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재미 있지 않은가.
'일광욕하는 가구'라니. 가구가 어떻게 일광욕을 하지? 가구는 햇빛을 쬐는 순간 수명이 단축되지 않나? 꼭 그렇지는 않나?
하지만 햇빛을 직접 받는 가구가 좋을 리는 없다. 그러니 가구가 일광욕을 한다는 얘기는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얘기다.
이 시집은 자연과 인간 생활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태도와 인간 생활을 바라보는 시인의 태도가 대별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는데...
시인은 자연에게서는 한 없는 경외심과 편안함을 지니고 자연을 바라본다. (대숲에서, 순장자처럼, 흐르는 물 : 이 시들에서 자연은 긍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 생활에 대해서는 고쳐야 할 것으로,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식으로 바라보고 있다.(이 독성 이 아귀다툼, 바보 고기, 노부부: 이 시들에서는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지금, 우리는 어떤가? 우리 인간의 삶이 어차피 자연과 공존해야 하지만 인간의 삶 자체는 자연을 파괴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무한한 것으로 여겨졌던 자연이 결코 무한하지 않음을,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자연을 파괴하지만 그 자연이 회복가능할 정도로만 파괴해야 함을 깨달아가고 있는데...
시인의 이 시집에서 제목이 된 시는 두 가지를 모두 바라보고 있다. '일광욕하는 가구'
왜 가구들이 일광욕을 하겠는가? 홍수라든지, 폭우라든지 하여 집 안에 물이 들어와 가구가 젖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이렇게 젖은 가구들을 버리지 않고 다시 쓰려고 하는 모습. 여기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모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태풍이든, 홍수든, 폭우든 자연이 우리에게 가하는 횡포(이를 횡포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자연의 살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를 받아들이며, 그를 다시 자연을 통해 회복하는 모습이 '일광욕하는 가구'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광욕하는 가구
지난 홍수에 젖은 세간들이
골목 양지에 앉아 햇살을 쬐고 있다
그러지 않았으면 햇볕 볼 일 한 번도 없었을
늙은 몸뚱이들이 쭈글쭈글해진 배를 말리고 있다
긁히고 눅눅해진 피부
등이 굽은 문짝 사이로 구멍 뚫린 퇴행성 관절이
삐걱거리며 엎드린다
그 사이 당신도 많이 상했군
진한 햇살 쪽으로 서로 몸을 디밀다가
몰라보게 야윈 어깨를 알아보고 알은체한다
살 델라 조심해, 몸을 뒤집어주며
작년만 해도 팽팽하던 의자의 발목이 절룩거린다
풀죽고 곰팡이 슨 허섭쓰레기,
버리기도 힘들었던 가난들이
아랫도리 털 때마다 먼지로 풀풀 달아난다
여기까지 오게 한 음지의 근육들
탈탈 털어 말린 얼굴들이 햇살에 쨍쨍해진다
최영철, 일광욕하는 가구, 문학과지성사. 2000년. 41쪽.
이 가구들을 자연으로 보지 않고, 우리네 삶으로 보아도 좋다. 우리들 알게 모르게 늙어간 우리들도 한 번 햇볕 쬘 날이 있을테고, 이렇게 버티던 삶들도 쨍쨍해질 때가 있을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