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걸의 시집을 읽다. 역시 헌책방에서 구한 책. 헌책방에 가서 시집을 사는 경우가 서점에서 사는 경우보다 많다. 그만큼 서점에서는 시를 보기 힘든데, 헌책방에 가면 이제는 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시집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황명걸 역시 이름은 많이 들었던 시인. 아마 첫시집 제목이기도 한 '한국의 아이'를 다른 여러 책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리라.
그렇다고 그의 시집을 읽어 본 적은 없으니, 이번 시집이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두 번째 시집 "내 마음의 솔밭"
해설을 한 신경림에 의하면 그는 참 도회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표현이 다를 수 있다고 했는데, 이 시집은 그의 첫시집이 나오고 나서 20년 만에 나온 시집이니, 그의 시적 표현을 뭐라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이십 여년을 통해 겪고 느낀 세월의 변화가 이 시집에 잘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시를 창작된 시대의 역순으로 엮으려고 했다고 하는데...
여러 시들이 있지만, 참, 시라고 하기엔 너무도 직설적인 이 시가 이 시집이 나오고 나서 다시 20년이 흐른 지금에도 이렇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현실이라는데, 마음이 먹먹했다.
그의 첫시집이 나오고 나서 40년이 흐른 시간이다. 두 번째 시집이 나오고 나서 20년이 흐른 시점이다. 그런 시점에, '요지경 난세'를 운운해야 하다니.
시로 우회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해도 지금 현실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언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사회 고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비리를 법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빠져나가기도 하는데, 기껏 법망에 걸려도 없는 사람들이 받는 형벌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형량을 받곤 한다.
여기에 잘못이 드러났어도 전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잡아떼어 버티기만 하면 도와줄 사람이 나타나 무마되기 일쑤니... 이런 세상이 요지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 약점이 드러날 것 같으면 상대방의 약점을 터뜨려, 내 약점을 가리기... 이 시에서 표현한 내용들이 지금도 통용된다는 사실이 답답하다.
시를 보자. 이 시에 나타난 요지경 세상이, 바로 지금 우리 세상이 아닌지.
요지경 난세
우리 장난해요
나는 부정을 저지르고
당신은 책임지지 않고
결국 낙태를 하고
미끈덕미끈덕 땀에 밀리면서
또 살을 비벼도
서로에게 몹쓸 병 주고
병아리 목 비틀기
바위에 박치기하기
그래도 싱숭생숭하고
싱겁고 심심하면
서로 함께 배신을 해요
죽어 지옥에 떨어져도
잽싸게 도망치는 재주
우리 가졌으니까요
황명걸, 내 마음의 솔밭, 창작과비평사, 1996년 초판. 107쪽.
정보화 시대라서 감출 수 있는 정보가 별로 없는 세상에서, 오히려 그 정보를 역이용해 자신의 잘못을 감추는 사람들... 정말 '잽싸게 도망치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고, 잘못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런 세상이 바로 '요지경 난세'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요지경 난세'가 되지 않게 하는 방법은? 별 거 없다. 철저한 시민의식을 지니고 이들을 감시할 것. 이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책임을 지게 할 것. 이들의 잘못을 잊지 말 것.
그래야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잘못을 저지르고도 벗어나는 행태가 반복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요지경 난세'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이젠 이런 시는 과거에 그랬었지 하는 정도로만 남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