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비시선 27
이가림 지음 / 창비 / 1981년 5월
평점 :
품절


불이 우리에게 온 다음, 불은 우리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때로는 우리의 삶을 유지하게, 때로는 우리의 삶을 끝내게.

 

그러나 불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다. 특히 추운날 언몸을 녹여주는 불은 얼마나 소중한가. 그런 불같은 존재, 그런 사람. 정말로 그리운 시대다.

 

시인들은 이렇게 절규한다. 시대가 어지러울수록 시대를 바로보는 시인은 따뜻한 불을 그리워한다.

 

  이 일그러진 시대에 있어서 시를 쓰고 또 시집을 낸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보며, 소위 시 비슷한 것을 주물러온 사람의 하나로서 부끄러움과 닳아빠지고 병든 말들밖에 가진 것이 없는 이 가난함, 쓰레기 같은 말들 속에서 넝마주이가 된 자신을 볼 때 눈물겨운 허망함을 어떻게 견뎌낼 도리가 없다. 그러나 '살균 처리된 세계'에서는 살지 못하는 가난하지만 따스한 사람들이 있는 한, 아프디아픈 포복일망정 몸 전체로 싸워나가야 된다는 한 가닥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후기'에서. 110쪽.

 

그렇다. 시인이 이렇게 절규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이다. 강산이 무려 세 번이나 변하고도 또 변해가는 시간이 지난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지났음에도 과연 시인의 절규는 과거 속의 외침에 불과할까? 아니다. 지금 그 시대에 시인이 외쳤던 소리들을 다시금 외치는 시인들이 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따스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오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인이 노래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따스함을 전해준다. 그런 따스함에 우리에게 배어들어 세상을 조금이나마 좋은 쪽으로 변해가게 한다.

 

엄한 시절, 시인은 작지만 따뜻한, 힘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모닥불을 노래했다. 그런 모닥불, 지금도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그 모닥불 주위에 모여든 작은 사람들, 그러나 따스한 사람들.

 

모닥불을 지키기 위해 우리 이 시에서 말한 대로 '인간의 고리;를 만들어 따스한 사람들의 연대를 이루자. 그런 연대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자. 시인의 언어가 우리 마음 속에 스며들고, 행동을 이끌어낸다면...

 

모닥불의 온기가 세상에 두루 퍼진다면, 그런다면...

 

오래 된 시지만 이 시집에 실려 있는 따스한 시 한 편. '모닥불'을 보자.

 

     모닥불

 

한무더기 동백꽃인 양

변두리 눈밭에서 피어나는 것

숨어서 더욱 타오르는 것

강아지도, 구두닦이도, 자전거 수리공도

몸 파는 아가씨도

서로 다투어 꽃송이를 꺾는가

둥그렇게 둥그렇게 어우러져

언 손들을 내뻗고 있구나

노을빛인 양 물든 인간의 고리

 

이가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94년 초판 4쇄. 1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