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 시들이.

 

  시집에 실려 있는 시들 중에서 짧은 시를 고르기가 힘들다. 어떤 시는 서너 쪽을 훌쩍 넘기기도 한다.

 

  짧음의 미학. 그것이 시의 미학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길다. 길어서 마음 속에 담아놓기가 힘들다.

 

  일제시대 단편서사시라는 시의 종류를 개척했던 임화의 시에서는 어떤 사건이나 줄거리를 발견할 수 있는데, 요즘 시인들의 시에서는 길어도 사건이나 줄거리를 발견하기 힘들다.

 

  여러 생각들이 중첩되어 있다는 느낌. 그것들을 다시 이성의 힘으로 해체해서 연결해야만 이해가 된다.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읽는 시. 그런 시들이 많다. 이근화의 이 시집에 실린 시들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머리가 먼저 고된 노동을 해야 한다. 머리 속에서 무언가가 반짝 켜지고 빛을 밝혀야만, 그 빛이, 온기가 마음으로 간다.

 

그래서 어렵다. 머리가 먼저 작동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시를 읽는데 온 신경을 집중해도 무슨 내용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를 비평가들은 긴장이라고 하는데... 그 긴장을 함께 즐기는 독자를 마련한 시인은 행복한 시인이겠지만...

 

나와 같은 평범한 독자들은 시에 나타나는 그런 긴장을 즐기지 못한다. 시의 표면에 나타나 있는 표현과 표현 속에 숨어 있는 의미들이 지닌 긴장.. 이 긴장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머리가 혹사당해야 한다.

 

그런 혹사를 기꺼이 감내할 마음이 내게는 없다. 그런 혹사가 즐거움이 되는 사람들, 현대시를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리라.

 

이근화의 이번 시집에서 이 시를 골랐다.

 

  당신의 발걸음

 

나폴레옹은 왜 과자점의 이름으로 남았을까

그가 흘린 피의 대가

그가 남긴 고독의 흔적

새벽에 빵을 문 채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의 키 작은 괴로움이 밀려온다

나는 새벽에 넘어야 할 산이 있다

새벽 쌀의 뿌연 물이

한번은 개수구로

또 한번은 냄비에 담겨

새벽의 허기를 달랜다

현관문을 나선 발걸음이 추위에 어떻게 맞설지

투 스텝 쓰리 스텝

새벽의 빈 골목에서 춤을 춘다면

고요히 피어오른 밥냄새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출발하지 못했다

숟가락을 물고 있다

꿈 바깥으로 넘어오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너무하다

나폴레옹이 되어가는지

나이팅게일이 되어가는지

에디슨이 되어가는지

인형의 다리를 꼭 쥐고

흥건한 침이 밥물처럼 고소하게 흘러넘친다

새벽 이웃의 허기를 자극할 밥냄새를 피운다

이웃의 꿈도 투 스텝 쓰리 스텝을 밟을까

발바닥이 시리다

나폴레옹의 작은 발이 그가 밟은 핏자국이

여기까지 스멀스멀 건너온다

 

이근화, 차가운 잠, 문학과지성사, 2012년. 초판 2쇄. 140-141쪽.

 

나폴레옹.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사람. 그러나 그 전에 그는 혁명정신을 유럽에 전파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나폴레옹은 어떤 작용을 할까? 그가 내딛는 발걸음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세상이 좀더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이 되었을까.

 

루쉰의 '나폴레옹과 제너'라는 글이 생각이 나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나섰던 사람들이 생각나고.

 

그렇다면 나폴레옹은 전쟁을 통해 사람들의 피를 밟고 전진했다면 이제 이름으로 등장한 제과점에서 만든 빵은 사람들을 살게 하기 위해 존재해야만 한다.

 

하지만 마지막 구절 '나폴레옹의 작은 발이 그가 밟은 핏자국이 / 여기까지 스멀스멀 건너온다'는 표현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나아가야 하는 그런 길... 피가 터지도록 힘든 길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이고, 역시 삶은 투쟁이다. 힘들다. 그럼에도 삶은 희망이다. 밥, 빵을 통해 우리는 그래도 살아가기 때문이다.

 

'투 스텝 쓰리 스텝 / 새벽의 빈 골목에서 춤을 춘다면 / 고요히 피어오른 밥냄새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의미가 있게...

 

이때 당신은 나폴레옹이 아니다.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이다. 우리 이웃들의 발걸음은 나폴레옹의 발걸음과 달라야 한다.

 

나폴레옹과 제과점, 그리고 이를 통한 우리 삶의 고달픔, 이를 시로 표현하기 위해 일어나는 긴장, 그 긴장 속에서 다시 발견하는 삶...  오독이다. 오독이어도 어쩔 수 없다.

 

나폴레옹이 알프스 산맥을 넘었듯이 우리 역시 우리의 산을 넘어야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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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5 17: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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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5 17: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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