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을 팝니다 - MBTI의 탄생과 이상한 역사
메르베 엠레 지음, 이주만 옮김 / 비잉(Being)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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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MBTI


익숙한 언어다. 자신을 소개할 때 이 검사 결과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0000라고, 네 알파벳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그러면 상대방도 '아, 그러시군요. 저는 0000이에요.'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통하는 이유가 네 개 중에 몇 개가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또는 맞지 않는 이유가 네 개 중에 몇 개가 맞지 않아서라고,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저렇게 행동한 이유가 이런 성격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학교에서는 이 검사를 통해 학급을 나누어야 한다는 말도 한다. 적절한 검사를 통해 비슷한 성향의 학생들로 학급을 구성하면 학급 운영이 수월해질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그런데 교육은 바로 다양성 아닌가?


교육을 받는 이유는 비슷한 것 속에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름 속에서 함께 어울리는 법을 찾기 위해서 아닌가. 그러면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검사를 통해서 16가지 성격 유형을 비슷하게 섞어 놓은 학급을 만들면 되지 않겠냐고...


이런 주장이 가능하려면 MBTI가 객관적이고 신뢰성이 있는 검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과학적으로 입증이 된 검사라는 확인을 하지 않으면, 이것을 통해 무엇을 하는 것은 믿음의 차원이지 과학의 차원은 아니다.


그렇다면 MBTI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재미로 MBTI 검사를 하고 진지함에 빠지지 않고 재미 삼아 MBTI 성격 유형을 이야기 할 수는 있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MBTI 검사를 활용하려면 MBTI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혼란만 초래할 뿐이다. 


이때 혼란은 MBTI로 모든 것을 수렴하는 것을 뜻한다. 바꾸려는 노력도 없이 '내 성격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라고 하거나, 린 상극인 성격 유형이니 맞지 않는 게 당연해, 거리를 두자.'고 하는 태도들, 이것은 혼란이다.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검증된 방법을 공적인 영역에 도입해야 한다. 그러니 교육의 현장에 MBTI를 도입하는 것은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이 책을 읽으면 MBTI는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방법이라고 하니까.


또한 상업적으로 너무 남용이 되고 있고, 검사 결과가 수시로 바뀌기도 한다고 하니,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몰라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이 MBTI의 역사에 대해서 추적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사실 MBTI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MBTI에 관한 언급을 너무 많이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재미로 하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입시에, 취업에, 그리고 자신의 진로에 MBTI를 적용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고, 또 그것을 굳게 신뢰하는 사람도 많다고 하니, MBTI의 역사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MBTI.  영어가 아니라 우리말로 적어보면 마이어스-브릭스 성격 유형 탐구 정도가 될 것이다. 여기서 마이어스와 브릭스는 사람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모녀지간이란다.


캐서린 브릭스와 이사벨 마이어스가 평생에 걸쳐서 연구하고 만들어낸 성격 검사. 그들은 사람들이 행복을 목적으로 이런 성격 유형 검사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엄마인 캐서린 브릭스의 B가 앞에 오지 않은 이유가 재미 있는데... BM이라고 하면 배변(bowl movement로 책에 인쇄돼 있는데, 아마도 bowel movement의 오타일 것이다)을 연상시키기 쉬워서 딸의 이니셜인 M을 앞에 놓았다고 한다.(359쪽) 


자기에 맞지 않는 일을 하면서 고통받지 않도록,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과 만나 힘들어 하지 않도록, 또한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도구로 MBTI를 만들었다고.


의도가 얼마나 좋은가? 사람들이 자괴감에 빠지지 않도록 더 많은 고통에 내몰리지 않도록,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성격 유형 검사. 이것이 긍정적인 작용을 한 경우가 많음은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렇다.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도구가 있다면 사람들은 마냥 부정의 늪에서 헤매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이 왜 그런지 설명할 도구가 있으니까. 그것을 합리화해 줄 성격 검사지가 있으니까. '나는 0000라서 그래'라고 하면 되니까.


이러한 긍정적인 면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에만 치우치면 그 속에서 자신을 잃게 된다. 자신의 다양함을 단순함으로 축소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인데... 캐서린과 이사벨의 의도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많은 과학기술이 그러하듯이 의도를 배반하는 경우도 많으니...


하지만 이 검사 유형을 만들기 위해 모녀가 한 노력은 인정해야 한다. 그 과정에 대해서 저자도 인정하고 있다. 그들의 선한 의도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고. 돈을 목적으로 만든 사람들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이것에 전적으로 매몰되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이 MBTI 검사는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니까. 


