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상 돌아가는 일을 보면서 다산 정약용이 생각났다.
그가 살았던 시대...
정조 집권기 희망에 불타던 시대. 무언가를 할 수 있었고, 하게 했던 시대. 그래서 꿈많은 젊은이들이, 능력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꿈을 펼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시대.
온갖 사상들이 들어오고, 실험되고 정치권에 반영이 되기도 하지만, 그런 사상들이 탄압을 받을 전조를 마련하기도 했던 시대.
그러다 곧 정조의 사망 이후 닥친 광풍의 시절...
꿈많던, 능력있던 사람들이 찬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가던 시대. 굳건하게 버티려고 하던 잎들을 일부러 날려버리던 시대.
다산은 두 시대를 견디어 내었다. 그는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또 밀려난 다음에는 집필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고 남겨두었다.
그런 그가 쓴 한시에는 시대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고, 그 시대를 건너가는 지식인의 삶이 온전히 드러나고 있다.
어떨 때는 그의 목소리가 걸러지지 않고 나타나기도 하고...
학창시절 배운 '적성촌에서'나 '애절양' 말고, 다산의 한시집을 다시 읽으니 마음에 쏙 들어오는 시들이 있다. 물론 한시를 읽어낼 능력이 없어서 번역한 한시집을 읽었지만 말이다.
한문으로 읽지 않아도 그 마음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그리고 다산은 지금의 나에게 묻는다.
네가 사는 시대는 어떤가? 설마 나와 같은 시대는 아니지? 나와 같이 이런 노래들을 부르는 시대는 아니지, 아니지? 아니지! 아니지...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해야 하는데, 왜 그런 말을 할 자신이 없지. 왜 자꾸 다산이 떠오르지. 그가 살았던 시대가 떠오르지. 그의 시대와 지금 시대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왜 들지.
그가 견디어 내어야 했던 그 시대가!
다산이 쓴 시 세 편을 보자... 과연 지금과 다른지.
남의 것 본뜨기에만 정신 없으니
슬퍼라, 우리나라 사람들이여
자루 속에 갇힌 듯 너무 외져라.
삼면은 바다로 둘러싸이고
북쪽엔 높은 산이 주름졌어라.
팔, 다리가 언제나 굽어 있으니
큰뜻이 있다 한들 무엇으로 채울 건가.
성현께선 만리 밖 먼 곳에 계시니
그 누가 이 어둠을 열어 주려나.
머리 들어 인간세상 바라다봐도
밝은 마음 가진 사람 보기 드물고,
남의 것 본뜨기에만 정신 없으니
정성껏 자기 몸 닦을 틈이 없어라.
무리들이 어리석어 바보 하나 떠받들고
야단스레 다같이 숭배케 하니,
질박하고 옛스런 단군 세상의
그 시절 옛 풍습만 못한 듯해라.
한국의 한시 17. 다산 정약용 시선, 허경진 옮김. 평민사. 2008년 초판 8쇄. 28쪽
지구화 시대... 우리는 아직도 다산이 한탄한 그런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고...
그래도 다산 시대는 한반도가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남북으로 갈려 육로로 대륙으로 진출할 길이 막혀 있으니, 다산 시대보다 더 못한가...
다음 시.
고관집 아들
고관집 대문 안에 아이가 태어나면
땅에 떨어지자마자 당장 귀한 몸 되네.
아이 때부터 아랫사람 꾸짖는 법을 가르치니
총각이 되면 벌써 오만스레 고갤 세우네.
아첨하는 식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팔찌도 걷어 주고 버선까지 신겨 주네.
잠자리서 너무 일찍 일어나지 못하게 하니
아들이 병이라도 날까 두려워서라네.
높은 벼슬 저절로 굴러들테니
애써가며 글공부 쌓지도 않네.
그 아이가 자라더니 과연 드날려
말 탄 채로 대궐에 들어가더라.
말 달리는 게 마치 나는 용 같아
네 다리가 하나도 땅에 닿지 않더라.
한국의 한시 17. 다산 정약용 시선, 허경진 옮김. 평민사. 2008년 초판 8쇄. 65쪽
지금 서울대 입학생들의 가정환경을 조사해보면 이 시에 나타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굳이 서울대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재계, 정치계에서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이런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옛말이 되어 버렸다고 한탄하는 소리도 들리고.
이런 사회에서 지식인은 어떨까? 세상을 변혁하고 싶은데, 할 수는 없고, 오히려 자신은 멀리 쫓겨나 버린 상태. '비정상의 정상화'가 아니라 '정상의 비정상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하는데...
근심에 쌓여
어렸을 땐 성인(聖人) 배울 생각했었고
중년 들며 점차로 현인(賢人)이라도 바랐어라
늙어 가며 우하(愚下)도 달게 여겼지만
근심에 싸여서 잠들 수 없어라.
한 알의 야광주가
장삿배게 실렸다가
바다 복판서 바람 만나 가라앉으니
만고에 그 빛이 빛날 수 없어라.
취하여 북산에 올라 통곡을 하니
울음소리 푸른 하늘 끝까지 닿았네.
옆 사람들 내 뜻을 알지 못하고
내 한몸 궁박해서 운다고 하네.
술 취해 정신 없는 사람들 속에
몸가짐 단정한 선비가 있네.
모두들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이 사람만 미쳤다고 몰아세운다네.
한국의 한시 17. 다산 정약용 시선, 허경진 옮김. 평민사. 2008년 초판 8쇄. 120-121쪽
답답하다. 다산이 다시 이 시대에 와도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겠지.
하지만 세상엔 이런 미친 사람 대접받는 사람들에 의해 바뀐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게 역사의 법칙이다. 우리 인간이 걸어온 길이고, 걸어갈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