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 실린 시들이 밝지 않다. 어둡다. 낮다. 축축한 느낌을 준다. 무언가 손에 잡히지는 않으나 이상하게도 손에 닿은 듯한 느낌.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과 함께 하지 못하는 상태, 시의 해설에서는 이를 파도에 비교했는데, 밀고 당기고 결국은 밀려나거나 함께 가거나 해야 하지만, 여기에 남겨져 있는 상황에 대한 시들이 더 많다.

 

  사랑을 하기에도 힘든 세상이 되었나 보다. 사랑이 개인의 의지도 작용하지만 사회 상황도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꼭 개인의 일로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 시집에 나온 시들 중에서 사랑, 만남을 이야기하는 시들도 이렇게 온전히 함께 갈 수 없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시집의 분위기는 왠지 낮은 곳에서 어두운 상태로 작고 힘없는 존재들을 노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존재들을 잊지 않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할까. '파도'란 시를 읽을 때는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광장에 모인 인파 속에서 고독을 느끼는, 그래서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밀려나는 힘없는 존재, 실명한 아내와 함께 하는 작고 여린 남자의 이야기 속에서 어떤 슬픔. 기쁨 속에서도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전해주는 존재가 있음을, 그들이 있음에 어쩌면 빛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우리가 사회생활을 할 때 이들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되고, 이들의 존재가 우리가 나아갈 길을 알려준다는 생각을 하게 된 시, '검은 물'

 

검은 물

 

칼갈이 부부가 나타났다

남자가 한번, 여자가 한번 칼 갈라고 외치는 소리는

두어 번쯤 간절히 기다렸던 소리

칼갈이 부부를 불러 애써 갈 일도 없는 칼 하나를 내미는데

사내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이 들어서기엔 좁은 욕실 바닥에 나란히 앉아

칼을 갈다 멈추는 남편 손께로 물을 끼얹어주며

행여 손이라도 다칠세라 시선을 떼지 않는 여인

 

서걱서걱 칼 가는 소리가 커피를 끓인다

칼을 갈고 나오는 부부에게 망설이던 커피를 권하자 아내가 하는 소리

이 사람은 검은 물이라고 안 먹어요

그 소리에 커피를 물리고 꿀물을 내놓으니

이사람 검은 색밖에 몰라 그런다며,

태어나 한번도 다른 색깔을 본 적 없어 지긋지긋해한다며 남편 손에 꿀물을 쥐어준다

한번도 검다고 생각한 적 없는 그것은 검었다

그들이 돌아가고 사내의 어둠이 갈아놓은 칼에 눈을 맞추다가 눈을 베인다

집 안 가득 떠다니는 지옥들마저 베어낼 것만 같다

불을 켜지 않았다

칼갈이 부부가 집에 다녀갔다

 

이병률, 바람의 사생활, 창비. 2012년 초판 13쇄. 100-101쪽.

 

눈이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인하여 다른 세상을 보게 되는 것, 세상을 바라볼 때 강자의 눈이 아니라 가장 약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세상을 살아가도록 한다면, 그렇게 사회를 구성하도록 한다면 그 세상엔 지옥은 없다.

 

눈 먼 사람이 간 칼로 '집 안의 지옥들마저 베어낼 것만 같다'는 말,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가 된다면 지옥은 없다. 그것을 베어내는 것은 높은 곳에 있는 사람, 강한 사람의 관점이 아니다.

 

이 시집에서 내게는 이 시가 가장 따뜻했다. 다른 시들이 이상하게 어긋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 이 시에서는 따스하게 품어주는 모습이 그려졌다고나 할까.

 

엄혹한 시절이다. 세상의 생명들이 인위적으로 죽어나가고 있는 세상,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자리는 높고 강한 자리가 아니라 낮고 약한 자리, 그곳에 서서 가장 작고 약한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들이 웃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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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0 14: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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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0 15: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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