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작품을 처음 만난 건 소설을 통해서다.

 

"소년이 온다"

 

한강은 많은 소설을 썼는데, 작년에 이 소설로 한강을 처음 만났다. 물론 이름을 들어보긴 했지만.

 

그리고 한강이 시인이자 소설가라는 것. 마치 성석제와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고.

 

하긴 소설과 시가 확연히 구분되어 한 분야에만 종사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니...

 

최인훈의 "광장"을 보라. 그 소설 속에서 이미 시가 나오고 있지 않은가. 작가 최인훈이 주인공인 이명준을 빌려 시 창작을 하고 있는데...

 

더 오래 전으로 가면 "소나기"로 잘 알려진 황순원은 시인으로 시작을 했고, 또 마지막에 시인으로 작품을 썼으니... 시와 소설이 함께 하는 작가들이 많은 것이 이상할 이유가 없다.

 

이상이라는 말이 나오니, 이상은 시와 소설 분야에서도 독특하기로 소문난 사람 아니던가. 한강 역시 시와 소설 분야에서 모두 자기 자리를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헌책방에서 이 시집을 보자마자 한강이라는 이름에 그냥 손에 들고 만 시집이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이런 시는 이 시집에 없다. 다만 이 시집에 실린 시의 내용들이 이 제목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할 뿐이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말이 무엇일까?

 

여러모로 궁금증을 자아낸다. 늘 저녁에 자신이 곁에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이제 저녁은 내 필요할 때만 꺼내 볼 수 있게 넣어 두었으니, 저녁을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인가?

 

아무튼 이 시집의 분위기는 대체로 어둡다. 저녁, 어둠, 겨울 등의 시어들이 많이 나와 대체로 어두침침한 분위기를, 무언가 축축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다.

 

'자화상. 2000. 겨울'이라는 시를 보면 방향을 잘못 잡아 결국 파멸로 이르는 초나라 사나이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신의 방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회복기의 노래', '다시, 회복기의 노래. 2008'이라는 시가 있는 것을 보면 시인은 어둠을, 겨울을 이제는 이겨내고 있나 보다.

 

그래서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고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꾸만 어두운 분위기를 내뿜는 시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중에 이 시가 제일 눈길을 사로잡아 계속 몇 번이고 읽게 만들었는데...

 

                    저녁의 소묘 3

                - 유리창

 

유리창.

얼음의 종이를 통과해

조용한 저녁이 흘러든다

 

붉은 것 없이 저무는 저녁

 

앞집 마당

나목에 매놓은 빨랫줄에서

감색 학생코트가 이따금 펄럭인다

 

(이런 저녁

 내 심장은 서랍 속에 있고)

 

유리창.

침묵하는 얼음의 백지

 

입술을 열었다가 나는

단단한 밀봉을

배운다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4년 초판 4쇄. 65-66쪽 

 

흑백의 차가움.

 

이 시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다. 저녁도 붉은 황혼이 들 때 따스함과 편안함이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이 시에서는 유리창으로 이를 원천봉쇄하고 있다.

 

유리창을 얼음의 종이라고 표현해서 차가움을 극대화하고 있다. 유리창은 투명하지만 안과 밖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안과 밖을 보인다는 것을 계기로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얼음이라고 표현해서 보이지만 함께 할 수 없음을 그래서 차단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뒷연에서는 이를 '침묵하는 얼음의 백지'라고 표현하고 있고, 그래서 소통이 되지 않으니 자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자신은 단단한 밀봉을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와 함께 있어야 할, 내 육신에서 심장이 떨어져 나가 서랍 속에 있다는 것은 자신 역시 몸과 영혼이 분리되어 있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들은 보통 심장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심장은 즉 마음이다)

 

결국 유리창은 나와 밖을 가르기도 하지만 나 자신을 몸과 영혼으로 가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차갑고 어두운 무채색의 분위기를 이 시가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시집이 마냥 어두운 것은 아니다. 이 시집의 맨 마지막 시 '저녁의 소묘5'에서는 '(살아 있으므로) / 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고 하여 긍정적으로 시집을 마치고 있다.

 

어둠은 밝음을 예비하고 있으니, 그래서 저녁은 서랍에 넣어 두었으니, 이제는 나에게는 밝음이 나타날 거라는 희망... 아마도 이 시집에서 가장 긍정적인 시는 '괜찮아'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 지금은 어둡다. 어두워. 그런데 뭐? 괜찮아. 어둠은 곧 사라질테니... 어둠은 밝기 전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니. 어둠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을테니.

 

그래서 한강의 이 시집을 읽으며 회복기를 기대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참고로 한강의 이 시집에서는 시어들이나 또는 시행이 (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참 많다. 이러한 (  )의 사용이 독특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