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흐리다. 오전에 비가 오더니, 한 때 해가 제 얼굴을 내밀어 존재를 보여주더니, 다시 구름에 가려 우중충하다.
춘래불사춘이라고, 봄은 봄이되 봄 같지 않다는 말을 달고 사는 요즘, 이 놈의 날씨가 왜 이래 하는 마음에 들고 있으니...
비가 내리면 땅이 촉촉해지고, 더불어 마음도 촉촉해지는데, 이번 봄비는 그런 마음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자연과 사회와 사람이 어울리는 그런 삶이 된다면 좋겠는데, 자연은 자연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도 봄은 온다. 봄비는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세상이 어둡고 힘들다 해도, 봄비는 다른 생명체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런 봄비같은 사람, 봄비같은 사회, 그립다.
공기가 무거워지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무언가 책을 읽고 싶어진다. 시집을 꺼내든다.
우연히 고른 시집이 날씨와 맞아떨어지는 때가 있는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 평소에 시인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망설이지 않고 뽑았던 시집인데, 내용이 봄과 많이 연결이 된다.
요즘 시류와도 연결이 된다.
세상이 달라졌다
세상이 달라졌다
저항은 영원히 우리들의 몫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저항은 어떤 이들에겐 밥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되었지만
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
세상은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는 벗들도 말수가 적어졌고
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로 사라진
뜨거운 여름 낮의 한때처럼
세상은 한결 고요해졌다
정희성, 시를 찾아서, 창작과비평사, 2001년 초판. 41쪽
그래 세상은 달라졌다. 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했던 때를 지나 이제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데, 힘있는 자들이 그런 법은 안된다고 저항을 한다.
과연 세상이 고요해졌을까. 정말 저항해야 할 사람들이 침묵하고, 정작 침묵해야 할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세상이 좋은 세상일까?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똑같은 사람이 된다.
굳이 니체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괴물과 싸우는 우리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이 때 이 시집의 시 시가 떠올랐다.
첫 고백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삼십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 보니
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
이제는 내 자신도 미워져서
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신부님 앞에 가서 고백했더니
신부님이 집에 가서 주기도문 열번을 외우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
그냥 그대로 했다
정희성, 시를 찾아서, 창작과비평사, 2001년 초판. 32쪽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린이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오죽했으면 니체조차도 낙타의 단계와 사자의 단계를 지나 어린이의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고 했겠는가. 어린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봄이다. 봄은 어린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약동하는 힘을, 미워하지 않는 사랑을, 물들지 않은 순수함을, 망설이지 않는 추진력을 준다.
지금 이 봄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와야 하는데...이런 봄, 마음을 울리는, 마음을 촉촉하게 해주는 시 한 편.
사랑
사랑아 나는 눈이 멀었다
멀어서
비로소 그대가 보인다
그러나 사랑아
나도 죄를 짓고 싶다
바람 몰래 꽃잎 만나고 오듯
참 맑은 시냇물에 봄비 설레듯
정희성, 시를 찾아서, 창작과비평사, 2001년 초판. 33쪽
이런 사랑. 봄에 하는 사랑. 그것이 자연에 대한 사랑이든, 사회에 대한 사랑이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든, 눈 먼 사랑, 눈이 멀어서 비로소 보이는 사랑.
봄... 비 내리는 밖을 보며 든 생각들... 시들...
시인은 "시를 찾아서"라고 했다.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면서 "봄을 찾아서"이다.
내 봄을 찾아서 시집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