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의 시대 - 유동하는 현대사회의 문화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윤태준 옮김 / 오월의봄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사회학자라고 해야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 최근에 우리나라에 엄청나게 소개되고 있는 학자이고, 나 역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학자들이 많으련만, 자꾸 외국학자에게 눈이 가는 이유는, 아무래도 우리나라 문화를 멀리서, 좀 떨어뜨려 놓고 보고 싶은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유행의 시대라고 제목을 붙였지만, 책에 있는 영어 식의 제목에 의한 번역에 따르면 '유동하는 현대사회의 문화'이다.  '유동하는 현대 사회'를 '액체 근대'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액체 현대'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지금을 이야기하는, 1900년대부터 2000년대를 '모던'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한다고 보면 별 문제는 없는 번역일텐데... 각 출판사나 번역가들이 하나로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현대 사회의 문화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는데... 여러 글들이 모여 하나의 책을 이루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문화'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의 핵심을 바로 이 구절이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들의 모든 의심과 저항이 하나의 흐름으로 함께 흘러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만 있다면, 탄압받는 사람 하나하나가 각자 개별적으로 한 가지 유형의 억압만 따로 떼어 해결하려 단독으로 노력하며 다른 불행한 사람들도 똑같이 하고 있을지 의심스럽게 바라보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여러 감정의 흐름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배출되도록 유도하고, 분해하고, 흩어버려서 많은 부족과 공동체가 하나로 뭉쳐서 저항하는 에너지를 소진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법의 수호자들은 공정한 중재자의 옷을 입고 집단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대변자이자 평화로운 공존의 전도사로서 모든 반목과 상호 파괴적인 전쟁을 끝내는 데 헌신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적개심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 상황을 가져온 그들 원래의 역할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침묵 속에 잠들 것이다. (64쪽)

 

어떤 문화에 대한 글이든 결국은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 관한 글일테니, 문화가 계몽으로 작동을 하든, 지배로 작동을 하든, 또는 소비를 작동으로 하든, 문화는 우리의 삶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 문화를 이러한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식으로 운영을 하는 것이 지배층의 전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유행이라는 것도 다양한 집단을 하나로 묶는다기보다는 다양한 집단을 각기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자꾸만 분산시킴으로써 하나로 뭉치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된다.  역시 마찬가지로 자본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에는 '예술'도 역시 자본의 지배하에 들어가 자본의 취향에 맞게 변형, 구분, 분할되어 존재하게 되고, 이러한 문화들은 실생활과 동떨어지게 된다.

 

전체적인 내용보다는 인용한 구절에 집중을 하면,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볼 수가 있게 된다. 상당히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지금 우리는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들의 모든 의심과 저항이 하나의 흐름으로 함께 흘러가지' 못하고 있으며, 이들은 각자의 불행에만 치중할 뿐, 다른 이들의 불행은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지 않은가.

 

미국산 소고기 수입부터, 한미 FTA, 4대강 사업, 강정마을, 밀양 송전탑, 철도 파업, 여기에 최근에는 특정 방송사 징계까지... 많은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이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계되지 못하고 있다.

 

정말로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명제가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각기 불행할 뿐이다.

 

얼마나 통렬한 통찰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통찰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유행이 하나의 흐름으로 집단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 같지만, 사실 유행은 지극히 개별화되고 펴현화된 움직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행의 창출에 성공했기에 사람들은 전체의 흐름을 볼 수 없게 되었고, 그에 따라 자신의 불행만을 보고, 남의 불행은 보지 못하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가령 철도파업으로 사람들의 출퇴근과 이동이 불편해지고 있다. 방송은 이 점을 중점적으로 방송하고 있다. 즉, 나의 불편함을 불행으로 치환하여 호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러한 불편함으로 인해서 생존이 달린 불행에 처한 사람들과 구별짓기(부르디외의 용어)를 하고 있다.

 

즉 나의 불편함과 그들의 불행을 등가교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고 있기에, 내가 불행을 당할 때 그들도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유동하는 현대 사회의 문화가 지니고 있는 불행이다.

 

이러한 일을 바우만은 '문화적 다원주의'라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다른 문화를 인정하는 '다원주의'가 아니라,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다름을 배제하고, 관심을 끊는 그런 문화적 상대주의를 일컫고 있는 것이다.

 

저것은 내 일이 아니야.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공연히 간섭할 필요 없어. 이렇게 규정 짓는 순간, 이것은 '문화적 다원주의'를 표방한 또하나의 억압이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온다.

 

하여,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는 '타인의 존재를 무관심하게 잊어버리지 않고, '자기와 관계 없는 일에 끼어들(69쪽)'어야 한다. 이것은 힘든 일이고, 자신에게는 엄청난 모험이겠지만, 적어도 지식인은 이래야 한다고 바우만은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이게 단순히 지식인만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지 않은가.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던 말...  니믈러 목사의 말이라고 하는데... 행 갈이를 하면 시가 되는 그런 말.

 

이 말은 바우만이 말한 앞서 인용한 글과 통한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에게도 경종을 울리는 말이다.

 

나치가 공산당원을 잡으러 왔다. 난 침묵했다 난 공산당원이 아니기때문에. 다시 나치는 유태인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때도 난 침묵했다. 난 유태인이 아니기때문에. 시간이 흘러 나치는 다시 천주교인을 잡아들이기 시작했지만, 난 또 침묵했다. 난 개신교도인이기때문애. 마침내 나치가 나를 잡으러 왔다. 그러나 내 주변엔 날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나치주의자들만이 남아 있었다.

 

덧글

 

번역자도 역자의 말에서 말하고 있듯이 문장이 참으로 만연체다. 그래서 글의 핵심을 놓치지 일쑤다. 바우만의 문체가 그렇다고 하고,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그는 그의 언어로 유려하게 표현했다고 하지만, 우리 말로 옮길 때에는 우리말에 맞게 좀 다듬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은 역자도 했지만, 역시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힘든 작업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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