다만, 자신을 긍정하고 더 나은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초석으로 삼을 수는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MBTI가 만들어진 과정을 쓴 이 책을 읽으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데... 저자 역시 이렇게 MBTI의 긍정적인 면을 이야기하고 있다.


'MBTI는 응시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을 비정상이라 생각하고 부끄러워하던 이들이 그 마음을 떨쳐 버리고 자기 자신을 구원할 기회를 얻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유사점들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차이점들은 격려할 수 있게 해주었다.' (403쪽)


이것이면 된다. 자신을 좀더 나은 쪽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디딤돌로 MBTI를 이용하는 것. MBTI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상대를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MBTI가 탄생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흥미롭게 풀어간 책이다. MBTI를 마냥 비판하지 않고, 긍정과 부정 사이의 균형을 잘 잡고 있다. MBTI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그 역사를 알려주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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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읽었던 전래 동화 중 하나. 토끼의 재판.


  나그네가 호랑이를 구해줬는데, 호랑이가 잡아먹으려 하자 다른 존재들에게 판결을 부탁한다는... 그러나 인간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던 존재들은 호랑이가 나그네를 잡아먹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때 토끼가 내가 상황을 잘 모르니 처음 상황을 보여달라고 하고, 그 상황에서 나그네에게 갈 길을 가라고 했다는...


  현명한 판결. 이러한 판결하면 솔로몬이 생각나고, 또 중국의 포청천도 생각이 나는데...


  이들의 판결이 가진 공통점은 무엇일까? 강자라고 해서 잘못을 덮어주지 않는다는, 정의를 세운다는 점. 남들이 수긍할 수밖에 없는 판결이라는 점. 


그런데, 이런 판결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나? 편견이 없어야 한다. 권력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또한 옳고 그름을 판단할 눈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약자의 처지를 살필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현재보다도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전향적인 판결. 이는 글자에 매인 판결이 아니다. 법전을 아무리 읽어도 법전에 나와 있는 문구대로 세상은 돌아가지 않는다. 사람도 그런 글자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글자에 나와 있지 않은 것들, 그것을 읽을 수 있을 때 좋은 판결을 할 수 있다.


시대를 읽고, 사람들 마음을 읽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책만 봐서는 안 된다.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들이 읽을 책은 법전이 아니라 -법전은 이미 읽었을 테고, 그것은 필요조건이 되지만 -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책을 읽어야 한다. 


권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책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책들... 그 사람책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판결이 사람들의 판단, 감정과 시대의 흐름에 어긋날 수도 있다.


제가 알고 있는 법전 속에만 갇혀 있으면... 노력을 하지 않으면... 엘리트들이란 그래서 더욱 힘든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자기가 살아온 환경과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읽어야 하니까. 읽고 그들을 이해하고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맞는 판결을 해야 하니까.


토끼의 판결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신의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그러한 존재를 응징한 것이었다고 본다. 토끼를 잡아먹기도 하는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좋은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니었을 터인데, 그 상황에서는 호랑이가 분명 잘못했기 때문이다. 즉 토끼는 편견에 갇혀 있지 않았다.


자신이 살아온 환경만 보지 않았다. 그런 토끼의 이야기가 계속 되어온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런 상황에 자주 빠지기 때문이다. 호랑이를 구해준 나그네와 같은 상황.


이런 현명한 판결을 하는 존재를 법관이라고 생각했다. 법관은 정말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판결을 통해 한 사람의 운명을, 어떤 때는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니 이들은 정말 신중해야 한다. 권력자들이 아니라 시민들을 살펴야 한다. 시대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맞춰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는 판결을 해야 한다.


시민들의 눈높이에도, 시대의 흐름에도 맞지 않는 판결을 하면서도 자신들이 엘리트라고, 자신들은 오류가 없는 판결을 한다고 자부한다면, 그들이야말로 판결을 할 자격이 없는 존재다. 그런 존재들이 득시글하는 곳은 바로 똥통에 불과하다.


똥통에서 그 냄새에 익숙한, 그래서 다른 좋은 냄새를 오히려 악취라고 여기는 똥파리와 같은 존재들이 된다. 자신들은 그 냄새를 맡지 못할 뿐... 남들은 다 맡고 코를 가리고 있는데...


이동재 시집 [민통선 망둥어 낚시]를 읽다가 몇 구절에서 요즘 판결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특히 '남원에서 역사책을 보다가 현실을 돌아봄'(101쪽)이란 시에서는, 햐, 이런 것들이 엘리트라고, 이런 것들을 관료라고...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는데...


