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헌책방에 갔다.

 

헌책방에서 만난 책들은 새책을 만날 때보다 더 반갑다.

 

이미 누군가의 손에서 부드럽게 만져지고, 읽히고 읽혀 누군가의 마음에 자리잡은 내용들을 간직한 채, 또 다른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면서 또 다른 사람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책들도 만나는 재미가 헌책방에는 있고.

 

시집이 전시되어 있는 책장에 가서 처음부터 주욱 훑어보는데... 柳致環이라는 제목이 보인다. 시집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한글이 없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느냐 마느냐로 많은 논쟁이 있는데... 이 책은 제목이 아예 한자다. 분명 우리나라 책인데... 시집인데... 한자를 모르는 사람은 읽을 수조차 없다.

 

"유치환"이다. 시인이다. 우리나라 교과서에 한 작품 이상씩은 꼭 실렸던 시인.

 

그 시인의 이름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이제는 한자를 아는 사람도 줄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당당하게 한자만으로 책을 낸 것도 참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든다.

 

옛날에...그리 오래 전도 아닌데.. 겨우 33년 전인데... 한글전용이 법적으로 이루어진 지가 한참이 되었음에도 이렇게 한자들이 자기 자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참고로 이 책은 1982년에 재판이 발행되었고, 가격은 2,000원이었다. 내가 헌책방에서 산 가격도 2,000원이다.)

 

시집에 수록된 시들에도 한자가 나온다. 한글 다음에 (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자만 있다. 내 나이에도 한자를 제법 안다고 하지만... 긴가민가 하는 한자가 있다.

 

읽기에 어렵다. 그러나... 이미 지난 시대, 이미 나온 책을 뭐라 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냥 헌책은 헌책일 뿐이다.

 

유치환 하면 '생명파' 또는 '인생파'라는 말이 먼저 떠오르고,(국어교육의 폐해다. 시험에 나오는 이런 유파들을 얼마나 달달 외웠으면 아직도 유치환, 서정주 하면 생명파가 먼저 떠올를까?) '깃발', '생명의 서', '바위'가 떠오른다.

 

학교 다닐 때 배운 시들. 무언가 강하고, 인간을 절벽 끝까지 밀어붙인 다음, 이 다음에 너 어떡할래 하고 묻는 듯한 그런 시들. 인간 실존의 문제를 느끼도록 하는 시들. 그래서 생명파.

 

그러나 오래 된 그의 시집을 읽다가, 이 시를 발견하고서는, 이것이 먼 과거의 일만은 아닌, 바로 내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표기가 예전 표기고, 한자도 있지만, 예전 표기만 지키고, 한자는 한글로 바꾼다.

 

눈추리를 찢고 보리라

 

내 나기를 인욕의 태반에서 태여났고

내 살기를 오직 굴종의 채찍 밑에 지냈기에

그  치욕을 간에 새겨

만대도록 잊지 않기를 맹서하여

짐승같이 먹이던 나의 부모가 처자가 형제가

오늘 이 자리에 고삐 끌려 나왔기로

그 기쁨을 나는 치희하여 작약치 않으리라

 

나의 겨레여 들으라

나라를 찾아 하늘 우러러 머리 풀고 탄식하던 우리네가

오늘이야말로 뜨거운 손과 손 가슴과 가슴으로

말없이 서로 묵약하여야 할 우리네가

밖으로 대해선 오히려 장선보다 떳떳치 못하고

내 형제끼린 원귀모양 질투하고 모함하고

나라보다는 당파를 앞세우고

도리어 남 나라를 조상같이 위하고 아부함이 없는가

 

자당의 권세를 거미줄 치기에

민중의 복지를 일컬어 팔고

그릇된 주장을 부회하기에

어진 백성을 우롱함이 없는가

아아 진실로 백사(百思)하여 그러함이 없는가

 

나는 보리라

지낸 굴욕의 죄과를 다시 범하지 않기로

눈추리를 찢고 나의 똥창까지 들여다보리라

아아 그러나 사색의 그 금수와도 못한 할퀴고 띁음이

나의 민족의 다시 씻을 수 없는 악혈의 근성이라면

그는 천형이어늘 어찌 뉘를 원망하료

아아 나의 겨레여 우리는 마땅히 망멸(亡滅)할진저

 

한국시문학대계 15, 유치환, 지식산업사, 1982년 재판. 94-95쪽.

 

이 시가 1948년에 출간된 "울릉도"라는 시집에 실려 있다니, 해방 직후에 우리나라 현실을 개탄하면서 쓴 시다.

 

무려 70여년 전의 상황에서 시인이 한탄한 내용의 시다. 그런데...지금은... 지금 우리는 어떤가? 이 시의 내용에서 벗어나 있는가. 오히려 시인의 한탄이 지금도 울려퍼지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시인이 절규하듯 내뱉은 '나의 겨레여 우리는 마땅히 망멸할진저'라는 말을 실행하고 있지는 않은가.

 

' 자당의 권세를 거미줄 치기에 / 민중의 복지를 일컬어 팔고 / 그릇된 주장을 부회하기에 / 어진 백성을 우롱함이 없는가'라고 한탄했던 시인의 말을, 우리는 단지 과거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가.

 

여기에 정말로 이건 과거다. 우린 이것을 극복했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아직도 그렇지 않다. 그래서 시인들이 계속 시를 쓴다.

 

시인들은 이 시대를 지키는 파수꾼이기 때문이다.

 

그런 시인들, 계속 만나고 싶다.

 

헌책방에서 만난 유치환을 통해 시인의 자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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