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나날들이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
이미 실시되고 있던 복지는 없던 일로 되돌리고, 없던 복지는 아예 없던 일로 하고, 안 해도 될 일은 굳이 하려고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현진건의 소설 제목처럼 '술 권하는 사회'가 되었으니, 술이나 마실 수밖에 없는 건지.
"삶창 101호"가 왔다.
반갑게 읽기 시작.
마음이 따스해지고 싶어서 빨리 손에 들었는데... 이거 더 우울하다. 즐거운 소식은 역시 없다.
삶이 보여야 하는데, 우리나라 곳곳에 펼쳐져 있는 가림막처럼, 아님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둠의 장벽인 지배 계층의 일들처럼, 삶은 어둠 저편에 있다.
어둠 저편에서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 삶창에 실린 내용들도 아직은 어둡다.
이 사회를 보여주는 거울같은 역할을 하는 삶창이니, 당연히 어두울 수밖에 없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럼에도 조금 따뜻할 수는 없을까?
비록 희망이 사람을 더 힘들게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희망이 사람을 살아가게 만들고 있듯이 삶창이 무언가 희망을 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 호에서 <오늘>이라는 주제로 쓰여진 글들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잘 짚어내고 있는데, 그게 참 우울한 단면이고, <공간과 환경>에서도 역시 우리 삶을 침해하고 있지만 적절히 대응하고 있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이 글에서는 삶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조금 희망을 가진다면 <다른 세상>에 나온 '공룡'이란 공동체 실험 이야기처럼 아직 희망을 지니고 다양한 삶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세월호에 관해 재판 결과가 나왔다. 그 결과를 두고 말들이 많다. 그 많은 말들 중에 정작 책임져야 할 사람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 이런 상황이 이번 삶창 101호에서 고병권의 글.
그가 <노동의 인문학>에서 이야기한 '왕에게는 아무 것도 희망하지 말라. 그에게는 단지 책임만을 물어라. 힘은 바로 당신에게 있다.'(83쪽)는 고병권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에게 시혜를 구걸하지 말라는 말, 그들이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은 시혜가 아니라 책임이라고, 우리는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힘없는 서발턴(하위 주체)들에게 책임을 묻는 왕에게 읍소하는 것이 아니라, 왕, 네가 책임져야 한다고, 책임자는 바로 너라고 당당하게, 힘있게 말해야 한다고 읽힌다.
이게 희망이다.
그럼에도 마음은 따스해지지 않는다.
이상하게 100호를 기점으로 삶창이 가슴에서 머리로 옮겨간 느낌이다. 삶을 살아가는 주체들의 이야기보다는 그런 주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글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마음을 울리는 글보다는 머리에 호소하는 글이 더 많다.
이게 삶창을 읽고 나서도 우울함이 가시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삶이 보이는 창, 마음을 울리는 글들이 나에게 삶을 보여주곤 했었는데, 그 점은 아쉽다.
그럼에도 논리적 사유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변화가 더 좋을 수도 있겠지.
덧글
이번 호에서 사실 마음이 가장 따스해진 글은 책 뒷표지에 실린 손별걸 시인의 글이다. 학생들이 쓴 시를 제비뽑기를 통해서 시상했다는. 시인들 답게 왜 아이들 시를 순위를 매겨야지 하는 생각, 그리고 제비뽑기를 통해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고, 뽑히지 않더라도 마음이 상하지 않는 그런 모습. 정말 따스하다.
예전 그리스에서는 추첨으로 지도자를 뽑기도 했다는데, 제비뽑기로 뽑은 지도자가 선거를 통해 뽑은 지도자보다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왜일까?
이런 따스한 글을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