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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지는 없다 -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
샘 해리스 지음, 배현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신은 죽었다"라는 말만큼이나 도발적이다. 신을 광범위하게 믿고 있던 시대에 니체가 던진 이 말은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을텐데...
신의 존재 증명과 더불어 인간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느냐 하는 문제도 역시 계속되는 논란거리다. 어떤 이는 인간은 단순한 물질적 존재일뿐이라고 하고(일원론), 어떤 이는 인간은 물질과 정신으로이루어졌다고 하고(이원론), 이 중에서도 물질(육체)가 더 큰 작용을 한다는 사람도 있고, 아니 정신(영혼)이 더 큰 작용을 한다는 사람도 있다.
무엇이 옳은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와 통하게 되는데, 사후세계에 대한 그 많은 이야기들 중에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과 또는 죽음이란 무엇이냐라는 질문과도 통하는 해결하기 어려운, 어쩌면 해결할 수 없는, 또는 해결해서는 안되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비슷한 질문이 더해졌다. "자유의지는 없다"는 주장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인간은 물질적 존재일뿐이라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은 당연한 주장에 불과하리라. 인간의 모든 행동은 뇌 활동의 결과이며, 뇌 활동은 여러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결합되어 이루어지고, 그러한 차원에서 우리가 정신이라고 하는 생각하는 활동도 이루어진다고 하니, 우리의 생각, 의지, 행동은 결국 뇌의 활동을 밝히면 되는 일이라고 주장하니 말이다.
행동을 고칠 때, "그건 네 의지에 달렸어."라는 말보다는, 뇌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활동했느냐를 따져 뇌를 치유하면 된다는 주장, 그것이 인간은 물질적 존재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니, 그런 사람들에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게 들릴 수도 있겠다.
반면에 인간은 정신적 존재라고 하는 사람들, 아니면 정신이 더욱 큰 작용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겐 자유의지가 없다는 주장은 말도안되는 주장이 된다. 인간은 단순한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 되었고, 문명을 이루었으며, 자기 행동을 스스로 통제할 능력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질문이다. 그리고 어떤 대답을 해도 반론이 들어올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인 해리스는 자유의지는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했다면 그 행동의 저변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그리고 또 알 수 없는 어떤 원인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례들을 제시한다.
결과는 같지만 제시된 원인이 달라짐에 따라 우리는 판단을 다르게 하게 되는데... 자, 그 결과를 이루는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원인이 달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얘기다.
무언가 답답하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않은가. 무슨 행동을 해도 그것은 내 자유의지가 아니라 어떤 원인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일 뿐이라는 얘기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범죄자는? 그는 단지 꼭두각시에 불과하지 않았는가. 그를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가? 이렇게 가다보면 회의주의에 빠지고, 반도덕적, 반사회적으로 가게 될 것 같은데, 그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자유의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그렇게 하도록 조건지워진 인간의 행동일 뿐이라고 한다.
자유의지를 부정하면 사회가 더 도덕적이고 협동적일 수 있다고 한다. 왜냐고? 인간에게 "넌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어."라고 얘기하기 보다는 그렇게 행동할 수 있게끔 환경을 조성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란다. 즉, 사람 개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 때 그 자리에 존재하게 된 환경을 조정함으로써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면 타당하기도 하지만...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왜 그 사람들은 그런 환경을 조성하려고 할까? 그들은 우연히 그러한 환경에서 지냈고, 그러한 환경이 자신의 생존, 생활에 더 좋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인가?
결국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비슷해지는 결론으로 가는 건가? 이기적 유전자도 한없이 이기적이지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이타적일 수밖에 없다는, 그리고 단편화되고 파편화된 작은 유전자에서 통합적인 유전자체로 존재하기도 한다는. 여기에는 어떤 자유의지가 개입할 수가 없다는.
책의 논리를 따라가면 책이 논리에 수긍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책의 내부에서 그 길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가끔 책의 바깥에서 그 책을 바라보면 안 보이던 길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길이 어떤 길인지도 판단할 수도 있고.
자유의지가 없다는 이 논리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똑같은 교육을 받고,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똑같은 물질로 둘러싸여 생활한 사람은 과연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할까? 성범죄자의 화학적 거세, 사이코 패스의 뇌수술, 복제인간 문제, 또는 유전자로 그 사람의 질병, 반사회적 활동을 판단하는 문제 등에 어쩌면 이 책은 날개를 달아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 말은 이러한 문제를 이 책의 저자도 의식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유의지의 주술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정확히 유용함의 정도에 따라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이 변할 수 있는 지점에서는, 그들에게 변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변화가 불가능하거나, 변화에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지점에서는, 다른 길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자신과 사회를 개선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전적으로 자연의 힘과 더불어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힘을 쏟을 대상은 다름 아닌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이 책 79쪽)
이 말은 책임을 개인에게만 묻지 말아라. 책임은 사회에도 있다. 즉, 사회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병행하면서 개인에게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자유의지는 없다는 말을 좋게 해석을 하면 더 좋는 사회를 위해서는 개개인의 의지에 호소하기 보다는 전체적인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함께 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아니, 그렇게 듣고 싶다. 이건 내 자유의지가 아니라 내 안의 무언가가 그렇게 시키는 것이다. 샘 해리스의 이 책 주장에 따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