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탁번의 시에서는 생활을 볼 수 있어서 좋다. 그는 '시를 시답게 쓸 것 없다'고 하면서 '시는 시답지 않게 써야 한다'('우리 시대의 시창작론' 110-111쪽)고 한다.
이 말은 '시'는 생활과 떨어져 따로 존재할 수 없고, 바로 생활이 시가 되어야 한다는 말로 읽힌다.
시가 생활과 동떨어질 때 그것은 자신들의 자위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시는 바로 우리 생활에서 나와야 하고, 생활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것이 오탁번이 말하는 '시답지 않게' 쓰는 시일 것이다.
그래야 이 시답지 않은 시들이 바로 시가 된다. 우리들의 생활이 시가 되어야 한다. 그는 이 시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걸레도 양잿물에 된통 빨아서 / 풀먹여 다림질하면 깃발이 된다 /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된다'('우리 시대의 시창작론' 110-111쪽)고.
이것이 바로 시가 생활이 되고, 생활이 시가 되는 모습이다. 결코 시는 생활과 떨어져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지 않다. 이것이 바로 오탁번의 시세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생활만 이야기하면 안 된다. 생활을 이야기하되,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걸레가 깃발'이 된다.
왼쪽 깜박이
눈을 깜박이는 일이
가장 쉬운 일인 줄 알았을 때가
행복했다는 것을
나는 정말 몰랐다
오늘 아침 면도하고 거울 앞에 서서
스킨로션 바르다가
왼쪽 눈을 깜박일 수 없게 된 것을
처음 알았을 때
風毒(풍독)? 痲痺(마비)?
이 불길한 예감 앞에서
나는 너무나 무력하다
오른쪽 눈은 깜박이며
우익의 시야를 가늠하는데
왼쪽 깜박이가 고장이 나서
영영 좌회전을 못하게 되면
좌익의 이념을 어떻게 이해하지?
직진만 하고 우회전만 하면
저돌적인 극우파가 되는 것 아닐까?
겨울산 그림자는 다가와서
내 집 앞 뜰을 지우고
왼쪽 깜박이가 점등하지 않는
무력한 겨울 아침
사랑하는 너에게로 가는 길도
자꾸 멀어져만 가고
내 삶의 평화는
간단하게 부결된다
오탁번, 1미터의 사랑, 시와시학사, 2001년 1판 4쇄. 114-115쪽
자신의 신체에서 좌우익을 바라본다. 아무 생각없이 좌우를 아우르던 몸이, 어느 날 갑자기 왼쪽 눈을 깜박일 수 없게 된다. 이게 뭔 변고? 정말 변고다. 이렇게 되면 큰일이다. 한 방향을 잃은 것이다.
그것은 크다. 얼마나 크냐면 '저돌적인 극우파'가 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너에게로 가는 길도 / 자꾸 멀어져만 가고 / 내 삶의 평화는 / 간단하게 부결된다'고 한다.
한쪽이 기능을 상실하면 균형이 무너진다. 대칭으로 존재하고 있던 몸이 무너지면 정신도 무너진다. 누구와 함께 하기도 힘들다. 자신의 평화도 깨진다.
그런데도 기를 쓰고 한 쪽을 없애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한쪽이 무너지면 자신들도 무너진다는 사실을 모른다. 마치 예전에 읽었던 책 제목인 '새들은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하는데, 그 중 왼쪽 날개를 없애버리고도 새보고 날라고 하는 사람들과 같다.
물론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당연하다. 중립은 없다는 말은 한쪽을 없애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상대를 인정해야 한다는 얘기다. 당당하게 자신의 위치를 이야기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온전한 신체, 온전한 정신, 온전한 사회가 된다. 자신의 몸에서 사회의 갈등까지 나아간다. 생활에서 결코 멀어지지 않지만 한쪽을 없애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시답지 않은 시'다.
이제 새로운 정권이 출범했다. 한쪽을 없애려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다른 한쪽도 꼭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을 하는 정권이었으면 한다. 그렇다고 꼭 산술적으로 균형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몸은 좌우대칭이긴 하지만 꼭 똑같지는 않다. 상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기를 쓰고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