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에 제목을 보고 마음에 위안을 주는 책인 줄 알았다.

 

그렇지 않아도 험난한 세상, 자꾸 불안감을 조성하는 세상에서 마음의 위안을 받고 싶었다.

 

제목만 보면 '상처받지 않을 권리'다. 그래, 지금 내가 받는 상처는 내 탓이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야. 나만 너무 상처받을 필요 없어. 라고 생각하고 책을 골랐다.

 

그런데, 아니다. 개인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힘들게 살아가는 이 시대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이다.

 

그러므로 작가도 나오지만, 그 작가와 짝이 되는 철학자, 사회학자들이 나온다. 작품과 사상의 조화. 그런 조화를 통해 우리 시대를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물론 분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름 대안도 제시하고 있지만, 대안은 결국 우리들의 몫이다. 작가가 제시한 협동조합은 지금도 많이 논의되고 시도되고, 실천되고 있지만, 아직 우리 사회의 주요 운동으로 자리잡지는 못했다.

 

왜 그럴까? 인문학적 성찰이 부족해서? 아니면 실천력이 부족해서? 그도 아니면 자본주의 세력이 너무도 강고해서?

 

이것저것이 다 합쳐진 복합적인 요인 때문에 협동조합 운동이 지지부진하겠지만, 무엇보다도 큰 요인은 불안감 아닐까 한다.

 

이 책의 3장에서 부르디외로 설명되는 이야기가 아마도 지금 현실을 잘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가능성보다는 잠재성에 매몰되어 있다고. 가능성은 구체적인 실천 가능성이고, 실천을 의미한다면, 잠재성은 막연히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것.

 

그래서 현대 자본주의의 아비투스는 가능성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하지만, 노동자들이나 소시민들은 잠재성을 중심으로 움직이기에 그들이 혁명을 일으키지 못하고 현재에 주저앉아버린다는 것.

 

그러니 그들보고 용기없다고, 또 생각없다고, 한심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는, 즉 그들을 구별지워 그 틀 속에 가두워버린 체계에 대해서 숙고해야 한다고 하는 부르디외의 논의는 시사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상처받으며 살고 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현재를 즐기기 보다는 잠재적인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근에 사람들의 관심을 끈 드라마 "미생"을 보더라도 우리가 얼마나 현재를 희생하면서, 현재를 불안하게 살아가는지, 미래가 가능성이 아니라 잠재성으로 다가오는지 알 수 있다.

 

"미생"이 그렇게 인기를 끈 이유가 바로 우리들 자신이 "미생"이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렇다면 여기서 한 단계 나아가야 한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는 우리에게 있다. 어떻게 나아가야 하나? 그 대답이 바로 4장에 있다. 보드리야르. 그가 제시하고 있는 상징으로서의 선물. 바타유의 영향을 받았다는 저주의 몫. 즉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증여, 선물.

 

우리는 그런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 그런 추구가 가라타니 고진이 이야기한 '생산-소비 협동조합'(428쪽)일 것이다.

 

노동자는 생산자이자 소비자이다. 생산자의 자리에 섰을 때 노동자는 '을'이되지만, 소비자의 자리에 섰을 때 노동자는 '갑'이 된다. 그런데 생산자의 자리에 섰을 때도 노동자가 '갑'이 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생계의 기로에 서지 않았을 때, 그의 자유의지로 노동을 선택할 수 있을 때다. 그럴 때 노동자는 '갑'의 위치에서 생산의 위치를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생계가 보장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소비자의 자리에 섰을 때 '갑'인 것처럼 느끼지만, 사실 지금 사회에서는 소비자의 위치에서도 노동자는 '을'이다. 자신이 욕망이라고 생각한 것이 자신의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의해 조작된 욕망이 내 욕망인 것처럼 들어와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소비조차도 '을'의 행위에 불과하게 된다.

 

이런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리가 누려야 할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인문학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8명이 등장한다.

 

이상, 짐멜; 보들레르, 벤야민; 투르니에, 부르디외; 유하, 보드리야르

 

돈에서, 도시로, 다시 아비투어로, 그리고 그 현란한 자본주의의 극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해야 할 우리들의 일로 내용은 이렇게 점점 넓고 깊게 전개가 된다.

 

마지막에 '선녀와 나무꾼'으로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넘어섰지만, 이제는 상징가치가 우세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 상징가치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증여, 즉 선물이라는 사실. 이것은 바로 '공동체'에서 가능한 일이고, 이러한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생산-소비 협동조합'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는 것.

 

바로 이 지점에서 기본소득이 연결이 되지 않을까 한다. 생계 문제에서 노동자가 벗어나게 하는 것. 그 때에서야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인문학적 성찰은 여유에서 올 수밖에 없으니, 정작 노동자에 대해서 글을 써도 노동자들이 읽을 시간이 없고, 읽지도 않고 오로지 지식인들만 읽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즉 노동자들에게 잠재성이 아닌 가능성을 사유하게 하려면 그들이 최소한 생계 문제에서는 벗어나야 한다는 것.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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