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다가 문득 혹, 시는 축지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멀고도 먼 거리를 가장 짧게 압축해 놓는 법. 그것이 바로 시고 축지법 아니던가.

 

그 압축에 얼마나 많은 것이 들어가 있는지는 하나하나 펼쳐가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질 터. 빠르게 대충 넘어가는 사람에게는 처음과 끝, 그리고 중간이 존재할 뿐일테지만, 천천히 그 사이를 살피면서 가는 사람에게는 온갖 세상이 펼쳐지는 신세계일 터이다.

 

그게 바로 시다. 축지법은 이곳에서 저곳을 한 번에 갈 수 있게 해주는 도술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곳과 저곳을 연결해주고, 그 사이를 자신의 능력으로 메워나가게 해주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 하고 많은 것들을 줄이고 줄여 자신의 감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해 낸, 누구 말대로 하면 세계의 자아화가 이루어지는 시는, 언어와 언어 사이, 또 행과 행 사이에 엄청난 것들이 숨어 있다. 그 숨김이 바로 시인의 재주요, 그 숨김을 찾아내는 것이 독자의 능력이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바로 원재길의 시집 "나는 걷는다 물먹은 대지 위를"를 읽다가 한 시를 발견하고서이다.

 

그 시 제목은 '속도광'

 

  속도광

 

다섯 시간 반

여섯 시간 사십 분

자동차와 한 덩어리 되어

쉼 없이 달리는 짐승들이 있다

불타 버릴 듯 뜨거워진 머리

털털거리는 뼈

김 솟는 살덩이

 

쏜살같이 모든 풍경 버리고

바람에 너풀대는 것들

꿈틀거리는 것들

겨우 숨 붙어 있거나

검게 썩어 가는 것들

 

다 외면하는 척하며 무작정 달릴 때

삶은 얼마나 가벼우냐

이따금 언덕 너머 바다가 보이고

파도는 거듭 자기 몸 타넘을 때

죽음은 또 얼마나 가까운 것인가

 

찰나

쌩 하고 한 생애가 옆을 스쳐

깜짝 놀라 눈

감았다 뜨니

그새 그 짐승 간 데 없다

 

원재길, 나는 걷는다 물먹은 대지 위를, 민음사, 2004년 초판. 68-69쪽

 

시하고 얼마나 다른가. 압축은 비슷하지만, 여기에는 주변을 살필 여력도 사이를 채울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직선으로 내달릴 뿐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네 인생도 이렇게 직선이지 않은가. 속도광이지 않은가.

 

우리도 정해진 목표를 향해 줄기차게 쌩하고 달리기만 할 뿐이지 않은가. 함께 하지 못하고, 그 멀기도 먼 거리를 아주 가깝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현대인들의 삶이. 내 삶이.

 

그래서 축지법처럼 단축은 하되, 그 사이는 보지 못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보아야 한다.

 

시는 축지법이 되어야 한다. 이런 속도광이 아니라. 이곳과 저곳을 압축해 놓았지만, 그 압축 사이를 채워나가야 한다. 우리의 상상으로, 우리의 삶으로.

 

그럴 때 시를 읽는 삶이 풍요로와진다. 가장 짧은 시에서 가장 풍성한 삶을 찾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까닭이다.

 

시인은 자서(自序)에서 말한다.

 

'시처럼 사는 일도 날로 간결해지기를'이라고.

 

이 말 속에는 압축만이 있지는 않다. 이 간결에는 더 많은 복잡함들이 채워져야 한다. 그게 바로 삶이고, 시이다. 하여 우리는 축지법을 실행하더라도, 그 사이에 온갖 것이 있음을,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시, 그래서 필요하다. 현대처럼 속도광인 시대에는 더더구나. 사이를 찾고, 사이를 채우려는 노력을 해야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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