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시다."
이렇게 주장하고 싶다. "이것은 절대로 현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싶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제목을 붙이면, 당연하지 그건 그림이지 무슨 파이프야 하고 대답을 할 수 있는데...
이 시를 보면 '이건 시야, 현실이 아니야!'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시 속의 표현이 너무도 현실이다.
얼마 전 영화 "1987"이나, "남영동 1985"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들 역시 영화일 뿐이라고 하면 되겠지만, 아니다. 영화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사실로 밝혀지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것은 시다. 현실이 아니다. 왜냐, 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이런 고문만 고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갑자기 '일기장 악몽'이 아니라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의 악몽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기장 악몽
또 잡아갈라 또 탈탈 털어가서는
시월 이십구일 다섯시부터 일곱시 사이에 뭘 했는지
시월 한달 뭘 했는지 하나도 빼지 말고 전부 쓰라고
언제 어디서 누구하고 무엇을 육하원칙대로 쓰라고
속을 들여다보는 눈빛을 하고 다 안다는 눈빛을 하고
때가 되면 육개장을 된장국을 먹여가며 을러가며
다시 쓰라고
또 다시 쓰라고
콧속으로 물이 입으로도, 비명을, 숨이 ……비명을, ……컥!
칠성판에 묶여 개구리처럼 빠둥거리다
넙치처럼 도다리처럼
오줌을 싸며 기절하는 거 아닐까
모를 리 없다고 모를 리가 없다고
잘 생각해보라고
친구 꾐에 빠졌을 뿐
너는 억울한 줄 우리가 잘 안다고
그러니 솔직히 그놈이 뭐라고 했는지
그놈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말해보라고
식은땀 흘리며 벌떡 깨네 벌써 삼십년
말발타 살발타!
김사인,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 2016년 초판 7쇄. 106-107쪽.
이제는 이런 고문은 사라졌다. 이건 시에 불과하다. 이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직접 육체에 고통을 가하는 고문은 적어도 우리나라 경찰, 검찰에서는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더욱 교묘한 고문이 남아 있다. 그것은 법의 이름으로 없는 사람을 고문한다. 시위했다는 이유로,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날아드는 고문. 이 고문은 법의 이름을 하고 있고, 법의 이름으로 집행이 된다.
그리고 법망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일반 서민들은, 힘없는 민중들은 법망에 갇혀 꼼짝없이 고통을 당한다.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까지도, 주변 사람들까지도.
합법적으로 이루어지는 고문, 그것은 바로 소송이다. 손해배상 청구다.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법을 이용하게 만드는 교묘한 고문.
그리하여 손해배상 청구라는 고문은 민중을 여전히 공포 속으로, 절망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자신의 몸에 가해지던 고문은 홀로 감내하고 어떻게든 버텨내려 하기도 했지만, 이건 법의 이름으로 가족의 파탄을 이끌어내니 견딜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가 아니다. 우리 현실이다. 다른 쪽으로 본다면 삼십년 전에 신체에 가해지는 고문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법의 이름으로 생활에, 생존에 가해지는 고문은 여전히 살아 있다.
불행하게도. 이 시를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며, 마치 군대에 갔다 온 사람이 다시는 군대에 갈 일이 없지만 꿈에서 군대에 다시 가는 꿈을 꾼 것처럼 그냥 웃으며 지나갈 수가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다른 고문도 없어져야 한다. 약자들에게 가해지는 생존, 생활 고문. 그것은 법의 얼굴을 하고 있으므로 더 무섭다.
거기까지 나아가야 한다. '고문'에 대해 생각할 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