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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 ㅣ 유동하는 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한상석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10월
평점 :
지그문트 바우만이 쓴 책 중에 내가 두 번째로 읽은 책. 그가 갑자기(?) 우리나라에 소개되었고, 그의 저작들이 물밀듯이 번역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만 10여 권이 넘으니, 지금 우리나라는 바우만 열풍이라고 할 수도 있다.
바우만이 쓴 책 중 처음으로 읽은 책이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였는데, 지속적으로 불평등 지수가 높아지고 있음에도 우리가 불평등을 감수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사회가 있다는 식으로 이해했는데...
이 책도 역시 "개인"이다. 지구화된 시대에 오히려 사람들의 삶은 "개인화"되었다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소통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더욱 많이 늘어났으나, 그것은 기회에 불과할 뿐이고, 오히려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서 담을 쌓고 있는 현실이라고 한다.
하여 이 책의 제목은 우리말로 번역된 것만 들면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다.
'유동하는 세계', 이는 흐르는 세계라고 해도 좋고, 급격하게 변하는 세계라고 해도 좋다. 또는 고정적인 장소를 잃어버린 세계라고 해도 좋다. 오히려 고정적인 장소를 잃어버리고, 순간순간적으로 머무는 공간만 존재하는 세계라고 해도 좋겠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장소를 잃고 낯선 공간에 내던져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경제학 용어로는 노동유연성이라고 하고, 자본의 초국적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노동유연성이라는 말이 다른 말로 바꾸면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뜻이고, 초국적성이라는 것은 이윤을 위해서라면 어디로든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자본이라는 뜻인데, 노동자로 대표되는 사람은 장소성을 잃고, 자본은 장소성을 버리는 상태.
하여 세상은 끊임없이 유동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유동성은 불안과 공포를 조장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생활이 아니라 생존이 문제가 되고, 이러한 생존에 장소를 잃은 사람들이 위협을 가한다는 선전이 행해진다.
즉 유동하는 세계에서는 바로 이곳이 지옥이 되는 것이고, 이 지옥은 다른 말로 유토피아에 다름 아니다. 결국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세계, 벗어나고자 하는 세계에 불과하다고 한다.
지구화란 말을 쓰지만 오히려 더 개인화된 사회에서는 남에 대한 공포 두려움이 조장이 되고, 이러한 두려움은 자신들을 보호하는 장벽을 쌓게 마련인데, 이 장벽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공간이 바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또 도시민들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낯선 이방인들이 자신에게 침입해 들어오지 않도록 담장을 높이, 문을 꼭꼭, 게다가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 경비실을 설치해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것도 모자라, 아파트 동 건물에는 비밀장치를 한 잠금장치를 해서 다른 사람들이 아예 들어올 수 없게 만들어 놓고 있으며, 택배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하여 함부로 문을 열지 말라는 경고성 방송을 하고 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차량에도 우리는 블랙박스라는 감시 카메라를 달고 있지 않은가. 사회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해결하라고 하는, 그렇지 않으면 피해는 고스란히 너에게 돌아간다는.
역시 마찬가지로 사회 구조적인 문제는 내버려두고 범죄 예방을 위해서 감시카메라를 더 많이 설치 해야 한다는 그런 발상들만이 판치고 있는 세상이 아니던가.
바우만은 이 책에서 세 가지의 사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사냥터지기의 사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원사의 세계, 그리고 마지막은 사냥꾼의 세계.
사냥터지기는 사냥터로 대표되는 자연을 훼손하려 하지 않는다. 또한 자기 뜻대로 그곳을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그곳이 지켜지길 바란다. 하여 그는 그 곳을 망가뜨리는 행위를 막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런 일에 자신의 삶을 바친다. 이것은 과거의 세상이라고 할 만하다. 적어도 근대에 들어서서는 인간은 자연을 그냥 내버려두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째 사회로 넘어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정원사의 세계이다. 정원사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있다. 그 모습대로 사회를 가꾸어가려고 한다. 사회에 대한 밑그림이 있다면 그 밑그림대로 사회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과도 같다. 바로 근대의 인간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바로 유토피아라고 했으며, 그런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들이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있다는 생각에 의문이 들었다. 과연 이것이 유토피아인가. 무언가 잘못되지 않았던가.
유토피아를 건설한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런 삶이 사냥꾼의 삶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냥꾼의 삶은 미래를 내다보지 않으며, 현재에서도 오직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하다. 바로 '지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지옥,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세계 '유동하는 세계'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우만은 이탈로 칼비노가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카르코 폴로의 말이라고 한 말을 인용한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끊임없는 경각심이 필요하고 불안이 따르는 위험한 길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 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174쪽)
이 말에 이어 자신의 말을 한다.
'다수'는 '다수에게 쉬운' 전략을 선택할 것이며, 결국 그 사회의 일부가 되어 더 이상 그 사회의 괴상한 논리에 어리둥절해 하거나, 어디서나 제시되는 강압적이고 대체로 허무맹랑한 요구에도 자극받지 않을 것(174-175쪽)이라고 하고, '누가 그리고 무엇이 지옥이 아닌지'를 알아내려고 고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들이 고집스럽게 '지옥'이라고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야만 할 것이라는 점(175쪽)이라고.
우리 사회도 많이도 파편화되었고, 수많은 위험들이 과장되어 우리 앞에 전달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두려움에 빠져 있으며, 그런 위험들을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옥'이다.
함께 할 수 있음을, 두려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우칠 때 우리는 이러한 유동하는 세계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바우만이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