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부모 얼굴이 보고싶다 무대 위의 문학 1
하타사와 세이고.구도 치나쓰 지음, 추지나 옮김 / 다른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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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5년 전쯤에 우리나라에서 왕따, 집단 괴롭힘이 사회 문제가 되었다. 집단 생활을 하면 집단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그를 참지 못하고, 차이를 차별로 바꾸어 폭력으로 전환시킨 경우였다.

 

아마도 공동체가 무너지고, 집단의식보다는 개인의식이 대두했으며, IMF란 전대미문의 사태를 겪으면서 나만 잘 살면 돼라는 인식이 팽배해 지고 있던 모습이 학생들에게 내려와서 그렇게 된 것이리라.

 

지금은 좀 덜한데, 아직도 해결되지는 않았다. 학교마다 폭력과 따돌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고, 이것이 상당히 음성적이어서 발견하기도 힘들도 또 해결하기도 힘들다는데 문제가 있다.

 

여기에 이제는 학교에서뿐만이 아니라, 아니 학교에서는 좀 잠잠해졌는데, 연령대가 높아져 남자들의 경우에는 군대로 옮겨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아무렇지도 않게 조금 다르다고 해서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들이 지금 군대에서 너무 자주 보여지고, 그래서 힘도 없는 사람들은 자식들까지도 군대에 가서 고생을 하고, 힘있는 자들의 자식들은 군대에 가지 않거나 가더라도 가해자의 편에 서는 경우가 종종 언론에 보도되곤 한다.

 

관용. 배려. 차이를 인정함. 이런 자세들은 여유에서 오는데,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여유가 사라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학생들 역시 성적 스트레스로 여유를 잃고 있고, 군대에 간 남자들 역시 제대하고 살 길이 막막하긴 마찬가지니 여유가 없고, 여자들은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어려움에 처한 경우가 많으니, 나라 전체에 여유란 없다고 봐야 하니, 그 여유없음에서 차이를 인정할 수 있는 관용이 생길 리 없으니...

 

제목이 자극적이다.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우리는 아이들을 야단칠 때 흔히 부모까지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니네 부모가 이렇게 가르쳤니?" 이 말을 참으로 쉽게 하고 있지 않았던가.

 

아이들 교육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부모이니, 이런 말이 당연히 나온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소설은 이 점에 착안하여 내용이 전개된다.

 

학교는 명문 사립 여자중학교. 학비가 비싸고 학생들의 아르바이트가 금지될 정도의 보수적인 학교다.

 

여기서 한 여학생이 자살을 한다. 교실에서 목을 대달고 죽은 것. 최초 발견자는 담임 교사. 부임한 지 일년 정도된 신임 교사다.

 

이 정도는 어느 소설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왜 그랬을까를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되는데, 이 소설은 아니다. 아이들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부모들만 나온다.

 

아이가 죽은 뒤 제일 먼저 배달되어온 편지. 담임에게 온 편지. 그곳에 이름이 적힌 5명의 아이 부모가 소환된다.

 

여기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로지 부모들의 이야기가.

 

부모들의 직업이 다양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데, 이 중에는 교사인 부모들도 있다.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어쩌면 학교의 사정을 가장 알 아는.

 

하지만 내용은 정말 생각 밖으로 전개된다. 부모들은 한사코 아이들의 행위를 부정한다. 이들은 부인으로 일관한다. 그것이 아이를 위한다고 여기면서. 특히 교사인 부모가 더 그런 상황을 주도한다.

 

물론 도덕적으로 행동하자고 하는 부모(이 소설에서는 전직 경찰 출신인 할아버지다)도 있지만, 정의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는 교사인 학부모의 말에 대부분의 부모가 동의한다.

 

결론은?  읽어보면 알겠지만...

 

어쩌면 자기 자식들의 행위는 일단 부정하고든 부모의 마음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다른 자식의 죽음 앞에서도 자기 자식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부모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죽은 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했던 신문보급소 점장이 등장하여 한 마디 하지. 그게 바로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이다.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극으로 공연도 되었다고 하니, 이 소설은 술술 읽힌다. 대사를 중심으로 구성이 되어 있어서 소설이지만 연극적 요소가 곳곳에서 느껴진다.

 

그만큼 박진감도 있다.

 

그러나, 다 읽고 짙은 여운이 생긴다. 도대체 아이 키우기가 정말 힘들다고 하는데, 어떤 것이 아이를 제대로 키우는 걸까? 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 그것도 큰 잘못을 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소설과 비슷한 관점(?) 또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이창동 감독의 "시"란 영화다. 상황이 비슷한데, 결말은 다르다.

 

그래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다. 아이를 보면 그 부모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정말로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 그 아이가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지식으로, 궤변으로 자신을 합리화 해도 자기 앞에 있는 아이의 모습이 바로 자신이다. 부모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서는 굳이 아이를 등장시킬 필요가 없다. 부모를 통해서 아이를 볼 수 있고, 그 사건을 통해서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경어인(鏡於人)이라고 사람에 자신을 비추어보라고 한 말, 부모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비춰주는 거울이 바로 자식이다.

 

또 바로 자기 주변의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바로 자신이다. 그러니 남 탓 바 아니다. 바로 내 탓이다.

 

자, 정말로 커다란 잘못을 한 아이가 앞에 있다. 부모,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떤 것이 진정으로 아이를 위하는 것인가?

 

이 책은 학교에서 일어난 집단 괴롭힘 문제를 다루면서 이 질문을 하고 있다.

 

대답은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는.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닌, 어른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그런 질문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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