작년 12월 어느 날 국무회의 장면이 겹쳐지기도 한다.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하지도 않고 그냥 몸보신하는 그런 회의. 마찬가지로 힘있는 자리에 있는 자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책임을 모면하려는 노력만 하는...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행동은 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들을 비판하면 '감히~' 하는 듯한 태도. 


이 시를 읽어보면 임진왜란 때 관료들의 모습... 저만 살려고 하는,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는 그런 관료들의 모습이 그때의 관료들과 겹쳐진다. 그러면서 그들을 합리화하려는 듯한 비슷한 족속들... 똥통 속의 그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좀 다른 상황인데, 이 시집에 엘리트라고 하는 교수 사회의 모습을 그린 '똥통에서 보낸 한 철'(105쪽)시가 있다. 어디 이것이 그곳만의 문제이겠는가마는... 지금 이런 똥통이 곳곳에 있으니... 저들만 자기들이 똥통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큰소리치고 있을 뿐.


   똥통에서 보낸 한 철

- 이 시대의 정의로운 한 인물을 기리며


그 동안 똥통에 빠져 있었던 기분이라고 했던가

이태리 유학까지 갔다왔다는 그의 목소리가

명색이 성악이 전공인 그의 목구멍에서

오 년 내내 치밀어 올랐을 욕지기

학교 문닫고 교수직에서 해임된 그가 한 말,

그가 말한 똥통이 비단 광주예술대뿐이겠는가

사방에 냄새나는 입을 쩍쩍 벌리고 있는

저들의 입이 모두 똥통이 아닌가

코 싸쥐고 싶은 똥통 천국,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으으, 너도 구더기

아악, 나도 구더기.


이동재, 민통선 망둥어 낚시. 하늘연못. 1999년. 105쪽.


* 이보령 교수는 광주예술대학 교수협의회 회장이었음.


하여 앞의 시 '남원에서 역사책을 보다가 현실을 돌아봄'에 보면 '이 벼락맞을 놈들 백성들 버리고 저만 살겠다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는구나, 그 놈들 후손들 또 지금도 곳곳에서 뒤꽁무니 길게 빼고 좇빠지게(아마도 좆의 오타이지 않을까 싶다. 좇이 아니라 좆. 참 적절한 비속어 사용이다.) 뛰고 있는 건 아닌지 그들의 수많은 성씨가 지금 네 연구실 앞에 걸려 있는 건 아닌지 족보 좀 뒤져봐라 이 잡것들아, 책 옆에 끼고 사는 것이 정녕 부끄럽지 않은가.' (101-102쪽)라는 표현으로 나오고 있다.


소위 지식인아고 하는 것들이, 사회 엘리트라고 하는 것들이 하는 짓이 없는 사람들 등쳐먹기, 위기에 저만 살려고 도망치기, 다들 살기 힘들 때 재산 축적하기, 권력자에게 잘보이기 등이라면... 정말, 이런 자들을 어떻게 엘리트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동재 시집을 읽으며 작년 겨울과 지금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마음이 겨울로 가고 있다. 찬바람이 쌩쌩 불어온다. 방한복을 입어야 하는데, 누가 따뜻한 모닥불을 지펴줄 것인가. 엘리트들? 아니, 그건 바로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사람책은 엘리트들 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더 잘 읽을 테니.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사람책'을 읽을 줄 알아야 똥통에 빠지지는 않을 텐데... 적어도 자신이 똥통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 텐데...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시. 랭보가 쓴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연상시키는 제목... '똥통에서 보낸 한 철' 


우린 그렇게 다시 똥통에서 한 철을 보내면 안 된다. 정녕 그런 세월을 다시 겪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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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위픽
정보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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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된 대학교 기숙사를 개조해서 만든 이 기계학습센터는 산골짜기 한가운데 있었다. 냉난방 비용 절감을 위해서인지 창문을 거의 판자로 막아놨지만 에어컨 호스가 연결된 곳만 한 뼘 정도 창문 유리가 노출되어 있었다.'(12쪽)


주인공이 살게 된 곳을 묘사한 부분이다. 돈이 없어서 자신의 두뇌를 업로드 하는 조건으로 입주하게 된 곳. 이곳은 '안에 들어가서 복도와 방 구조를 실제로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교도소였다. 감방에는 창문이라도 있으니까 사실 교도소가 여기보다 나은지도 모른다'(14쪽)는 표현으로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서 들어온 곳이다.


