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 전체의 이미지는 시각이다. 제목인 "춤"부터 보아도 이미 시각적 이미지가 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에서도 빛과 색깔이 등장한다. 색깔이 빛의 형상이라면 그는 빛에 집중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시집을 여는 시의 제목도 '빛의 소묘'이다. 그만큼 시인은 빛에 관심이 많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빛 가운데서도 그는 이상하게 스러져 가는 빛이거나 갓 나타난 빛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런 시들이 많다. 전체적으로 외워야지 하는 시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도 이런 데서 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빛에는 온기가 없다. 온기라는 말이 이상하면 '열'이 없다. 즉, 그의 시집에 나오는 빛들은 빛으로 끝난다. 빛이 '볕'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빛'이 '볕'으로 나아가지 않는 상태. 그것은 그냥 보기에만 좋을 뿐이다. 우리의 삶에서 오히려 보기에 좋아서 고통일 수밖에 없는 순간일 수도 있다.

 

사람들의 삶에는 '빛'이 '볕'으로 전환되어야 살만하다고 느낄테니 말이다.

 

그래서 이 시집을 읽으며 보기에만 좋음이 얼마나 우리를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깔끔한 모습, 단정한 모습, 단아한 목소리. 언제 보아도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 보기에 참 좋지만, 그 모습에 사람다움이 없다면, 따스함이 없다면 거리만 느낄 뿐이다.

 

함께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없는 사람. 지향을 하지만, 결코 함께는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것이 바로 '볕'이 되지 못한 '빛'의 한계다.

 

훌륭한 지도자는 그래서 '빛'이 되기보다는 '볕'이 되어야 한다. 사람에게 다가와 눈부시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따스하게 덥혀줄 줄 알아야 한다. 덥혀주어야 한다.

 

밝음에 따스함이 없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더 힘들게 할 뿐이다. 그런 지도자는 멀리서 바라볼 때만 좋다. 가까이에 있으면 주변에 있는 사람을 힘들게만 한다.

 

왜 이 시집을 읽으면서 '볕'이 되지 못한 '빛'의 이야기를 생각했는지는 모른다. 이상하게도 이 시집을 읽으면서 밝기는 있되, 온기는 없는 그런 '빛'만을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볕'이 그리웠을 뿐이다.

 

정치는 '빛'이 아니라 '볕'임을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다. 나는 화려하고 밝은 '빛'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따스하게 만들어줄 '볕'을 그리워하고 있을 뿐임을 이 시집을 통해서 느꼈을 뿐이다. 왜 그런지는 모른 채...

 

어쩌면 지금의 정치가 '빛'에만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말은 화려하다. 참으로 화려하다. 정치인들의 말을 들으면 세상이 이만큼 좋을 수가 없다.

 

화려한 말들. 국민을 걱정하는 말들. 그리고 너무도 깔끔하게 보이는 외모들. 그 수사들 속에는 이상하게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은 '빛'으로만 보인다. 나는 그들에게 '볕'을 바라는데 말이다.

 

사실, 이 시집에는 따스한 시선을 담은 시들도 많다. 그럼에도 이렇게 느낀 것은 내가 읽고 싶은 대로 읽고 느끼고 싶은 대로 느낀 시집을 제멋대로 해석한 '오독'의 대표적인 예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모든 글은 오독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이 시집을 통해 '볕'을 그리워하는 나를 발견한 것에 위안을 삼는다.

 

마음에 드는 시는 '얼음 계곡'(83-85쪽)이라는 시인데, 프로스트의 '두 갈래 길'을 연상시키는 시다. 하지만 이 시보다도 더 마음에 남아 있는 시... '지평(地平)'

 

地平

 

석유를 먹고 온몸에 수포가 잡혔다. / 옴팍집에 살 때였다.

아버지 등에 업혀 캄캄한 / 빈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읍내의 병원은 멀어, / 겨울바람이 수수깡 속처럼 울었다.

들판의 어디쯤에서였을까, / 아버지는 나를 둥근 돌 위에 얹어놓고

목의 땀을 씻어내리고 있었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그 풍경을 / 실제라고 믿고 살았다.

삶이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 들판에 솟아 있는 흰 돌을

빈 터처럼 간직하며 견뎠다. / 마흔을 앞에 두고 나는 이제 그것이,

내 환각이 만들어낸 도피처라는 것을 안다.

 

달빛에 바쳐진 아이라고, / 끝없는 들판에서 나는

아버지를 이야기 속에 가둬 / 내 설화를 창조하였다.

호롱불에 위험하게 흔들리던 / 옴팍집 흙벽에는 석유처럼 가계(家系)가

속절없이 타올랐다. / 지평을 향한 생(生)이 만든

겨울밤의 환각.

 

박형준, 춤. 창비. 2005년 초판. 26-27쪽

 

지평, 늘 가까이에 있는 것 같지만, 다가가고 다가가도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늘 보인다. 이것이 바로 삶이다. 볕이 없는 삶. 그런 삶은 환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

 

내 삶의 지평은 어디인가. 나는 그 지평의 어디쯤에선가 하나의 바위를 만들어놓고, 가끔은 쉬고 있지 않은가. 그 바위는 내 스스로도 만들지만, 누군가가 만들어줄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내 삶을 '빛'에서 '볕'으로 비춰주고 있는 사람 아니겠는가.

 

내 삶이 유지되는 일이 내 곁에 있는 그런 '볕'같은 사람 덕분이듯이,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그런 '볕'같은 정치가는 어디에 있을지... 우리는 저 지평의 끝에 그런 정치가를 우리가 쉴 수 있는 바위처럼 창조해야 하지 않을까...

 

이 시집을 읽으며 한 공상...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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