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일생을 볼 때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때가 바로 늙었을 때가 아닌가 한다.

 

  늙었을 때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 보면서 살며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잘 산 인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

 

  늙어서도 현실에 아등바등대면서 악다구니를 쓰면서 살면 그것은 제대로 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현실은 늙어서도 현실에 버둥대며 살아가게 하고 있다. 이건 개인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사회의 책임이 더 크다.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여기서는 삶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늙었을 때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조금 진부한 얘기같지만 늙으면 제일선에서 물러나 뒤에서 젊은이들에게 삶의 지혜를 이야기해줘야 한다는 생각.

 

  그래서 물러날 때를 알고 물러나고, 끼어들 때를 알고 끼어드는 농익은 삶의 지혜를 발휘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잘 늙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런 사람들을 사회에서는 원로라고 하고, 그들의 지혜를 기꺼이 빌리려 하는 것, 그들이 비록 노동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함께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 또 그렇게 대우해야 한다는 생각.

 

그렇다면 과연 우리나라에 원로가 있을까? 이상하게 나이 먹어가면서 삶의 지혜까지도 먹어가는 사람이 너무도 많은 현실 아닌가.

 

조금 높은 자리에 있다면, 조금이라도 권력 맛을 보았다면, 돈이 남들보다 우월하게 많다면, 나이들수록 여유로와지고 자기 말을 하기보다는 남의 말을 귀담아 듣기보다는, 더욱 편협해지고 제 말만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그런 늙은이들이 많은 사회, 그것은 고령화 사회니 고령 사회니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이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사회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서정주의 시집을 길가 헌책을 파는 곳에서 발견하고,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래도 사서 보자고 결심하기까지, 그의 시집을 흔쾌히 사지 않았기 때문에 늙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서정주 하면 학창시절에 교과서에서 빠지지 않고 다뤘던 시인 아니던가. 생명파라는 유파에서부터 그의 시들의 변천사까지 참 지긋지긋하게 배웠다.

 

그러다 대학 들어가서 그가 쓴 친일시를 읽고 충격, 충격, 물론 그 당시 시인들 중에 친일시를 쓰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마는, 그래도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시인이 이렇게 과감한 친일시를 쓰다니... 배신감...

 

그가 자신의 친일행위를 통렬하게 반성한 적이 있었던가... 어디서 그랬다고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그는 그 이후 우리나라 시단의 어른으로서 원로로서 존재해 오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잘못은 잘못대로 잘한 것은 잘한 것대로 다시 정리를 했으면 오죽이나 좋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은 시집.

 

제목이 무언가를 기대하게 했다. "늙은 떠돌이의 시" 결국 인간은 지구라는 곳을 떠돌다 떠나가는 존재에 불과할텐데, 이제는 익을대로 익은 시인이 자신의 삶을 시로 나타낸 시집이라는 생각에 기대를 가졌는데...

 

그런데, 시야 뭐, 서정주 시는 웬만하면 다 읽을 만하니... 시를 탓할 필요는 없는데... 그냥 그렇게 읽어가는데... 1993년에 나온 시집이고, 시들이 대부분 1990년대 초반에 쓰인 시들인데 ... '구만주제국 체류시(舊滿洲帝國 滯留詩)'라는 5편의 시를 읽으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가 친일시를 쓴 것이야 이 당시에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데, 굳이 이렇게 자신을 합리화 하는 시를 쓸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

 

함형수 시인에 대한 일화를 시로 쓴 거야 친구이기도 하고 그를 기념할 수도 있으니 그렇다쳐도, 세월이 엄청 흐른 다음에 이런 시, '일본헌병 고 쌍놈의 새끼' 같은 시를 쓰다니...

 

늙어서 자신을 합리화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지, 그냥 다른 사람이 썼으면 킥 웃으며 지나갈 수 있는 시가 마음에 턱 걸려 버렸다.

 

늙음이 결코 삶의 원숙함으로 가지 않았구나, 자신의 삶을 제대로 반추하지 않았구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 같은 꽃'이라고 국화꽃을 노래한 시인이 자신의 삶을 보는 거울을 외면했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하지만 어쩌랴. 이제 서정주는 과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의 잘잘못, 그리고 잘한 점을 구분하고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몫인 것을.

 

 서정주의 과거 그리고 당시 개인사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시들이 많아서 읽을 만한 시집이기는 하지만, 단지, 그처럼 늙어서 자신을 반성하는 정신까지도 떠돌면 안 되겠단 생각을 하면서 읽은 시집.

 

가을이 깊어져 간다. 정신도 깊어져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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