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의 벽 - 서울대 교수진이 추천하는 통합 논술 휴이넘 교과서 한국문학
이청준 지음, 이관수 그림, 방민호 논술, 조남현 감수 / 휴이넘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소문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을 가장해 우리에게 다가올 뿐이다. 소문이 사실로 밝혀지면 그 때부터는 소문이 아니다. 그냥 사실이다. 그래서 소문은 무섭다. 진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면서도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여기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소문이 벽을 쌓으면 진실은 소문에 가려져 나올 수가 없게 된다. 올바른 진술들은 소문 속에 묻혀 버리고, 진술은 소문의 벽을 넘을 수 없게 된다.

 

소문의 벽을 넘지 못한 진술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응어리가 된다. 한이 된다. 그래서 진술을 하지 못한 사람... 그는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소문에 휩싸여 자신도 또 하나의 소문이 되어 소문의 벽을 더욱 단단하게 쌓아주는 역할을 하던지.

 

이런 소문을 제목으로 삼은 이 이청준의 소설은 읽을 만하다. 재미있기도 하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도 한다. 내가 우리나라 작가들 중에서 좋아하는 작가인 최인훈과 더불어 한 때 이청준의 소설을 무작정 사서 읽은 적이 있었다. 그의 전 작품을 읽지는 못했지만 꽤 읽었는데...

 

이 작품 "소문의 벽"은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가물가물한데, 요즘에 신문에서도 가끔 인용이 되곤 해서 다시 읽어보게 된 작품이다. 읽으면서 아무리 기억이 나빠졌다고 해도 몇 장을 읽으면 이 작품은 읽은 작품이다 아니다를 판명할 수 있으니, 이 작품은 읽지 않은 작품이 확실하다. 그냥 어디선가 줄거리를 보았든지, 아니면 이야기를 들었나 보다.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논술과 연결지어 이 작품을 출판한 이 책은 작품을 읽는 재미와 그 작품에 대한 간략한 해설로 학생들의 이해를 돕고 있으며 논술 활동도 곁들여서 나름대로 학생들에게는 유익한 편제를 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문의 벽" 이 작품을 지금 읽은 이유는 단 하나. 소문 때문이다. 소문을 조금 안 좋은 감정이 담겨 있는 용어로 바꾸면 유언비어인데... 지금 이 참혹한 시기에 정부에서는 연일 유언비어를 배포한 자는 엄벌에 처한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유언비어란 것이, 소문이라는 것이 진술로 대표되는 진실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을 때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것이라고 할 때 지금 이 시기에 여러 유언비어들이 퍼지고 있다는 얘기는 무언가가 있는데, 분명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진실을 알려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유언비어 유포를 엄벌에 처한다고 하면 그것은 네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라는 얘기밖에는 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오히려 소문을 조장하여 올바르지 않은 소문의 벽을 쌓아 진실이 이야기되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소문은 나돌대로 나돌아 검증이 되면 어떤 소문은 사실로, 어떤 소문은 허황된 말로 판명이 된다. 그렇게 놓아두어야 소문의 벽을 쌓지 않는다.

 

이 작품에는 세 가지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것을 중심으로 작품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등장인물인 박준이 주인공이 다니는 잡지사에 투고한 소설 작품. 또 하나는 박준이 기자와 인터뷰한 내용의 글. 마지막으로는 박준이 마지막으로 쓴 장편소설.

 

이 세 진술은 서로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용들이 박준이라는 사람, 거짓으로 미친 척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미쳐버릴 수밖에 없는 인물인 그를 이야기해주는 열쇠가 된다. 그리고 이 열쇠를 바탕으로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나는 자신의 진실을 발견한다.

 

그는 작가란 정체가 보이지 않는 불빛의 공포를 견디면서도 끝끝내 자기의 진술을 계속해 나가여 하는 운명을 짊어진 사람들이라고 했다. (147쪽)

 

이 구절은 박준이 기자와 인터뷰한 내용이다. 작가란 결국 진실을 이야기해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이 말. 이것은 이 소설이 1971년에 발표가 되었으니 바로 그 시대의 현실에서 작가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간접적으로 나타낸 말이라고 하겠다.

 

즉, 이 구절은 박준의 말을 빌리고 있지만 실제로 작가인 이청준이 하고 싶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점점 독재가 심해지고 있던 시절, 유신을 앞두고 있던 시절, 그리고 언론이, 말들이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던 시절, 그 시절에 작가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낸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침묵했던 작가들, 그들은 이 소설의 박준처럼 미치거나 아니면 아예 자신의 말을 하지 못하고 남의 말만을 따라해야 하는 앵무새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작품을 투고해도 발표가 되지 않는 현실에서 박준은 미칠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정신병원에 스스로 갔다고 표현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정말로 미치지 않았다면 미친 척이라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준은 자신의 장편에서 이런 표현을 한다. 한 밤중에 사람들이 쳐들어온다. 그들은 불빛을 비추면서 어느 쪽인지를 선택하게 한다. 자신들은 불빛의 뒤에 있어 보이지 않으면서 보이는 그들에게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선택하게 한다. 한 순간의 선택이 운명을 가른다. 그런데 선택할 수 있는 판단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대답을 강요당하는 현실.

 

6·25때 일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6·25에 국한되지 않는다. 박준이 병원을 탈출하는 것처럼 그에게는 병원의 의사도 바로 이런 전등의 뒤에 숨어서 자신에게 진술을 강요하는 사람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사회에도 적용이 된다. 자신들은 보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선택하게 하는 것. 그 선택에 운명을 걸게 하는 것. 그런 사회.. 진실이 가려진 사회다. 이런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바로 전등의 뒤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소문이다. 이 소문이 벽을 쌓고 사람들에게 다른 쪽을 알지 못하게 한다. 다른 쪽을 보는 사람을, 다른 쪽에 관심을 두는 사람을 배제하려고 한다.

 

이 소문의 벽을 깨는 것은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진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몫은 바로 작가의 몫이다. 그런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 소문의 벽이 높지 않은가. 우리 역시 아직도 이런 소문의 벽 뒤에서 우리에게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강요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참혹한 시기... 소문이 소문을 낳고 있는데... 이런 소문의 벽을 없애는 방법은 또 다른 소문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진술(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진실은 가둘 수 없기에 진실을 이야기함으로써 소문의 벽을 허물어뜨려야 한다. 그래야 박준처럼 미치지 않고 이 세상을 견뎌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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