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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평전 - 모조 근대의 살해자 이상, 그의 삶과 예술
김민수 지음 / 그린비 / 2012년 12월
평점 :
카프카를 주욱 읽었는데, 카프카가 우리나라의 이상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작품의 난해성이라든지, 죽은 다음에야 더 유명해지고, 지금까지도 많은 연구 논문들이 나온다는 사실들이 말이다.
또한 둘이 비슷한 시대에 살았다. 이상이 조금 뒤에 태어나고 활동하지만, 이들은 활동했던 시기는 근대성이 꽃 피우던 때이고, 이런 근대성을 넘어서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던 시대이기도 하다.
포스트 포던이라는 말이 90년대에 유행했었는데, 이 때 이미 카프카나 이상은 포스트 모던한 작가로 우리에게 다가왔으니 말이다.
이상, 이상, 정말로 많은 책들이 나와 있다. 하다못해 그의 전집만 해도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시 출간되고 있는 상황이다. 전집이란 원본이 확정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학자들마다 이상 전집을 펴내려 하는 것을 보면 그는 21세기가 된 지금도 유효한 작가임에 틀림이 없다. 또한 아직도 연구할 것이 많은 작가임에도 틀림이 없고.
이 책은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건축과 미술의 관점에서 이상의 작품을 판단한 결과를 드러내고 있다. 기존에 이상에 대한 접근이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에 의해 주로 이루어져 이상 문학의 단면만을 파악하고 있다는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이상 문학이 열린텍스트를 지니고 있기에 다양한 해석이 다 타당하다고 하는 기존의 주장에 대해서 건축의 입장에서, 디자인의 입장에서, 또는 미술의 입장에서 그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미 이상은 서구의 최신 건축이론을 습득했으며, 일본을 통한 짝퉁 근대를 인식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통한 근대화가 짝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해낸 작가라는 것이다.
하여 주장에 설득력을 얻기 위하여 문학적인 접근이 아니라(그런 접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방향에서, 즉 미술적인, 건축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이상의 삶 자체가 건축학도였으며, 그는 근대 건축에 관심이 많았고, 또한 "조선과 건축"이라는 잡지의 표지 디자인에 당선될 정도로 디자인 쪽에서도 이미 앞서간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삶과 문학이 떨어질 수 있을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은 이미 당대의 한계를 넘어섰으며, 이런 한계넘어섬을 자신의 시로 표현해내고자 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 겪게 되는 몰이해, 비난을 그는 견디지 못하고 소설, 수필의 세계로 빠져들지만,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에 나온 해석을 비판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쳐가는데, 현대물리학, 천문학, 건축학, 디자인학 등이 종합적으로 이상을 해석하는데 동원되고 있다.
이 정도로 이상이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그의 작품이 어정쩡한 상태의 작품이 아니라, 서구에서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 다다이즘을 구현한 작품이라는 주장까지도 나오고 있다. 우리는 이미 100년을 앞선 작가를 지니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조선이라는 한 주변부 국가에만 국한되는 작품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닌 작품이라고 한다. 이런 이상을 '민족주의'틀로 이해하려 하면 안된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사람.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시대를 앞서갔다면 지금 우리는 이상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상이 바랐던 포스트모던 시대가 아니던가? 이미 이상이나 다른 서구의 작가들이 시도했던 작품 경향들이 해석되어 넘쳐나고 있는 시대 아닌가? 그럼에도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도, 문학을 배웠다는 사람에게도 이상은 아직도 어렵다.
몸으로 디지털세계를 사는 아이들에게도 이상은 어렵다. 그의 작품은 아직도 암호의 세계이다.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다른 사람들의 건축에 대한, 미술에 대한, 디자인에 대한 지식이 얄팍해서인가?
문학은 지식과도 어느 정도 상관은 있지만, 대부분 좋은 문학작품은 지식을 떠나서 마음에 와닿는, 그래서 해석이 아니라 감동을 주는 작품이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이상 문학에 들어가면 과연 이상 문학은 좋은 문학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또 하나 의문이 있는데, 이상이 완벽하게 시대를 앞서 갔을까? 그가 시대를 앞서갔다면 일본이 우리나라에 심은 문명이 짝퉁 근대화란 사실을 넘어서 일본의 문명 자체도 짝퉁이라는 걸, 동경에 가기 전에도 이미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러면 그는 동경에 가길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 문명의 중심이라는 뉴욕으로 가길 갈망했어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든다. 동경 갔더니 일본이 짝퉁이고, 우리는 짝퉁의 짝퉁이더라란 인식을 했다면 이미 그 자체로 이상은 시대를 앞서갔다고 할 수 없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든다.
그가 김기림에게 보냈다는 편지의 한 구절.
'나는 19세기와 20세기 틈바구니에 끼워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인 모양이오. 완전히 20세기 사람이 되기에는 내 혈관에 너무도 많은 19세기의 엄숙한 도덕성의 피가 위협하듯이 흐르고 있오그려.
... 그들(삼사문학 동인)은 이상도 역시 20세기의 스포츠맨이거니 하고 오해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들에게 낙망을(아니 환멸)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들과 만날 때 오직 20세기를 근근히 포즈를 써 유지해 보일 수 있을 따름이구려! 이 마음의 아픈 갈등이어.'
(권영민, 이상문학의 비밀 13, 민음사 276쪽에서 재인용)
이 책의 저자는 이상 문학에 대해서 이제는 정통해석을 내놓았다고 자부하는데, 글쎄? 이렇게 하나로 해석이 완벽하게 되면 이미 그 자체로서 이상의 문학은 저급한 문학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 완벽한 해석에 대한 반감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참신한 해석임에는 틀림없다. 이상 문학에 접근하는. 그래서 읽는 내내 재미도 있고 즐거웠다.
덧글
읽으면서 자꾸 눈에 거슬리는 게 있었는데, 이상을 자꾸 李霜으로 쓰는 것이다. 이 책에서 이상을 한자어로 표기할 때는 어김없이 李霜으로 나오는데, 이 책에 나와 있는 이상이 발표한 작품을 사진으로 실어논 부분에도 이상은 李箱으로 나온다. 왜 李箱을 자꾸 李霜으로 표기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그리고 왜 제목이 이상 평전이 모르겠다. 이 책은 이상의 삶에 대한 평가보다는 문학에 대한 해석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그냥 이상 문학 연구로 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