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로 세운 집 - 기호학으로 스캔한 추억의 한국시 32편
이어령 지음 / arte(아르테) / 2015년 9월
평점 :
품절


참 제목 잘 붙였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시를 가지고, 시는 언어로 세운 집이라고 하니, 기가 막힌 표현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이런 표현을 쓰기는 하겠지만, 시를 해설하는 책에서 이런 제목을 썼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시에 한발짝 다가서게 하고 있단 생각이 든다.

 

책을 펴내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는 말로 지은 집입니다. 벽돌로 집을 짓듯이 말 하나하나를 쌓아 완성한 건축물입니다. (6쪽)

 

그렇다. 시를 집에 비유할 수 있다. 온갖 재료들이 합쳐져 집이 되듯이 시 역시 온갖 말들이 합쳐져 시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시는 언어로 세운 집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를 감상해야 할까? 바로 언어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의 삶이나, 사회적인 상황을 먼저 고려하기 보다는 시에 쓰인 언어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는 것. 이것을 기호학으로 시를 읽어낸다고 하는데...

 

그런 시에 대한 이론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시를 파악하는데 언어에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을 언어를 통해서 조직해 낸 것이 시니까 말이다.

 

집에 초가집, 기와집, 벽돌집, 콘크리트집, 아파트, 연립주택, 목조주택, 황토집, 통나무집, 돌집 등 재료나 형태, 기능에 따라 다양한 이름이 붙여질 수 있듯이, 시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어느 집이 특별히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집에 대한 관점이 다르고, 좋아하는 집이 다르니까, 시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이름이 붙을 수 있고, 어떤 시가 좋은 시라고 꼭 전법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

 

다만, 집이 좋고 나쁘고를 판단할 수 있듯이(불량재료를 쓴 집은 곧 무너지게 된다. 안 좋은 집이다. 좋은 재료를, 적절한 곳에 써야 좋은 집이다) 시도 좋은 시, 안 좋은 시를 구분할 수는 있다. 이것을 그 시를 좋아하느냐 마느냐와는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 역시 언어로 세운 집이기에, 기본적으로 언어가 적절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시들이 좋은 시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언어를 중심으로 시를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감상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어떻게 언어에 집중해야 하는가, 언어에 집중하면 시의 맛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를 32편의 시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시를 고등학교 때까지 시험을 위해서 배우고, 그래서 언어를 중심에 놓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어떤 형태로 출제가 되는지를 중심에 놓고 시를 읽었던 습관을 이 책을 통해서 버리게 된다. 시는 결코 시험으로 평가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다보면 고등학교 때까지 배웠던 시에 대한 해석이 이 책에서 해석하는 내용과 다른 점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시에 쓰인 언어 자체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리가 동요로도 알고 있는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부터 시작한다. 너무도 단순한 달랑 4행짜리 시를 가지고 이렇게 많은 의미가 언어들의 조합을 통해 들어 있음을, 그래서 시라는 집의 안쪽, 우리가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시라는 집의 내밀한 부분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 시를 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다른 시들을 읽어가게 되는데, 맨 마지막 시가 박남수의 '새'다. 제목으로는 '시인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했고.

 

누구나 아는 시로 시작해서 시에 쓰인 언어를 통해 시인은 결코 사라질 수 없음을 주장하는 글로 끝맺고 있다. 시라는 집의 안쪽을, 생활을 본 사람은 그런 집을 지은 시인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런 집에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 한 시인은 사라질 수 없음을 이야기 한다.

 

아니,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냐 없냐가 중요하지 않다. 시인은 수요자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집을 지어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이 아니라도 좋다고, 언제라도 누군가 자신의 집을 보아주면 좋다는 생각으로.

 

학창시절 만났던 시들을 다시 만나는 즐거움, 그 시들을 새롭게 보게 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해준 책이다.

 

참고로 이 책에 나온 시들을 열거해 본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시들을 이미 학교에서 배웠을 것이다.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춘설, 광야, 남으로 창을 내겠소, 모란이 피기까지는, 깃발, 나그네, 향수, 사슴, 저녁에, 청포도, 군말, 화사(花蛇), 해, 오감도, 그 날이 오면, 외인촌, 승무, 가을의 기도, 추일서정, 서시, 자화상, 국화 옆에서, 바다와 나비, The Last Ttrain, 파초, 나의 침실로, 웃은 죄, 귀고(歸故), 풀, 새 

 

총 32편의 시다. 이미 알고 있지 않다면 한 번 찾아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시를 찾아 읽는 민족은 문화민족일테니.

 

덧글

 

시에 관한 책에서 조금 아쉬운 점... 특히 제목이 언어로 세운 집인데... 언어가 잘못 사용되면 적절하지 않은 곳에 들어간 건축재료처럼 눈에 거슬리게 된다. 난 두 군데가 거슬렸는데...

 

하나는 청포도 시를 인용한 부분.

109쪽. 청포도 시에서 5연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

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이라고 인쇄되어 있는데... 이건 명백한 오식이다.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이라고 되어야 한다. 이 책의 주석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255쪽. 유치환의 시 귀고(귀고)에서 11행 행이불언(行而不信)이라고 되어 있는데.. 한자어가 잘못 표기되었다. 행이불언(行而不言)이어야 한다. 역시 주석에는 바로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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