자신의 뇌를 업로드하는 조건으로 주거를 해결하고 돈도 어느 정도 받는.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결국 자신을 팔아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이 사는 곳은 폐쇄된 곳이다. 스스로 폐쇄했다고 하기보다는 폐쇄된 공간으로 내몰린 사람들.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좋겠지만, 신영복 선생이 어떤 글에서 한 말처럼 한 여름의 감방 안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 약자들에겐 약자들을 괴롭히는 또 다른 약자가 있다.


강한 자에게는 아무 소리도 못하면서 자기보다 약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는 강하게 구는, 그야말로 강약약강인 존재. 소설에서는 그런 이를 '또라이'라고 하는데, 이런 또라이는 특이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생활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어디에나 통계적으로 열 명 중에 한 명 정도는 또라이가 있는 법이고 주변에 아무도 또라이가 없으면 내가 그 또라이라고 하지 않던가'(17쪽)라는 표현으로, 소설은 또라이를 등장시킨다. 어떤 또라이?


바로 자신도 같은 처지이면서 약자를 더 괴롭히는, 약자를 괴롭히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그런 또라이. 915호 사람이다.


그가 괴롭히는 사람은 이주노동자인 요가 강사다. 자신의 나라에서 엔지니어였다는 요가 강사. 하지만 이 나라에 온 그는 여기저기 돈을 벌기 위해 다니는 사람일 뿐이다. 약자들에게도 무시당하는 그런 사람.


여기에 주인공을 또 만만하게 보는 915호. 그에게는 자신의 먹잇감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또라이 짓을 한다. 하지만 약자가 언제까지 약자일 수는 없는 법.


폐쇄된 공간에서 쫓겨난 915호는 이제 그곳에 있는 약자들에게 군림할 수가 없다. 그는 그런 세계에서도 쫓겨난 사람.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강하게 굴려 했을 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응징. 그는 약자로 전락하고 피해자가 된다.


이렇게 소설은 약자들을 보여준다. 이들은 강자에게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다. 않는다가 아니라 못한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 중에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강하게 나간다. 그렇게 그는 가해자가 된다. 하지만 이 가해는 언제까지 지속될 수 없다. 그 역시 약자니까. 가해와 피해가 뒤집히는 것은 순간.


이런 사회의 모습이 바람직할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사회는 '폐교된 대학교'라는 표현처럼 사회의 구실을 못하는 사회일 뿐이다. 그런 사회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하는 창문이 없다. 그 창문은 아주 조그마해서 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사회의 모습을 정보라는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다. 폐쇄된 사회에서 서로가 서로를 돕는 것이 아니라 남을 누름으로써 자기 존재를 과시하는 사람이 있음을. 그러나 그런 사람은 그 사회에서 오래 존속하지 못함을. 오히려 서로를 도와주는 관계가 오래 감을. 그것이 바람직한 방향임을.


비록 가해에 공모하지만 주인공과 요가 강사의 경우가 그렇다. 이들은 서로를 이해한다. 자신이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정도까지는 최선을 다해주는 요가 강사와 그런 요가 강사에게 고마워하고 그를 존중하는 주인공. 이런 관계들이 지속되어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데...


그런 관계는 조그만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는 것과 같은 관계다. 915호같은 사람과의 관계는 판자로 막아놓은 창문이고.


자 우리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 조그만 창문을 마저 가려야 하는가? 아니면 판자로 막아놓은 창문에서 판자를 떼어내야 하는가? 판자를 떼어내고 더 많은 부분을 봐야 한다.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 사회를, 보여주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지 않는 부분까지 보아야 한다. 그것이 '창문'의 역할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한다. 닫힌 세계를 열린 세계로 여는 것은 결국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915호 같이 더 닫는 그런 존재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그런 소설. 짧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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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 - 현대 일러스트 미술의 선구자 무하의 삶과 예술
장우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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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고 있지 못한 화가. 어디선가 이름은 한번 들어본 것 같은데, 그가 무슨 그림을 그렸지 했는데, 이 책에는 그의 그림이 많이 실려 있다.


화려한 그림들... 장식미술가로 알려져 있다고 하던데, 당시에 광고 그림을 그렸던 화가. 아니 광고 그림만을 그렸던 화가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광고 그림으로 알린 화가라고 해야겠다.


그가 말년에는 슬라브 민족주의 그림을 그렸고, 또한 단지 광고만이 아니라 연극 무대의 배경이나 특이하게도 보석 디자인까지 했다고 하니...


