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모든 기록 - 고문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위험을 무릅쓴 기적의 6주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간디서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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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9월 11일, 아픈 역사가 시작되었다. 결코 2001년 9월 11일이 아니다. 앞의 것은 미국을 등에 엎은 군부들이 일으킨 칠레에서 일어난 쿠테타이고, 뒤의 것은 바로 미국에서 일어난 테러이다.

 

날짜는 같지만, 우리는 뒤의 날짜를 기억한다. 역사적 사건으로서. 이슬람을 테러와 동일시하게 된 사건으로서. 최근의 사건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앞의 9.11은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앞의 9.11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고 날짜이다. 남아메리카에 있는 '칠레'라는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 날짜는 몰라도 그 나라 사람, 한 명은 우리가 잘 기억한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바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시인 파블로 네루다.

 

시인으로서 알려져 있지만 이 네루다가 정치인이기도 했다는 사실, 그가 대통령 후보로 나오려 했으나 자신보다 더 당선 가능성이 높은 아옌데를 지지하면서 후보 사퇴를 했다는 사실, 아옌데 정권에서 대사로 근무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인 네루다보다는 시인 네루다를 더 기억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칠레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네루다는 정치인보다는 시인으로 더 추앙받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그럼에도 네루다가 칠레에서 시인으로서 추앙을 받게 된 이유는 그의 정치적 입장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사랑'을 노래한 시인이 아니라 그 '사랑'이 민중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사람들이 알기 때문이라는 생각.

 

이런 네루다가 양보한 '아옌데'는 누구인가. 그는 결국 쿠테타로 죽음에 이르렀지만 살아서 대통령 궁을 나오지 않고 죽어서야 비로소 대통령 궁에서 나온, 자신의 신념을 죽을 때까지 지켰던 사람이다.

 

그의 죽음 이후 칠레에서는 피노체트의 기나긴 군부독재가 이어지고,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뒤따랐는데... 특히 진보진영 쪽에 섰던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탄압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지금 문화예술계에 블랙리스트가 존재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지만, 이 당시 칠레에서 블랙리스트는 '살생부'라 할 만했다. 거기에 이름이 올라간다는 것은 죽음이거나 또는 추방이었으니.

 

그런 상황에서 아옌데 선거운동을 하고, 또 '칠레극장' 감독으로 일하던 미겔 리틴도 해외로 망명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가 어떻게 죽음의 상황에서 벗어났는지는 합리적인 이유로 설명이 안 되는 극적인 부분이 있다. 그 장면도 이 책에 나와 있으니... 반면 칠레의 음악가였던 '빅토르 하라'는 살해당하고 말았으니, 그가 살아난 것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외국에 살게 되고, 귀국이 영구적으로 금지되었던 그가 칠레에 몰래 잠입해 촬영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 책이다.

 

망명자의 신분으로 칠레에 다시 들어가 그 당시 상황을 촬영해 영화로 만들어내는 일, 그것은 목숨을 건 일이었을테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팀을 꾸려 각자 그러나 같이 촬영하게 하고, 현지에서 칠레 촬영 팀까지 조직했으니.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조국을 잊지 못했고, 독재로 점철되는 피노체트 정권에 분노했으며, 이런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보고 있었다.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면 어떡하겠는가 하는 것이 감독인 그의 생각이었고 열정이었다.

 

여러 차례 위기 상황도 겪지만 자신이 계획했던 것들을 필름에 담아 무사히 반출한 다음에 영화로 만들어냈던 감독 미겔 리틴...

 

그의 경험을 책으로 만들어낸 마르케스... 이 책의 화자는 나로 - 바로 감독인 미겔 리틴으로- 나오지만 글은 바로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쓴 마르케스가 쓴 것임을 밝히고 있다.

 

마르케스가 여러 차례의 면담을 거쳐 그의 목소리를 글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누가 썼느냐보다는 당시 엄혹했던 칠레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항거하는 사람들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부러운 점... 칠레 사람들은 공과를 떠나서 정치인 아옌데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를 대통령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 그것은 그가 죽어서도 그의 신념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 신념이 젊은이들을 통하여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적인 면에서는 네루다라는 산이 있어서 그들이 기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이 책에서도 계속 나오고 있다. 즉,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마음 속에 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칠레를 군부독재의 어둠에서 벗어나게 하는 힘이 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마칠레가 군부독재에 신음하고 있던 당시, 우리나라 역시 군부독재에 신음하고 있었으니, 칠레의 이야기가 꼭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칠레의 9.11을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겠고. 후일담 비슷하게 글이 쓰였기에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오는 장면들이 꽤 있고, 목숨을 건 활동을 하면서도 이렇게 허술하게 할 수도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장면도 있다.

 

그만큼 감독인 미겔 리틴에게는 칠레는 자신의 조국이기도 하고, 고향이기도 하고 삶이기도 했으리라. 감정이 이성을 앞설 때가 바로 그런 때 아닌가 싶은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이제는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그런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억을 해야 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는 기록을 해야 한다. 그 기록, 바로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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