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2일... 수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의 하야를 주장하며 광화문에 모였다. 백만 명이라고도 하고 약 30만 명이라고도 한다. 숫자의 정확성을 따질 필요 없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거리로, 거리로 나왔음에는 틀림없다.

 

무엇이 이들을 다시 거리로 나오게 했는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들이 거리로 나온 이유는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제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주권을 지닌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 주권이 우롱당했기 때문에...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서 나왔음이다. 그렇다면, 주권을 잠시 위임받아 행사하는 대통령은 이런 국민의 뜻에 따라 대하(帶下)에 엎드려 잘못을 빌어야 했다.

 

석고대죄(席藁待罪)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적어도 국민 앞에 나와서 죄송하다고, 이 일에 책임지겠다고는 해야 했다.

 

그런데,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곳 근처까지도 국민들이, 주권자들이 가지 못하게 막았다. 이명박 정권 때 만들어진 차들로 이루어진 산성, 한 때 명박산성이었던 것이 이제는 근혜산성이 되어 국민들의 발걸음을, 국민들의 소리를 막아 버렸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청와대 대변인을 통하여 다음 날 내보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 목소리를 무거운 마음으로 들었으며, 현 상황에 대한 엄중함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대통령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국정을 정상화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국민들이 말이 어떤 말인지 제대로 듣지 않았다는 얘기다. 당신은 대통령으로서 자격이 없으니 그 자리에서 내려와라 라고 하는데, 자신은 대통령으로서 책임을 다한다고 한다. 이거야 원, 금성과 화성만큼이나 떨어져 있는 상황인식이고, 대화라고 할 수 있다... 현실 인식을 못하고 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데...

 

헌법을 뒤적이다가 이게 무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구절이 있었다.

 

헌법 제 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 67조 3항, 대통령후보자가 1인일 때에는 그 득표수가 선거권자 총수의 3분의 1 이상이 아니면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없다.

 

헌법 1조 2항에 의하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국민이 당신에게 더이상의 권력을 주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권력을 이제는 국민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대통령으로서 책임을 다하겠다고 한다. 이거 모순 아닌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헌법에 명시된, 그것도 헌법의 앞부분에 명시된 국민의 권력이 이렇게 무시당해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헌법 67조 3항, 지금까지 단독 후보자가 나온 적이 없어서 유명무실한 조항이긴 하지만, 이것을 대통령의 직무수행과 연계하여 생각하면 국민의 지지율이 형편없는 대통령은 스스로 물러나던지, 아니면 탄핵을 할 수 있는 조항이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대통령 시작도 하기 전에 국민의 3분의 1 이상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아예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데, 대통령이 되기만 하면 5년이라는 임기가 보장되어 지지율이 5%에 머물러도 대통령으로서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한다고 주장할 수 있으니...

 

물론 대통령을 지지율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자릿수 지지율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특정한 정책에 대한 지지율이 아니고 대통령의 직무 수행 전반에 관한 지지율이고 또 장기간 유지되는 지지율이라면 그런 사람을 계속 대통령 자리에 머물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해봐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조심할 부분. 지지율이 자칫하면 인기투표 비슷하게 갈 확률도 있지만, 국민의 의식이 성숙한 나라라면 국익과 개인적 권력욕을 구분할 수 있는 시민들이 최소한 30% 이상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 그것도 정책 하나하나의 지지율이 아니라, 국정 수행 전반에 관한 지지율이라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최소한 1/3 이상은 되어야지... 의원내각제라면 이미 정권이 바뀌었어야 하지 않은가)

 

5% 지지율에 주권자인 국민이 거리로 나와 물러나라고 하는데도, 그 소리들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대통령이라면 "헌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지경.

 

하 답답해, 너무도 오랫동안 읽고 있었던, 헌책방에서 구했던 황동규 전집을 여기저기 뒤적이다가 발견한 시 '비망기'

 

왕들도 이래야 하는데... 하물며 선출된, 임기가 제한된 권력임에랴. 

 

비망기

 

첫째 갈피

 

제왕은 때로 신민의 그늘이다.

경들이 용상에서

대하(臺下)에 엎드린 짐을 일으켜

모란 핀 뒤뜰로 인도할 때

짐은 보지 않으련다

조간도 석간도

천리경도

다만 뜰에 호젓이 핀 꽃 사이를 말없이 거닐 뿐.

 

왕도(王道)는 때로 떠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을.

흉년에 스스로 불태워 죽는

추장 부자(父子)의 없는 외마디처럼

한숨도 병도 초가집도

초가집들이 둘러싼 조그만 낟가리도 없이

떠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을.

 

둘째 갈피는 생략

 

황동규, 황동규 시전집1, 문학과지성사. 1999년 초판 3쇄. 140쪽.

 

매주 주말마다 주권자들의 소리를 들으라고, 보라고 촛불집회를 하겠다고 한다.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는지 국민들은 이미 답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이형기의 '낙화'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 황동규의 시처럼 '떠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바로 주권자에 대한 예의이고, 책임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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