무엇보다 이 책은 무하의 작품을 많이 실어서 좋다. 그림을 보는 재미가 너무 좋다. 이런 그림들, 어디에서도 호감을 받을 그림들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는 순간 환상의 세계로 들어선 듯한 느낌을 주고 있으니, 그림을 통해서 다른 세계를 만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책에 실린 그림만 봐도 디자인이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눈길을 끈다. 그리고 글자와 그림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이러니 당시에 무하의 그림을 많은 광고주들이 원했겠지. 무하가 너무 많은 작품 활동에 시달렸다고 하니...


그럼에도 무하는 정말 성실한 작가였다고 한다. 자신이 부족한 점을 그 성실성으로 메울 수 있었던... 처음으로 프레스코화를 의뢰받았을 때도 처음부터 공부를 다시 해서 좋은 작품을 남겼다고 하고, 조각을 할 때도 또 유화를 그릴 때도 그의 성실성으로 인정받는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를 장식미술가로만 취급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쩌면 앞서 활동한 앤디 워홀이라고 해야 하나? 예술가들 중에 예술가들을 구분하는 사람들이 있다. 순수예술과 상업예술로 크게 나누고, 상업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도 있었고...


예술을 그렇게 나눌 수가 있나? 하긴 문학에서도 장르문학이라고 해서 수준이 떨어지는 문학으로 취급한 적도 있었으니... 과거의 일이다. 지금은 그러한 구분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예술은 예술일 뿐이니... 길거리 미술, 길거리 음악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무하의 그림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있는 그림이 아니라 우리 생활에 밀착해 있는 그림이다. 그래서 더 친숙하고 반감이 가지 않는지도 모른다. 처음 보아도 와, 멋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


그러한 무하의 생애와 그림을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참 많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는 책.


그의 초기 작품 한 편을 여기 소개한다. '지스몽다'라는 작품이다. 1895년 작품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풍의 그림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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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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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라고 하면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남에게 읽히려고 쓴 글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말을 담은 글. 그것이 일기다. 그러므로 일기는 솔직하다. 자신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드러냄. 드러냄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된다.


자기 성찰의 도구가 일기라면, 왜 다른 사람의 일기를 읽을까? 다른 사람의 내밀한 마음이 담긴 글을 통해 어떤 위로를 느끼려고 하는 걸까?


나같은 경우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통해 내 생각을 비춰보기도 한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의 일기는 더더욱. 그래서 이 책에 실린 세월호에 관한 글을 읽을 때는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아픈데도 읽을 수밖에 없다. 세월호는 여전히, 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진행 중이니까. 아직도 그와 비슷한 일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니까. 그래서 작가가 이런 문장을 들고 갔다는 내용의 글을 읽을 때 먹먹하기도 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109쪽)


이것은 특정한 누구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이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런 일들 속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


누군가의 고통으로 내 행복을 만들 수는 없다는, 그런 사회는 되지 않아야 하고, 물신, 돈에 사람을 종속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여기서 생각의 힘, 아니 생각을 해야 한다는 당위를 발견한다.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행동한다면,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 그것조차도 생각하지 못하고 행동하면 그것이 쉽게, 너무도 쉽게 '혐오'와 연결이 된다는 것.


사건, 사고, 혐오.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이런 사회에서 과연 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너무도 쉽게 다른 존재들을 비난하지 않았던가 하는 반성. '일기'에 이런 문장이 있다. 


'조금만 경계심이 풀려도 누군가를 즉시 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다'(141쪽)


경계심이 풀린다는 말,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각적으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 그런 존재들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과연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문장은 지금도 유효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없음을 게으름이라고 한다면, '혐오라는 태도를 선택한 온갖 형태의 게으름을'(72쪽)이라는 문장을 곱씹어야 한다.


더 살펴보고 더 고민해보고, 더 들어보고 해야 하는데, 그것을 생략하는 게으름, 그냥 자신이 살아온 관성대로 행동하는 게으름. 그것은 나만을 고수하는 게으름이다. 오로지 나만이 있을 뿐. 하지만 나는 남이 있어야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일기'를 읽으면 그런 게으름에서 조금은, 아주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 적어도 읽는다는 일이 게으름에서 벗어났다는 말이 되니까. 그렇게 황정은의 '일기'를 읽으며 작가도 나도 건너왔던 시대를 다시 생각한다. 


그런 사회에서 어떻게 지내왔는지도 생각하면서... 무엇보다도 고정관념이라는, 편견이라는 게으름에 빠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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