문학이 바로 그것 아니겠는가.
즉 문학은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을 문자로 표현한 것. 그래서 우리는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미로를 헤맬 수밖에 없다. 기록 자체도 이렇게 헤매게 하는데, 은밀한 기억을 기록했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소설에 나오는 엘리만의 소설 제목이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라고 나오는데, 이때 비인간적인 것을 다르게 볼 필요가 없다. 그것을 문학이라고 보면 된다. 문학의 미로... 문학은 미로다. 이 미로 속을 헤매다 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떻게든 나온다. 그렇지만 자신이 나온 길을 알지는 못한다. 다시 미로 속에서 헤매게 된다.
사라진 작가 엘리만을 찾아가는 여정. 그 과정은 문학을 찾아가는 여정인데, 이때 문학은 최고의 작품, 최후의 작품을 의미할 수도 있다. 작가는 누구나 단 한 작품을 쓰길 원하는데, 그것은 최고이자 최후의 작품이 되어야 한다.
불가능한 꿈. 미로 속을 헤매는 것은 독자만이 아니다. 작가 역시 미로 속을 헤맨다. 그가 미로에서 나왔을지라도 미로를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다시 미로 속으로 들어간다. 또 헤맨다. 이것이 작품을 쓰는 작가들이 겪는 일이다.
이런 미로를 부정하고, 자신은 신의 위치에서 미로를 내려다보면서 길을 훤히 안다고 생각하는 작가. 그런 작가가 있을까? 자신의 작품이 완벽하다고 여기는 작가가 있을까? 그런 작가는 없다. 왜냐하면 작가는 자신이 미로 속에 들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소설을 읽으면서 다른 미로를 헤매보자. 굳이 문학이라는 미로를 또다시 헤맬 필요가 있을까?
세네갈, 프랑스 식민지. 여기서 태어나 자란 세 명의 인물. 이 인물들이 미로 속에서 길을 알려주는 열쇠 역할을 한다고 하자. 우선 엘리만 마다그 디우프. 다음은 시가 D. 그리고 이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디에간 라티르 파이.
엘리만은 식민지 세네갈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식민모국의 문화를 습득한 사람. 식민모국의 언어로, 문화로 그들과 융화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 그가 쓴 소설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는 표절로 밝혀지고, 그는 프랑스 문학계에서 매장당한다.
그 작품이 그동안 유럽 문화에서 이루어졌던 성과들을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냈다는 것.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고, 문학은 과거의 작품을 딛고 이루어지는 활동이라지만 식민지 출신의 작가가 자신들의 문화를 그렇게 녹여냈다는 사실에 감탄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흉내 아니면 따라잡기. 따라잡기 위한 몸부림.
엘리만에게 최대의 칭송으로 붙은 말인 '흑인 랭보'라는 말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훌륭한 작품을 써도 식민모국 작가의 아류로 머무는 것이다. 엘리만은 이를 넘어설 작품을 쓰려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이 과연 그런 성취를 거뒀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식민지 시절의 사람이고, 아마도 유럽 문화를 익히고 그들과 동화되려 한 첫세대가 되기 때문이다. 첫세대가 겪는 어려움은 그들과 같아지려고 하지만 같아질 수 없다는 것.
다음 세대는 시가 D다. 엘리만의 다음 세대. 이제 그들은 식민지에서 벗어난 시대를 살아간다. 그렇지만 완전히 식민모국의 문화와 단절되지는 못한다. 자신들의 문화를 찾지 못한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이 세대를 대표하는 시가 D는 세네갈과 완전히 단절한다. 문학으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세계와 결별한다.
과거와의 단절을 실천하는 세대. 시가 D. 하지만 이 단절이 자신의 고향에서 자신을 분리시킴으로써 이루어지기에 이 문학과 저 문학의 단절이 생긴다.
시가 D보다 다음 세대인 디에간은 문학의 보편성에 대해서 고민한다. 이제 식민지는 역사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완전히 사라졌을까? 이 점에 대해서 고민을 해봐야 한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문학의 특수성일 수 있다. 문학의 보편성은 이러한 특수성을 넘어서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친구 무심브와는 아프리카 문학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자신의 문학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식민모국의 문학을 흉내내고 따라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얼마나 가깝게 다가갔느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엘리만의 경우를 보고 이해할 수 있지 않느냐는 무심브와의 말.
이 말에 따르면 시가 D의 문학은 아프리카 문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냥 식민모국의 문학일 뿐이다. 하지만 다음 세대는 이제 개별성-특수성-보편성을 고민할 정도의 시간이 흐른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만의 문학이 무엇일지 고민하고 그것을 찾아야 한다. 그러한 문학을 해야 하는데, 방향에 정답이 있지는 않다. 특수성 속에서 보편성을 추구할 수도 있고, 인간이 지니는 성향은 어디서나 통한다는 보편성을 중심에 놓고 문학 활동을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식민지를 겪은 나라에서 자란 세 세대가 문학을 대하는 태도를 중심으로, 이 소설의 미로 속에 들어가도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역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 상황을 경험했고, 그 당시 문학(예술)을 하는 사람들도 비슷한 고민을 했을 테니.
이렇게 이 소설을 식민지를 겪은 나라의 작가가 겪는 고민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생각하면서 읽는다. 물론 추리소설적 요소도 있고, 문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경구 같은 것도 있지만, 그냥 세대 별로 식민지와 식민모국의 문화를 대하는 태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의 차이 등을 생각하며 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에 나오듯이 '문학은 시커멓게 반짝이는,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관과 같'(526쪽) 은 존재이니 말이다.
긴 소설인데, 읽기에 만만치 않다. 다만 중간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읽는 속도가 붙는다. 역시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기에 그것을 찾는다는 느낌으로, 또는 미로 바깥으로 나갈 길이 조금씩 보인다는 기분으로 읽게 되어서 그런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