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노자, 그들은 물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동양문화산책 4
사라 알란 지음, 오만종 옮김 / 예문서원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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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우리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유교이다. 유교를 종교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 않고, 철학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유교는 우리의 생활 깊숙히 들어와 있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생활을 제약하고, 규정짓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많이 약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 제사일 것이다. 제사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짓는, 사람들의 삶이 단절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고, 그 연결을 예라는 형식을 통해 발현시키는 것은 유교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유교의 대표자는 공자와 맹자이다. 이들이 자신의 사상을 펼치기 위해서 어떤 개념을 동원했을까? 이 책은 여기서 출발한다. 단지 유교만이 아니라 도교까지도 언급하면서, 유교와 도교에 나타는 물의 개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왜 도교까지 포함하는가?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사상들이 만개한 때는 춘추전국시대이고, 그 시대에 제자백가라고 해서 많은 학파들이 나왔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아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학파는 유가와 도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펼치는 개념으로 또는 대상으로 물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고대사상에서 '물'을 언급한 사상가로 유가와 도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가의 대표자는 공자와 맹자이고, 도가의 대표자는 노자와 장자이다. (장자는 노자와 다른 사상가로 분리하려는 움직임도 있으나, 통상적으로 노장사상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함께 묶고 있으니 여기서는 노자와 장자를 도가로 엮는다. 이 책의 저자는 그렇게 여기고 있다.)

 

왜 이들은 '물'을 중시했을까? 사상을 펼치는데 사상은 철학으로 개념이 매우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추상적인 개념을 그냥 펼쳤다가는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는데 실패하고 만다.

 

예수도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서 쉬운 비유들을 많이 들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공자와 노자도 자신들의 사상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 추상적인 개념을 대체할 다른 개념을 찾아내었으리라.

 

그것이 바로 '물'이다.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는 물. 우리는 물이 없으면 죽고, 또 고대사회는 물을 중심으로 사회를 구성했기에, 물은 가장 쉽게 접하는 대상이고, 쉽게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는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물'의 속성을 대상으로 자신들의 사상을 펼친다. '물'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든지, '물'처럼 맑고 깨끗해야 한다든지, '물'처럼 포용적이어야 한다든지 하는 비유를 들어 자신들의 사상을 펼친다.

 

이것을 이 책의 저자는 '뿌리 은유'라고 한다. 은유가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개념으로 대체하는 비유라고 하고, 뿌리라는 말은 근본이라는 말이니 '뿌리 은유'는 공자와 노자의 사상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라는 뜻이 될 터이다.

 

그리고 이런 '뿌리 은유'로 '물'을 들고 있다. 결국 우리는 '물'의 속성을 알면 그들이 어떤 사상을 펼쳤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와 개념체계가 다른 서양 사람들에게 공자와 노자의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작업이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물'로 이들 사상을 설명하고 있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유교와 도교의 '물'이 차이를 이룬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유교의 '물'은 넓고 깊고 크다. 이들은 왕도정치를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된다. 그래서 공자나 맹자에게서 '물'은 '우'와 함께 등장한다. '우'가 누구인가? 그는 바로 '물길'을 바로 잡은 사람 아니던가. 물길을 바로잡아 물이 제 길을 가게 하고, 사람들이 제 삶을 살게 해준 사람 아닌가.

 

이렇게 유교에서 '물'은 행동과 함께 나온다. 마치 작은 물길들을 모아 큰 물길을 만들고, 서로 떨어져 있던 물길을 터서 연결시키는 그런 행동이 군자의 길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므로 유교에서는 행함이 있기에, 그 행함을 유지시켜주는 틀과 형식으로서의 '예'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반대로 도교에서 '물'은 그냥 놓아둠이다. 물길을 바로 잡는 것이 아니라, 물길을 서로 트고 합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놓아두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물은 흘러간다. 제 갈 길로. 거기에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 행동을 할 필요가 없으니 틀과 형식인 '예'가 필요없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이런 차이가 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우리는 4대강 사업이다, 경인 아라뱃길이다, 뭐다 하면서 물길을 트고, 합치고, 연결하는 일을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물의 본성을 살리는 행동을 한 것이 '우'가 한 일이라면, 우리가 한 일은 물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 아니었던가.

 

물의 본성을 거스르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유교와 도교의 공통된 사상이니...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유교나 도교를 스스로 배반하고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싶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이다. 유교와 도교를 '물'로 엮어 주장을 펼쳐나가는 것에서도 감탄하였고... 지금 우리의 삶을 '물이 본성'에 비춰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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