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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숙녀들의 사회 - 유럽에서 만난 예술가들
제사 크리스핀 지음, 박다솜 옮김 / 창비 / 2018년 1월
평점 :
서점에 가서 책을 뒤적이면서 골랐을 때와 인터넷으로 보고 골랐을 때, 즉 오프라인 구입과 온라인 구입은 차이가 있다.
차례를 볼 수 있더라도 큰차이가 있다. 내겐 이 책이 그런 경우다. 처음에 제목을 보고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남성성이 우세한 사회에서 소외되고 잊혀진 여성들을 이야기하는 줄 알았다.
'죽은 숙녀들의 사회'라는 제목을 붙였으니, 분명 지금은 살아있지 않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일테고 - 이런 짐작은 맞았다. 죽은 사람들 이야기니. 하지만 남성들도 나온다. 처음에 등장하는 실용주의 학자 윌리엄 제임스와 음악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소설가 서머싯 몸도 주요한 인물로 나오니 - 또 우리가 잘 모르는 여성들 이야기겠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짐작은 반만 맞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공통적인 모습이 있다. 이들은 제자리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 있던 사람들이다.
뿌리뽑힌 사람들, 디아스포라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 함께 살되 자신만의 삶을 사는 사람들. 어쩌면 정착하지 못했음에도 - 이것을 공간에만 국한시키면 안 된다. 이때 정착했다는 말은 삶에 정착했다는, 다른 사람과 비슷하게 살아갔다는 의미다 - 그래서 작가의 삶에 남게 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어렸을 적 어딘가에 깊이 뿌리내리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자기에게 맞는 장소를 영영 찾을 수 있긴 한 걸까? 태생부터 뿌리 뽑히고 흔들린 사람은 끝끝내 강한 소속감을 느낄 수 없을지 모른다. 책에는 종종 도시로 도망쳐서 자신의 '동족'을, 영혼의 고향을 찾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나는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어느 도시에서도 그런 순간을 맞지 못했다. 한곳에 한 달 이상 머물러야 하는 모양이다.' (353쪽)
자살충동을 일으키는 삶에서 삶을 살기 위해 작가는 여행을 떠난다. 다른 사람이 살았던 공간으로의 여행. 그곳을 단순한 공간이 아닌 장소가 되게 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을 만난다
그들과 만나는 삶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일종의 동종요법이라고나 할까. 계속해서 이곳 저곳으로 여행을 하지만, 여행을 하는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자신이 살아갈 이유를 찾고자 한다. 결국 찾았는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작가는 여행을 하게 되리라.
그에게 정착은 너무도 힘든 일일테니. 그것이 어린 시절 뿌리내리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일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자꾸만 밀어내는지도 모른다.
뒷부분에 나오는 카엉의 이야기에서 섬에서 둘이 고립되어 살아가는 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남에게서 차단된 삶이라고 생각한 것이 어쩌면 자신이 남을 차단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결국 여행은 자신의 벽을 허무는 일이 되어야 하는데, 작가가 가는 곳마다 자신만의 벽을 만든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죽은 숙녀들, 성별이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모두 방외인이다. 안이 아니라 바깥에 있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에서 안을 생각해야 한다. 자꾸만 밖으로 도는 이유는 자신이 안에서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허무에 빠진 사람, 절망에 빠진 사람,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사람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게, 읽으며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안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만나면서 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그게 이 책의 매력이다. 분명 제목에서는 배신을 당했지만, 삶에 대한 생각에서는 배신을 당하지 않는다.
이 책에 나오는 윌리엄 제임스, 노라 바너클, 리베카 웨스트, 마거릿 앤더슨, 모드 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서머싯 몸, 진 리스, 클로드 카엉을 작가인 제사 크리스핀을 따라 만나보자. 그리고 이들의 삶에서 내 삶을 바라보자.
그러면 된다. 이 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