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의 전집을 읽다가, 너무도 침침하고 우울해서 중간에 내려놓았다. 내려 놓았다, 다시 읽다가 다시 내려놓다가.
왜 이리도 그의 시는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지, 왜 이렇게 어둠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자꾸만 자신을 가두고 가두고, 아니 가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겠지만, 기형도가 살아온 시대가 암흑의 시대, 어둠의 시대, 안개의 시대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 시대에도 어떤 희망을 보고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는 그 이후의 세상을 보지 못하고 떠났지만, 어쩌면 그의 시는 앞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을 미리 보여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칙칙한, 도대체 밝은 빛이라고는 들어오지 않는, 그럼에도 사람들은 꾸역꾸역 몰려 들어올 수밖에 없는 그런 사회.
하지만 그의 시를 읽다가 그 무겁고 습한 시들 속에서 이런 시를 발견하고, 이게 뭔가, 또 이렇게 우리는 그의 시 속에서 우리 현실을 발견하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섬뜩해졌다.
시인은 자신의 상상력 속에서 미래를 미리 건져낸다. 어떤 사람을 이를 미래를 표절하는 것이라 했다. 미래를 표절하는 시인, 그는 위대한 시인이다. 이 점에서 기형도의 시인으로서 뛰어난 점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노인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기형도 전집 편집위원회 엮음, 기형도 전집, 문학과지성사, 2002년 1판 10쇄. 88쪽.
왜 이 시에 꽂혔을까. 이 시에서 현재를 읽어낸 구절이 무엇일까? 제목에서 아님 내용에서?
엄혹한 시절을 견뎌낸 사람들은 좋은 시절이 오면 물러나야 한다. 그들이 물러나기 싫어도 자연스레 후배들에게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
혁명을 성공시키는 사람과 혁명을 계승, 발전시키는 사람은 달라져야 한다. 역사를 보면 그렇다.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것은 법가를 계승한 진시황이지만 중국 역사를 이끈 것은 그 다음 유가를 계승한 한나라다.
혁명가가 혁명 후에도 정치권력을 장악해 얼마나 많은 피들을 흘렸는지, 혁명의 이념이 모두를 춤추게 하는 것이었는데, 소수만 춤추고 다시 대다수는 어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고 만 일이 얼마나 많은가. (물론 혁명가가 훌륭하게 혁명 이후를 이끌어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소수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 시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고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이 바뀌었으면 바뀌는 과정까지 힘써왔던 사람들, 이제는 물러나야 한다.
이형기의 '낙화'란 시에 나오는 것처럼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야' 한다. 그래야 아름답다.
그러나 이렇게 사라지는 것, 잊혀지는 것은 엄청난 슬픔이고 상실이다. 이미 지나간 세대에게는. 하지만 아직 돌아올 젊음에게는 남의 슬픔이다. 남의 슬픔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그 시대를 견뎌낸 사람들의 몫이다. 사라지는, 잊혀지는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힘, 그것들을 지나간 세대가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고 시인이 말했듯이 이렇게 된다. 추악한 늙음.
왜 이 시가 마음에 왔을까? 다시 질문을 한다. 답은 하나다. 요즘 정치권을 보는 내 마음이라는 것이다. 추악한 가지들... 그들은 죽었음에도 부러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추악하다.
우리나라 법령을 찾아보았더니 이런 법령이 있단다.
1.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 제 19조
① 사업주는 근로자의 정년을 60세 이상으로 정하여야 한다.
② 사업주가 제1항에도 불구하고 근로자의 정년을 60세 미만으로 정한 경우에는 정년을 60세로 정한 것으로 본다.
[시행일:2016.1.1.] 제19조의 개정규정 중 상시 300명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 제4조에 따른 공공기관, 「지방공기업법」 제49조에 따른 지방공사 및 같은 법 제76조에 따른 지방공단
[시행일:2017.1.1.] 제19조의 개정규정 중 상시 300명 미만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이 법에 의하면 60세 정년규정은 300인 이상 사용 사업장의 경우에는 2016.1.1부터 강제시행 되며, 30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에는 2017.1.1부터 강제시행된다는 얘기다.
이 말을 뒤집으면 이 때까지는 각 회사의 취업규칙에 따라 정년이 달라진다는 얘기고, 대부분의 회사는 만 55세를 정년으로 하거나 만 58세를 정년으로 하고 있다. 이것도 많다고 임금피크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30세에 결혼해 아이를 곧장 낳는다고 해도 55세면 아이가 25세가 된다. 25세면 대학생이다. (아주 빠른 경우가 아니면 보통 남자는 군대 갔다오고 대학생이 되고, 여자는 졸업을 하거나, 취업준비를 하고 있을 나이다) 생활비가 가장 들어갈 때라는 얘기다. 여기에 요즘은 30에 결혼하기도 힘드니 더 늦게 결혼하면 회사를 나올 나이에 아이들은 대학생을 경우가 많다.
이 법이 시행되더라도 상황은 그닥 나아지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이 정년을 60세에 할텐데... 지금처럼 청년 취업난이 심각한 상황에서 나이 60에 자식들은 아직도 직장을 갖지 못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 돈은 많이 써야 하는데, 회사에서 나와야 하는 상황. 이들은 이렇게 힘들게 지낼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는 아직 '봄빛이 닿자'도 않았는데, 아직도 '긴 겨울'인데 '부러져야' 한다. 말라서는 안되고, 부러져서도 안되는데...
이들은 노인이 되기도 전에 노인이 되어 퇴출당한다. 이는 진정한 슬픔이다. 기형도가 말한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이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는 그런 슬픔이다. 젊은이들은 이런 상황을 알지만 자신들도 먹고 살아야 하므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런 상황인데...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님 알면서 모르는 체하는지, 이미 부러져서 떨어져야 할 마른 가지들이 정치권에서 우뚝 버티고서 사람들을 날카롭게 찌른다. 그 마른 가지로.
정년이 없는 직장, 한 번 되면 4년이 보장되며, 온갖 지원이 끊이지 않는 직장. 사회에서 특권층으로 대접받고, 그만두어도 연금으로 생계 걱정이 없는 직장. 나이 먹었다고 나가란 소리 듣지 않고, 오히려 원로라고 큰소리까지 치는 직장.
그게 바로 정치권이다. 기형도의 시에 의하면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 그들이 바로 정치권이다. 반성 좀 했으면 한다.
노인에 대한 발언을 잘못해서 실패한 정치인들이 있는데... 이 때 노인들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나? 기형도가 말하는 이 시에서 노인들은 일반 국민들이 생물학적으로 먹은 나이의 노인이 아니라, 정치를 하면서 정신이 말라버린, 그래서 뾰족하게 날선 가시만 있는 가지가 된 정치인들이라는 생각.
이 생각에 이 시가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그는 먼 미래의 정치인들의 모습을 미리 시를 통해 표현해 내고 있다. 엄청난 표절이다. 미래를 읽어내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