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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7월
평점 :
우리나라에서 논란이 되었던 작품이다. 청소년에게 읽힐까 말까 가지고. 사람들이야 당연히 읽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세상에 책을 읽는데도 나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이 우습기도 하지만.. 간행물 윤리위원회의 생각은 좀 달랐나 보다. 그들은 이 책이 청소년에게 유해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청소년에게는 판매를 금지해야 한다고 했다. 참...
그 이유가 작품에 선정적인 내용, 즉 정사 장면이 나온다는 것인데... 성은 우리가 감추어야 할 것이 아니라 드러내야 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끼리 궁극으로 가는 것이 성인데... 불륜이라서? 아니면 청소년과의 성관계 때문에? 작품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어쩌면 이러한 성관계를 드러낸 작품이라서가 아니라 아나키즘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억측도 하게 되는데... 아나키즘은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어떤 사상에서도 배척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파괴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모든 권위를 거부하는 그 사상은 인간의 자율성과 상호협동성을 믿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파괴적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다. 비록 공상적이라고 비판을 받을지라도.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아버지의 글을 토대로 아들이 작성한 내용을 다른 만화가가 그림으로 그린 책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아버지의 삶을 아버지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고자 한다. 그래서 주인공 '나'는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 자신이고, 아나키즘에 빠져있던,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시류에 타협도 하고, 자신의 사상과 멀어지지만, 그 사상을 기억하고 있는 한 아나키스트이다.
만화로 그려졌기 때문에 읽기 편하다는 장점도 있고, 쉽게 누구에게나 다가설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또 연대기 형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자서전을 읽는 느낌도 받을 수 있는 책이다.
요양원에 있던 아버지가 5층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에서 이 책은 시작한다. 즉,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한다. 영욕의 삶. 마지못해 이어져오던 그 생명의 끈을 자신이 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날기 위해서 그는 떨어진다.
이 떨어짐 이후 아들은 아버지의 삶을 재구성한다. 어린 시절 지긋지긋했던 시골 생활. 도덕적이지도 가족적이지도 않은 시골생활. 첫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도시를 동경해 도시로 떠나지만, 도시에서도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하는데... 격동의 세월이 되면서 프랑코 정권, 팔랑헤 당원들이 스페인을 물들일 때 공화파에 서겠다는 결심을 하고 탈출을 하여 공화파에 합류하여 활동하는 과정.
그 과정에서 아나키스트들과 활동을 한다. 네 명이서 사총사라던지, 납탄동맹이라고 하면서 우애있는 만남을 유지하는데... 나중에 한 사람은 싸움터에서 죽고, 한 사람은 변절해서 다시 마피아로 돌아갔다고 추측이 되고, 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어버리는데... 이제 남은 주인공은 삶의 마지막에서 이들을 꿈속에서 만나 자신의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스스로 삶을 마치기로 하는데...
1930년대 스페인에서의 아나키스트들의 활동, 그리고 그들의 신념이 어떻게 무너져 가는가를 너무나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자유,평등, 박애를 주장하던 프랑스가 이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이들이 프랑코 정권의 긴긴 독재 속에서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만화는 잘 보여주고 있다.
청년기의 혁명정신이 서서히 사그러지고, 이제는 현실만 남았는데.. 그 현실도 지긋지긋하게 더러운 현실, 견디기 힘든 현실이 되는 그런 과정.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마도 하나밖에 없었으리라.
이를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대입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스페인의 과거와 우리의 과거가, 지금 우리의 현재가 닮아 있지는 않은지.
혁명을 논하고, 민주를 논하고, 평화를 논하고, 통일을 논하던 그 젊던 영혼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삶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고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고 세속의 행복을 추구하거나, 과거와는 정반대로 살고는 있지 않은지...
젊은 시절 혁명성을, 그 순수성을 조금이라도 간직한 사람이 지금 이 시대를 얼마나 견디기 힘들어하는지를 이 책에서는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민주화를 이루는데 공헌을 했지만, 민주화 이후 그들은... 아니 우리들은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을 계속 추구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하고 있다.
그래, 이 책은 단순히 과거 스페인에서 있었던 한 아나키스트의 생애를 보여주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지금 우리에게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라고 하는 책이다.
한 아나키스트의 좌절을 보면서 그래,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저렇게 무모한 일이야 할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 아직도 실현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누구나 읽어야 한다. 단지 몇몇 장면 때문에 누구는 읽어서는 안 되는 그런 책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