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와 에로스
신철하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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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참... '노자와 에로스'라니. 하긴 이 저자의 이전 책 제목이 '사랑의 파문'이었지. 그것도 역시 노자에 관한 책이었는데.

 

'노자'하면 늙은 사람이 생각난다. 그리고 '에로스'하면 젊은 사람이 생각나고. 세상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과 이제 갓 세상에 진출한 산전수전을 겪어야 하는 존재를 하나로 묶어 놓았다.

 

그렇다면 이 책은 '노자'를 읽는데 '에로스'를 중심으로 읽으라는 말이렷다. '사랑의 파문'에서도 그런 주장을 했는데,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주석을 달았다.

 

'도덕경' 짧막한 글에 얼마나 많은 해석이 달렸는지... 어떤 사람은 노자를 굉장한 보수주의자로, 어떤 사람은 개혁주의자로 볼 정도로 노자 해석에는 상당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는데, 이 책은 다시 노자의 '도덕경'을 에로스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고 '에로스'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도덕경'의 밑바탕이 '에로스'를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이고, 이 책에서 주석을 달고 해설을 할 때 주로 나오는 것은 바로 '정치'다.

 

이 정치를 이야기하는데 '에로스'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 '에로스'라면 이상하게 야한 쪽으로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에로스'를 '사랑'이라고 하자. 그리고 '사랑'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가는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다.

 

'사랑'이 없는 사회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우리가 기계 사회를 두려워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사랑'이 거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만 해도 그 사회에서는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매뉴얼화된 프로그램만 존재할 뿐이다. '사랑'은 원시시대에 존재했던 대상일 뿐이다. 그런 '사랑'이 거세된 사회, 그것을 헉슬리는 '디스토피아'라고 생각했던 것 아닌가.

 

우리가 정치에서 '사랑'을 빠뜨리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란 사람들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데 필요한 어떤 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 맺기에 당연히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왜 '에로스'인가? 흔히 노자하면 무위자연을 주장한 사람이라고 하니, 그의 사랑은 육체적인 관점에서 더 많이 언급되는 '에로스'가 아니라 정신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아가페'가 아니라 '에로스'다. 분명 '노자와 에로스'다. 육체적인 사랑에서 시작을 한다. 아니 육체를 떠난 사랑은 너무도 추상적이다. 그런 사랑에 대해서 일반인들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도덕경'을 일반인들이 잘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노자 역시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사람, 그리고 그 어지러운 세상에서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던 사람. 그 사람이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는데 어려운 말로만 하면 과연 누가 알아들을 수 있었겠는가.

 

이미 한문에서 많이 멀어진 우리에게야 '도덕경'의 말들이 추상적인 말들에 불과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살아있는 말들의 경연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최근 신약성서를 말할 때 예수의 말들은 당시 민중의 말들이었다고, 민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을 했다고, 그래서 성서에 나오는 비유들은 당시 민중들에겐 매우 친숙한 표현들이었을 거라고.

 

이것을 노자에게도 적용시켜 보면 당시 사람들이, - 그래 민중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공부를 좀 한 사람이라고 하자, 당시에는 사람들을 몇 부류로 나누었고, 공부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했을테니 - 알아들을 수 있는,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뼉을 칠 수 있는 표현들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도덕경'에 나오는 사랑이 '아가페'가 아니고 '에로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에게 친숙한 사랑, 무언가 마음에 딱 와닿는 사랑, 그것은 바로 '에로스'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정치나 국가를 설명하는데 사랑하는 두 사람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얼마나 적절한 비유가 되겠는가. 서로 사랑하는 사람, 이 사람들은 상대를 위해 무엇을 할까를 고민한다. 그리고 실행한다. 결코 자랑하지 않고 드러내려 하지 않고.

 

또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여도 바로 내치거나 싸우지 않는다. 무언가 한 번 더 생각하고 돌려서 말하려고 한다. 상대방을 내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함께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내 맘대로만 하지 않고 늘 상대방을 고려하면서 행동하는 것.

 

절대로 티내지 않는것, 생색내지 않는 것. 앞에서보다는 뒤에서 상대를 위해 행하는 것, 상대를 위해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여는 것, 즉 내 맘에 상대를 채우기 위해 비워 놓는 것.

 

그런 사랑으로 예를 들어 정치를, 국가를 이야기한다고 보면, 쉽게 와 닿는다. 정치란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

 

'도덕경'에 여성성이 많이 나오는데, 당연하다. 궁극의 사랑으로 어머니의 사랑만큼 크고 넓고 깊은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낳고 기르고 보호하는 것, 여성성. 그것이 사랑이고, 그런 사랑을 '에로스'라는 실체하는 두 육체간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나라 정치는?

 

천박하다고 '에로스'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슨 고상한 체하면서 '아가페'를 이야기한다. 결코 그 단계에까지 가지 않았으면서. 뒤에서보다는 앞에서 이야기하길 즐긴다. 자신이 행한 것들이 꼭 드러나야 한다.

 

부드러움보다는 강함을 내세워야 한다. 그래야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으니까. 지금 대의민주주의, 즉 선거제도에서는 이래야만 공천을 받고 당선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지금 우리나라 정치판은 '노자와 에로스'와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결국 무위의 정치가 아니라 인위의 정치, 부드러움의 정치가 아니라 강함의 정치, 여성성의 정치가 아니라 남성성의 정치가 판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저자는 다시 노자를 우리에게 불러온다. 그것도 '에로스'라는 말과 함께. '도덕경' 주석이라고 하지만 도덕경의 내용을 한문 원문 그대로 번역을 하지 않았다. 저자가 '도덕경'의 내용을 하나로 꿰고 거기에 맞게 해석을 했다. 그래서 한문 원문을 애써 번역하며 읽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 저자의 해석을 읽으며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단지 노자에게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노자를 현실 정치로 끌어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는 어떤 정치가를 선택해야 하는지, 더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서 읽으면 된다.

 

이것이 이 책을 읽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판과 맞물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너무도 고맙다. 이런 좋은 책을 보내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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