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승강기의 소리와 귀뚜라미 소리. 인공기계가 내는 소리와 자연의 내는 소리.

 

높은 곳을 오르내리는 소리와 낮은 곳에 납작 엎드려 내는 소리.

 

인공이 점점 높아질수록 자연은 점점 낮아지게 되는데, 그렇다고 우리는 자연에서 떠날 수는 없다.

 

자연과 하나가 되던 시절은 이제 사라지고 없는데, 그것은 우리의 기억을 저장하는 장소인 해마에 아직은 남아 잊지만,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해마에 기억의 흔적은 물방울 먼지처럼 남는다'고 자연은 이렇게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자연의 소리를 인공의 장소에서 들어도 우리가 사는 곳은 인공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잡을 수 없는 것,

 

'수염귀뚜라미 하나 내 허파꽈리에 초기 암처럼 / 마지막 광선 속에 울기 시작했다. / 나는 너의 이름을 보고 싶어 만지고 싶어'라고 외쳐도, 만질 수 없다.

 

사실, 옥수수수염귀뚜라미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냥 아련한 자연의 이름이라는 생각, 우리가 멀어져 온 자연.

 

인공과 자연의 병치 속에서 지금 우리가 어떤 자리에 처해 있는지 고형렬의 이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느낄 수 있다.

 

헌책방에서 구한 이 시집, 현대문학상을 받은 시... 자연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우리 시대, 우리의 모습. 그것을 느끼게 하는 시.

 

옥수수수염귀뚜라미의 기억

 

옥수수수염귀뚜라미

80층 승강기 아래로 내려갈 땐 잠잠하다

울음을 뚝 멈추고 승강기가 기계음을 듣는다

첨단이 아닌 이런 것들이 기척할 때가 있다

수염귀뚜라미는 철봉대 근처에 있다

기계음은 그의 풀잎 가슴속으로 들어가

해마에서처럼 사라진다

해마에 기억의 흔적은 물방울 먼지처럼 남는다

소리는 사라지고 벌써 있지 않다

80층 체인이 출렁이는 소리가 벽 속에서 들린다

기술은 그 소리를 감추려고 혼신을 바친다

내 신문 같은 얼굴이 센서에 비치면

문은 비서처럼 얼른 옆으로 열린다 그리고

곁에 서서 내가 나가기를 기다린다

나가지 않으면 문은 계속 심리처럼 서 있는다

그때 햇빛이 내 파란 핏줄 손등에 닿는다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한다 늦여름 매미처럼

나는 갑자기 미열의 아득함으로

손바닥으로 유리창을 잡는다 가을 구름 하나

아파트 뒷산 위에 떠서 불타고 있다

마지막 불 칸나가 화려하게 단장했어라,

수염귀뚜라미 하나 내 허파꽈리에 초기 암처럼

마지막 광선 속에 울기 시작했다.

나는 너의 이름을 보고 싶어 만지고 싶어

옥수수수염귀뚜라미

 

2010 현대문학상수상시집, 현대문학, 2009년. 1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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